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간부의 성범죄와 이에 대한 민주노총의 조직보위 우선 대응 의혹이 여론의 화살을 맞고 있다.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면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의 비난은 그런 수준이 아니다.
이 사건을 알리는 포털 기사의 댓글들을 보면 성범죄와 상관없는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민주노총, 혹은 노조, 혹은 좌파에 대한 증오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댓글들은 민주노총을 해체하라거나, 노조는 원래부터 그런 놈들이라거나, 좌파운동권은 옛날부터 여자들을 그렇게 대해왔다는 비난이 주류를 이룬다. 오직 증오뿐이다.
성폭행은 당연히 근절해야 할 범죄다. 하지만 그것이 노조, 좌파, 운동권 일반을 싸잡아 비난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민주노총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부장적인 문화를 일신하는 것과 노조를 해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번 사태는 한국사회가 민주노총과 노조를 그동안 어떻게 봐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생각해왔다.
'민주노총 = 현대자동차노조 = 귀족'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공적은 좌파나 노조와 일반 국민을 화해시킨 것이다. 지난 촛불집회 때 노조, 좌파와 일반 시민, 그리고 시민단체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다.
일반 시민은 고사하고 시민단체도 평소에 노조나 좌파와 함께 하지 않는다. 흔히 시민단체와 노조를 싸잡아 좌파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둘의 관계는 매우 소원하다. 노무현 정부 내내 그래왔다. 노조와 좌파는 한국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 민주노총 내 '성폭행 미수'사건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7일 까지 허영구 부위원장 등 5명의 지도부가 사퇴의사를 밝혔다. © 민주노총 | |
대신에 노조는 조직력으로 자신의 사업장에서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국민은 그들의 투쟁을 강력히 비난했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터지자, 미운 놈이 또 사고 쳤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이건 자해다. 민주노총을 증오하는 국민들은 자기 발목을 치고 있다. 민주노총마저 사라지면 이 나라에 조직된 노동의 힘은 완전히 거세된다. 노동자의 조직된 힘이 사라지면 대한민국은 이대로 침몰한다. 지금은 노조를 강화할 때지 때릴 때가 아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1987년에 시민운동권은 독재에 반대해 싸웠다.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다음 불행히도 권력의 일부를 나눠받은 시민운동권과 노조는 이내 갈라졌다. 노조는 자기들끼리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치러냈다.
외환위기 이후 시민사회가 일반적인 민주화 이슈에 함몰됐을 때 노동계에는 정리해고, 노동유연화라는 칼바람이 닥쳤다. 그때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민주화와 민생파탄이 동시에 진행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 결과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이다. 국민이 민주화를 민생파탄으로 오인하고, 또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친노조 정권으로 오인해서 그 반대세력에게 표를 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1987년 이래 민주화 시민운동권과 노조세력은 계속해서 서로 멀어져왔다.
그 결과 몇몇 시민단체들은 국가정책입안에 참여할 정도로 성장했는데 노조는 변방에서 투쟁이나 하는 구도가 고착됐다. 국민은 투쟁만 하는 노조가 얄밉다. 게다가 노동유연화의 결과 노동 내부에서도 분열이 시작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화다. 그것은 정규직 집단인 민주노총에게 귀족이라는 오명을 안겼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민주노총이 만든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노동유연화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와 미국(IMF)의 합작품이다. 노조는 그것을 막기 위해 결사적으로 투쟁했었다. 그때 만약 노조의 힘이 전경련처럼 강고해 노동유연화를 막았다면 오늘날의 비정규직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조직된 노조의 힘이 국가정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고한 스웨덴은 결국 그 노조의 힘으로 복지사회를 만들었다. 한국의 노조는 그럴 정도의 힘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지루한 투쟁만 한다.
또 한국의 노조는 이기적이다. 이것은 민주노총 때문이 아니다. 전국 규모의 연대노조가 없이, 각 회사별로 쪼개진 노동계의 구조가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거기에 정리해고와 노동유연화는 정규직 노조의 보호보능에 불을 붙였다. 최대한 자기들 이익을 각 회사 차원에서 극대화하게 되는 구조다. 이건 민주노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구조의 문제다.
이번 사건을 두고 좌파와 운동권일반을 싸잡아 비난하는 댓글과 함께 민주노총과 이명박 정부를 동일시하며 둘 다 사라져야 한다는 댓글들도 많았다. 이런 식의 냉소로는 한국사회를 절대로 정상화할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강력한 전국 규모의 초대형 연대노조를 건설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노동계가 힘을 갖게 되면 그들의 투쟁력이 자연스럽게 양극화 해소와 국민소득증진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말 이후로 부자들의 소득은 늘었는데 노동계의 소득은 줄었다. 이건 노조세력이 빈약한 미국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반면에 강력한 노조세력이 있는 스웨덴이나 핀란드에선 아무리 경제위기가 닥쳐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핀란드에선 노동법 관련해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교육을 따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런 교육을 안 받아도 노조의 힘이 워낙 강해 일상적으로 노동자의 권익이 지켜지기 때문이라는 핀란드 사람의 인터뷰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산업국가다. 노동자의 이익은 곧 국민의 이익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노조의 이익과 국민의 이익이 별개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민주노총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만약 민주노총이 충분히 커서 전체 노동자를 포괄했다면? 그땐 국민의 인식도 바뀔 것이다. ‘나’와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되는 거다.
이번 사건은 물론 나쁜 일이다.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백번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일을 기회로 묻지마 민주노총 때리기의 모습을 보이는 한국사회도 문제가 있다. 지금 자본권력이 폭주하고 있는데 노조를 증오해서 국민이 얻을 것이 무엇인가?
민주노총과 노조는 잘못한 부분만큼은 냉정히 지적해 고쳐야 하되, 근본적으로는 국민이 키워줘야 할 세력이다. 그래야 국민이 산다. 노조와 분리된 우리의 시민운동과 민주화의 역사를 상기하라. 민생파탄이었을 뿐이다. 국민들이 엉뚱하게 그 분풀이를 다시 노조에게 함으로서 더욱 참혹한 민생파탄의 씨를 뿌리고 있다. 이건 역사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