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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허무함과 5감의 센스 데이타
[비나리의 초록공명] 진실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석훈   기사입력  2006/04/27 [17:07]
1. 이데아
 
플라톤의 글은 딱딱한데, 재미없기로 소문난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더 딱딱하다. 그러나 플라톤이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가지 대화록은 정말 재밌다. 가끔 파이톤이나 그런 것들을 읽다보면 도대체 플라톤의 기억력은 어디까지인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설령 있다고 해도 그렇지 책 한 권이 넘도록 이어지는 대화들을 어쩌면 그렇게 ‘복기’하듯이 재생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는 엿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공식적으로 처음 한 사람이 플라톤이다. 양의 축적이 질의 변환을 만든다? 이런 말이야말로 플라톤에게는 그야말로 헛소리이다. “지혜로운 아테네 시민들의 힘을 모아...” 당시에 유행하던 이런 말도 플라톤 앞에서는 헛소리이다. 그렇게 잘난 자유민들이 모여서 겨우 결정한 것이 아테네 여신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 소크라테스를 죽여야겠다... 다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다면 그냥 그 시대에 뭔가 속이 상해서 한 마디 해본 것이겠거니 하지만 플라톤의 말은 다르다. 그만큼 플라톤의 얘기는 논리적으로 한 바퀴를 돌고, ‘논리학’이라는 말 자체도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것이니까 한 마디로 어떻게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해냈지라고 혀를 휘두르게 된다.
 
좀 엉성하게 정리하면 플라톤의 생각 중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까지 계속 연결되는 생각은 언어의 주술 구조에 해당하는 것인데, 동사와 같은 술어가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은 그 술어의 본질에 해당하는 무엇인가가 있고, 마찬가지로 주어의 속성도 본질적인 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그냥 속되게 표현한다면 “너희들이 보는 것은 다 거짓이야”라고 할 수 있다. 소위 5감에서 사람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sense data라고 부르는데, 이걸 통해서 사물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실체가 이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속게 되어있다. 사물은 그야말로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본질들이 모여 있는 그곳을 피안, 저너머, 하여간 누구 맘대로 불러도 좋기는 한데, 이런 게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플라톤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어차피 인간이나 심지어는 역사마저도 모두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역사라는 것은 이데아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과정이다. 그야말로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한 것이고, 잘 좀 해보겠다가 이리저리 아무리 잘 해봐야 점점 더 탁해져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상당히 우울하다. 뭘 잘 할 것인가 고민해봐야 소용없고 얼마나 덜 나빠질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그것도 이데아로 돌아갈 가망성 없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민주주의로 결정하면 뭐가 좋아져? 그야말로 엿 같은 소리이다. 가장 화려하고 교과서적으로 정확한 직접 민주주의를 노예제 위에 직접 해본 아테네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만약 플라톤 같은 사람이 나와서 이런 얘기하면서 현인인 척 했다가는 TV 토론에 끌려나와서 독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 동네는 낙후되었는데 어떻게 개발시켜줄거냐, 한미 FTA는 어떻게 할거냐... 아마 맞아죽기 딱 좋거나 아니면 왕따되기 십상이다.
 
요즘의 ‘가상’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아닌 이미지 속의 또 다른 본질을 의미하지만 플라톤에게는 우리가 눈에 보는 이 실체 자체가 가상이고 진짜는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그 실체를 드러낸 적이 없는 그 어느 곳에 있고, 이 모든 것은 허상일 뿐이며 거짓이고, 본질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그림자에 불과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본질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 정치인들이 자기 힘 갖기 위해서 하는 위선에 불과하다.
 
여기에 역사의 로고스니 하는 말을 붙이면서 “그래도 뭔가 좀 해봅시다”라고 얘기한 것은 플라톤이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운다”, 그러니까 참고 기다리다보면 영광 아니면 진실이라도 온다고 말한 사람은 헤겔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공화국 속으로 돌아가면 이런 얘기는 다 헛소리 비슷한 얘기들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해? 그 뒤의 플라톤의 사회처방은 좀 끔찍하고 차마 입으로 옮기기 좀 민망스럽다.
 
하여간 아테네로부터 망명 중 과두정치를 비판했다가 노예로 팔려가는 등 고생 억수로 하신 분이다.
 
2. 음장과 정위감
 
음장이라는 용어는 야마하라는 회사에서 유행시킨 용어이다. 알다시피 전자 피아노에서는 거의 선두권에 있는 회사이고, 일제형 저가 리시버의 대명사인 회사가 바로 이 회사이다. 물론 저가라고 해도 아주 싸지는 않다. 이 회사가 악기장사 하다 보니까 소리에 대해서 데이타가 누적된 걸 좀 많이 가지고 있기는 하다. 하여간 콘서트 홀에서 퍼지는 교향곡 소리 아니면 교회에서 들었던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나름대로의 느낌으로 살려준다고 음을 왜곡시키는 기술을 ‘음장(sound field)’이라는 말로 유행을 시키면서, 이제는 예전에 정위감이라고 사용하던 개념에 음장이라는 말을 범벅시켜서 표현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실제 무대에서 연주 상황에서 듣는 것 같은 효과를 어떻게 재생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예를 들면 피아노는 왼쪽에, 트럼펫은 오른쪽에, 그리고 보컬은 정중앙에서 나올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물론 2개의 채널로 재생하는 스테레오에서는 이러한 입체감을 살릴 수 있다. 이것이 조금 더 나아가면 좌우의 위치만이 아니라 깊이라고 표현하는 depth를 어떻게 낼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더 앞에 있는 악기는 더 가깝게 들리고 뒤에 있는 악기는 더 뒤에서 들려서 만약 오케스트라를 듣는다고 하면 1열에 있는 악기들과 2열에 있는 악기, 그리고 최종열에 있는 악기를 구분해서 들려줄 수 있는가? 물론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여기에 좀 더 심하면 높이도 구별이 가능하다고 뻥치는 사람들이 있다. 4명의 합창곡인데, 키 높이 구분이 가능해서 놀랐다! 와, 내가 이렇게 좋은 스피커를 가지고 있다니...
 
소리맵시에 해당하는 소리결의 문제가 아니라 이 음장감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오디오쟁이로 본격 입문해서 지름신의 강림을 기다리며 ‘착한 가격’에 대해서 고민하며, 옆그레이드와 밑그레이드를 반복하는 바꿈질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이 음장감의 초절정감이 “스피커가 사라지는 순간”이라고 표현된다. 완벽하게 무대가 펼쳐지면서 스피커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이고, 2개의 스피커에서 3차원 입체영상이 펼쳐진다고 좀 딱딱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이걸 위해서 거실을 두고 감상실을 따로 구성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집을 단독주택으로 옮기는 일들도 종종 한다.
 
그래서 “최종 업그레이드는 집”이라는 표현을 쓴다. 직방형이 나와야 하고, 좌우대칭이 완벽해야 하고, 벽에도 적절하게 흡음재를 두어서 불필요한 공진을 줄이고, 스티커 밑의 나무 스탠드 안에다 모래를 구워서 채우기도 하고, 방진을 한다고 자석으로 기기들을 띄우는 소위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고, 정말 별 소란스러운 짓들이 벌어지게 된다.
 
3. 실제 연주와 녹음 엔지니어링
 
연주회에 가보면 느끼겠지만 실제 연주회에서는 정위감이니 음장감이니 그런 건 없다. 고치기 전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에서는 사실 좀 민망한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훨씬 좋은 연주회장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런 음장감 같은 건 없다.
 
그야말로 70년대 녹음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그렇지만 이게 깊이 빠지면 또 마약이다. 연주회장에서 콘서트를 보고 와서 음장감이 형편없었다느니 하면서 실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저음이 너무 약했다느니 혹은 고음이 부드럽지 않았다니 하기도 한다.
 
사실 연주회를 자주 갈 수가 없고, 집에서 그렇게 연주를 듣거나 연주하기가 쉽지가 않아서 그렇지 어떤 오디오도 실연보다 좋을 수는 없다. 물론 여기에도 길고 긴 과학적 논쟁이 있기는 했는데, 하모닉스라고 부르는 배음효과에 대한 것들이 최근에 논쟁에 끼어들면서 실연은 재생되지 않는다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이런 배음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오디오를 통해서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음장은 거의 100%, 뻥이다. 녹음할 때의 연주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2트랙이면 좌우 하나씩 쓰니까 왼쪽에 마이크 하나 오른쪽에 마이크 하나, 그렇게 놓고 녹음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런 스튜디오 녹음은 없다. 음질 때문에 아직도 녹음실에서는 릴 테이프로 되어 있는 마스터 테입을 사용하는데, 이게 24트랙에서 32트랙, 좋은 것은 더 높게 구성이 된다.
 
처음부터 채널을 여러 개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전부 모여서 녹음을 하는 일은 잘 없고, 악기별로 나누어서 녹음을 한다. 그러니까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이 별도 채널별로 녹음된 것을 스테레오 트랙에 나누어서 배분하는 엔지니어의 믹싱 기법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그 자리에서 ‘같이’ 연주하는 것처럼 들렸다는 것은 녹음 상황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의 노하우에 감격하는 일이기는 하다. 물론 여기에서부터는 노하우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에 과학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대체적으로 옛날 LP 명반들이 최고라고 하는 이유 중에 그 당시의 엔지니어들이 지금보다 더 실력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들이 끼어있다.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계측기나 무향실 설비가 지금보다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감각이 더 발달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해본다.
 
그럼 실황을 녹음하면 되지 않겠느냐?. 물론 기분은 그런데 보스 스피커로 유명해진 보스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연주회에서 우리가 듣는 소리의 90%는 반사음에 해당한다고 한다. 앞에서 아무리 직접 녹음을 했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 대체적인 방향 정도를 구분할 수 있지 이미징 혹은 포커싱이라고 표현하는 정위감 같은 것이 녹음될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보컬의 키위치 같은 것들은 어차피 개인별로 다 마이크를 쓰는데, 그 상황에서 좋은 앰프와 스피커로는 노래부르는 사람의 키 높이를 알 수가 있다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실제로 완전 어커스틱 악기를 제외하면 요즘 연주들은 다 앰프를 사용해서 증폭을 하기 때문에 기타라고 해서 그 위치에서 소리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연결해 놓은 PA용 스피커에서 소리가 난다. 이건 보컬도 마찬가지이고, 한 마디로 락 콘서트에서 정위감이라고 하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연주자들의 ‘3차원 입체영상’과는 완전히 상관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인위적으로 재생된 음악에는 감동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데, 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눈 앞에 연주자가 있는 듯이 눈을 감으면서 그려볼 수 있다고 하는 건 그야말로 녹음 엔지니어의 발칙하고 발랄한 믹싱 노하우에 감격하는 것 이상은 아니다.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요즘은 녹음기법이 좋아져서 실제 연주에 어느 정도 근접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택도 없는 소리이다. 가장 싸구려 라이브 카페에서 하는 재즈연주라도 재생해서 듣는 것 보다는 훨씬 좋다.
 
물론 반론도 있다. “R석의 감동을 드립니다”라는 선전문구는, 어차피 좋은 연주회 가봐야 당신 능력으로는 R석이나 A석 못가고 뒤에나 앉아있을 것이고 게다가 정중앙의 앞자리에 앉기는 어차피 힘든 거 아니냐? 차라리 이거나 들으시지라는 말을 뒤에 깔고 있다. 뒤에 가서 듣는 게 그래도 낫기는 하다. 녹음과 재생 과정에서 발생하는 배음 효과의 상실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밝혀내지 못한 몇 가지 이론적 이유가 더 남아있을 수도 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레드북 CD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는 현재의 CD는 완벽하다고 하다가, SACD가 나오면서 CD로을 재생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작년에 SACD 레이블 생산업체들 중 몇이 차세대 포맷 때문에 더 이상 SACD로도 녹음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인간이 만든 매체 중에서는 릴 테이프와 LP가 아직은 가장 완벽한 녹음매체이기는 한데, LP 시절의 소리가 더 좋았다고 하면 아마 끄덕거리지 않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그렇긴 하다.
 
4. 눈을 감으면 진실이 보일까?
 
진실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는 하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단순하니까’ 혹은 ‘나는 가방끈이 짧아서’ 혹은 ‘나는 정치인이쟎아’ 아니면 ‘뭘 그리 골아프게 생각하냐’라는 말을 토를 달기는 한다. 물론 더 중증인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게 어쩌면 정말 옳다고 믿는 대중지도자들인 경우이다.

그런데 꼭 진실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건 필요 없고 잘 먹고 사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건 생각하기 나름일 수도 있지만, 진실이 필요없다고 하면 한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 혹은 무엇을 고민할 것인가의 값어치가 다르게 되고, 향후의 진화 궤적이 아주 달라질 것 같다.
 
아테네는 수없이 사라졌다가 없어진 조그만 도시 국가 중의 하나이고, 게다가 로마가 아테네를 승계한 것도 아니고, 로마 멸망 이후의 중세가 아테네의 종교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위에 서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보는 서양 문명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서양지식의 본원은 아테네라는 작은 도시를 생각한다. 그 말도 많고 부패도 많았고, 위정자도 많았던 작은 도시를 말이다.
 
우리나라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눈을 감으면 진실이 보일 것인가라는 질문도 호사스러워 보인다.
 
진실도 우습고, 진실을 우습다고 하는 그 진실도 우습기는 하다. 그렇게 돌고 돌다보면 쾌락주의와 견유주의가 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이 제일 많을 때 소크라테스가 등장했다.
 
가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돼지라는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눈과 귀 그리고 코나 촉감 같은 것들을 너무 믿는데, 요즘 그 중에 제일은 눈인 것 같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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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4/27 [17:0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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