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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성 강한 기독교, 유일신교 아니다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교우님들에게, 진정한 유일신교는 편협할수 없어
 
류상태   기사입력  2006/03/11 [12:43]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기독교는 유일신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는 유일신교이기 때문에 배타성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유일신교가 무엇입니까? 유일신관의 핵심 개념은, "신은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신은 우주만물 전체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유일절대자이며, 사랑과 정의, 평화의 신으로서, 인류 전체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고백됩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신, 즉 진정한 유일신은, 어느 특정인들에게만 계시되거나 그들과만 관계를 맺는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유한한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즉 하느님의 '유일성'은 전체 포용으로서의 '유일'이며,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크게 품으시는 '한 울'님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유일하신 참 하느님이 우리(종교)만 인정하셨고, 우리(종교)를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좁고 편협한 원시 유일신 신앙이 인류 역사에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유일신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세계종교로,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유일신교라도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기독교처럼 배타적이지는 않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공격적인 선교를 감행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다른 종교, 다른 신념체계를 존중할 줄 모르고 무모하고 공격적인 선교를 감행해 왔습니다. 그 결과 아름다운 인류 문화와 자산을 무수히 파괴했을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상했습니다. (아,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인류와 역사 앞에 사죄드립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구약에 계시된 여호와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여호와가 아니라 알라를 믿지 않느냐?"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알라'라는 말은 아랍어로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아랍어 성경에는 우리말 성경의 '하나님'이 '알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국 유대교인과 이슬람교인,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이 믿는 하느님은 완전히 같은 분입니다. 세 종교의 신도는 똑같이, 그 분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섭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슬람교인들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여 인류의 시조로 삼았고, 노아와 아브라함을 부르셨으며,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꾸란(코란)에 나타난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형제교회로 생각합니다. 비록 "기독교인이 위대한 선지자이신 예수님에게 신성을 부여한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형제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위의 세 종교는, 마치 부모님의 생각을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삼형제처럼, 하느님과 그의 뜻을 자기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통 유대교인은 하느님의 뜻을 자기들이 제일 잘 알고 있으며,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히브리성서(현대 종교학자들과 개혁적 신학자들은, '구약'이라는 표현이 유대교인들에게 결례가 된다고 하여 '구약성서'라고 하지 않고 '히브리성서'라고 합니다.)를 통하여 충분하고 완전하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으므로, 신약성서와 꾸란은 하느님의 뜻을 오히려 혼동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교인 역시 유대교와 기독교를 존중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히브리성서와 신약성서에도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하느님께서 '위대한 선지자 무하마드'에게 직접 '꾸란'을 불러주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무하마드에게 계시를 전달해준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 가브리엘입니다).

기독교인 역시 기독교가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종교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한 술 더 떠서, 아직까지도 많은 보수 정통(?) 기독교인들 중에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단언하며, 심지어 "사탄의 종교”라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처럼 같은 유일신 종교지만 유대교나 이슬람교에 비해 기독교, 특히 한국 주류 개신교는 훨씬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독선과 배타성이 옳은 것이냐 하는 것인데,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렇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나 사도행전 기자가 그렇게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객관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애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진실로'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 교우님들이여,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은 좋으나, 성경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임을 잊지 말고 읽어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출애굽 때 "이집트의 장자를 모두 죽였다"는 성서의 기록은,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어찌 사랑의 하느님께서,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집트 왕  파라오 한 사람의 고집을 꺽기 위해 죄 없는 아기들(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의 생명을 몰살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일 교우님이 그 때 그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래도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성서는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7절,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그렇다면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놓고는 그를 벌주는 괴팍한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또한 출애굽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겼다고 하여 모세가 레위 족속 사람들에게 살인면허를 주어 자기 동족 3천 명을 몰살시켰다는 기록이 성서에 나옵니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을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출애굽기 32장 35절,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그것은 기록자의 고백일 뿐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아, 성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무모한 신앙인지요. 그 신앙으로 그 옛날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소위 '정통'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성격'이나, '형성 배경', '당시 시대와 역사의 정황' 등을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이상한 폭군이며 변덕스럽고 무시무시한 신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원시적 교리에 갇힌 하느님이며, 교리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깨비 하느님일 뿐입니다.

한국 교회 교우님들이여, 교리에 의해 만들어진 '원시 신앙의 하느님'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만나고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성경의 문자 속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서를 넘어 계시며, 성서는, 그 문자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성서의 문자를 그대로 믿는 것은, "저 달을 보라"고 말할 때,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교우님이 이란이나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면, 기독교에 대해서는 소개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면, 아마 교우님은 독실한 이슬람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평화를 사랑하는 진실한 이슬람 자매형제님들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그럴 경우에, 기독교의 정통적 구원관에 따르면, 교우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그냥 선지자 중의 한사람으로 존경하는 차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보내지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되고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참사람으로 살아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었기에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구원관이 맞다면, 여러분에게 생명을 이어주신 조상님들도, 사랑하는 부모님도, 존경하는 선생님도, 역사상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성현들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모두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유일하신 참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우리의 하느님이 진정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거의 2∼3천년 전입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은, 그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기록을,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정통(?) 교리 때문에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리에 의한 배타적 유일신교 신앙'이 아니라, '진정한 유일신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은 그 전체를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시는 '한 울'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 '한 울'님은 전체 포용으로서의 '한 울'님이며, 그 신앙에는 배타성이 끼어 들 틈이 없습니다. 독선에 사로잡혀 인류의 아름다운 종교 유산과 신념체계를 모두 부정하는 '배타적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로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에만 계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주만물 전체를 창조하시며 섭리하시는 분, 모든 종교의 틀을 넘어, 인류 전체를 크게 품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을 기독교만의 하느님으로 만들어 교회 안에 가두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며, 하느님의 성품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 분의 성품을 모독하는 것, 그것을 기독교 용어로 '신성모독'이라고 합니다.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문제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려면, 양쪽의 얘기를 모두, 진지하게 듣고 나서 판단해야 합니다. 한 쪽 얘기만 듣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에는, 지금까지 거의 일방적으로 보수적인 얘기만 들어왔습니다. 심지어 목사님들도 '다른 견해'를 소개받지 못한 채 보수적인 신앙만 옳다고 일방적으로 들어온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와 교인에게 새로운 모색을 제시하는 류상태의 '한국교회는예수를 배반했다'     ©삼인출판사, 2005
한국 교회 교우님들이여, 제가 왜 이렇게 여러분에게 '다른 견해'를 들려주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를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시대에, 소위 정통 유대교인들은,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아 해석하신 예수님을 '율법을 부정하는 자'라 하여 이단자로 배척했습니다. (예 : 마태복음 5장 38∼39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출애굽기 21:24 참조)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붙들기'에서 벗어나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주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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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3/11 [12:4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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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리안 2010/11/12 [20:11] 수정 | 삭제
  • 배타성이 강한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
    대대로 세뇌공작된 머리에는 어떤 말도 들어가지 않는다.
    쥐 귀에 경 읽기다.
    차라리 비 기독교인들이 훨씬 더 이웃을 사랑하고 산다.
    류상태 선생의 고군분투가 안쓰럽다.
  • 하늘아리 2006/04/04 [13:54] 수정 | 삭제
  • 기독교에도 이런 생각이 트이신 분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네요
  • 방문 2006/03/14 [03:40] 수정 | 삭제
  • 유대교야 구원이 혈통으로 나오기때문에 선교할 필요가 없어서 선교를 안하는 것이지 배타성이 없어서 안하는게 아니잖아요. 배타성으로 말하면 유대교가 으뜸이죠. 그러기에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 어린이에게 눈하나깜짝 않고 총을 겨누는 것 아닙니까. 이슬람교는 기독교에비해 종교적 배타성은 덜할지 몰라도 원리주의에 빠져 정체된 종교 아닙니까. 그렇게 원리주의에 빠져 진보를 거부하려면 차라리 배타적인 기독교가 낫겠수. 이슬람 세계에서 억압받는 여성들도 동조할지 모르겠네요.

    한국교회의 배타성은 기독교를 전파한 서구에서도 볼수 없을만큼 배타적입니다. 기독교적인 본성을 따지기 전에 한국사회의 특성을 고려한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게 더 옳다고 봅니다.
  • 샘물 2006/03/13 [13:16] 수정 | 삭제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공간의 "한계"가 있을까 ?..

    우리가 살면서 접하는 시공간은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에 이 공간개념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공간이 될 것인가 ? 그런데 엄청 무한대로 확장시켜 우주의 "크기" (분명 "크기"라고 표시하였다 !)를 설명할 때...이 우주의 "크기"라는 개념은 오류에 바로 빠지고 만다. 우주의 크기가 있다면...그 크기보다 더 큰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만일 우주의 직경이 3.75 * 10의 10승 (상징적인 숫자이니..신경쓰지 말고..)이라고 최첨단과학의 연구결과가 증명하였다고 하면.. 이렇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만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공간이 존재할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다른 공간도 분명히 우주의 개념에 포함되므로 처음 적어놓은 공간의 크기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을 "유일신" 개념으로 접근할 때 빠지는 전형적인 오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유일신 개념으로 접근할 때 하나님 외의 다른 존재(하나님보다도 더 상위개념의 신적 존재)를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유일신 개념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무조건 샛길로 빠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비교종교학이나 자유주의 계통의 신학이 갈피를 못잡고 우왕좌왕하는 이유도 바로 그 것이다. 비교종교학적 유일신 개념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와 판단착오의 이유이기도 하다.
    --------

    아울러,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에 대하여...

    하나님을 "유일신" 개념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과오와 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타종교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접근, 이해하여 선,악의 구분으로 잣대를 들이대었던 그간의 역사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 즉 "유일신"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그 하나님 자신을 "평가"하는 근거로 동원되는 것은 매우 비신앙적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4~27)"

    불교나 힌두교, 이슬람교 등 기타종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바로 위 성경말씀이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인간이 만들거나 섬겼던 모든 형태의 종교는 바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는" 동시에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신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말씀과 예수님을 통한 직접계시는 직접 드러내보이시는 것이지만, 다른 종교에 대하여 하나님은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시려는 일종의 간접계시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말씀과 증거를 듣고 보았으면서도 무시하고 자기들의 종교를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 행위이지만, 하나님을 듣기 이전의 타 종교는 바로 위와 같은 섭리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타종교인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한 말씀과 증거를 올바르게 하고 있는 것일까 ? 하는 질문은 계속 숙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분명히 전하고 증거하였어도 기존 종교를 고집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범주이지만, 혹시라도 잘 못 들었거나 아니면 불충분하게 듣거나 보았을 경우 이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것을 분명히 이해하면..타 종교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점도 아주 분명해지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하여 멸시하거나 적대시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이지만, 타종교나 하나님 믿는 믿음이나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인 것이다.

    류상태 선생의 글을 유심히 읽다보면, 이 시대 교회의 바람직하지 못한 여러가지 점을 가슴아프게 지적하며 원래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피맺힌 절규와 외침의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유일신" 개념의 하나님을 하나님 그 자체로 이해하는, 잘못 꿰어진 단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유일신 하나님"을 찾지 말고.."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을 찾아보시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다.
  • 돌비수 2006/03/11 [22:33] 수정 | 삭제
  • 류상태님...

    님의 말은 십분 타당합니다.
    기독교의 선교정책과 배타적인 교리 그리고 답답한 유일신관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충돌을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죄악을 불러 왔고, 그로 인한 피흘림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죠.
    바로 신이라는 유일신이라는 존재는 어느 특정 민족에게만 계시될 수 없다는 것이 류상태님의 글의 논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단 한분밖에 없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비추어 볼 때, 유일신이라는 존재는 모든 인류를 구원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고, 현실에 있어서는 구원이라는 것은 타 종교는 대단히 두리뭉실하고, 원론적이고 피상적이며, 대단히 엉성한 것이 사실입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같이 특정 지역에 한정된 종교를 제외한다면 그나마 불교를 대안으로 볼 수 있는데 불교또한 너무 지식적으로 방대하고, 해탈만을 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로 제시하는데, 이건 너무 어려워서 성공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또한 나머지 종교들은 어떤 하나의 도그마에 빠져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그나마 기독교가 인류 전체의 구원을 담당할 수 있는 실질적인 종교인데, 자기 종교에만이 구원이 있다는 생각이 없다면, 반대로 그토록 절실하고, 간절하게 복음이나, 구원사역에 매달릴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 때문에 많은 충돌이 있을지라도, 기독교가 가진 조직력과 열성, 그리고 강렬한 힘은 어떤 종교에 비해서도 강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하나님의 사랑이 일체화되어 다른 종교와 기독교간의 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진정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 노류장화 2006/03/11 [18:23] 수정 | 삭제
  • 성경은 고백의 언어이며 계시의 언어입니다.
    이 이중성을 진실하며 성실한 기독교인은 잘 압니다.

    고백의 언어로서의 성서는 하나님 경험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해줍니다.
    계시의 언어로서의 성서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말해줍니다.

    소위 '진보'인 양 하는 '나름대로의' 기독교인들은 보수적인 기독교인을 무식한 사람들로 치부해 버립니다.
    무식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여깁니다.
    대단한 오만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