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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유연한 진보'로 한게 뭐있소?
[언론시평] 하는일마다 ‘교조적 입장’ 되풀이, 유연한 진보 언급 자격없어
 
양문석   기사입력  2007/02/20 [16:16]
“저는 이제 우리 진보가 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필요하면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채택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유럽의 진보진영은 진작부터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참여정부의 노선은 이런 것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유연한 진보’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교조적 진보’에 대응하는 개념이라 생각하고 붙인 이름입니다.”

참여정부가 정녕코 유연한 진보라고 생각하는가? 유럽의 진보진영과 비교하면서까지 참여정부가 진보였음을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가? 하지만 착각은 자유다. 참여정부의 사람들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참여정부가 그 동안 보여준 대표적인 정책을 집중 점검해 보자. 일단 이 번 글에서는 참여정부 1년 동안 한 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참여정부가 유연한 진보를 언급할 자격이 있는지부터다.

‘유연한 진보’의 이라크 파병

2003년3월

대통령직에 오른 노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가사회적 의제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라크 파병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처음부터 왜 우리는 미국이 자국의 군산복합체 이익극대화를 위해서 벌인 전쟁놀이에 우리의 젊은 군대를 파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타당한 이유도 없이 파병을 해야 하는가? 엄청난 경제부담을 안고 파병한 이유가 이라크 재건사업에 공사권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미국에 잘 보여 한반도 전쟁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그 후 이라크 재건사업에 한국 기업이 어떤 사업권을 땄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참여정부의 그 강력한 홍보라인이 이런 일이 있었으면 대대적인 홍보를 마다할 리  없을텐데. 또한 대규모 이라크파병 이후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어떤 안정을 찾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파병 후에도 줄곧 부시와 그의 측근들은 ‘대북선제공격’을 운운하며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최근 오히려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가 곧 일본과 호주에 이라크파병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전하러 가며 한국은 방문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 국민들의 분노만 사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해 주었는데도 미국은 고마워하지 않았고, 당연히 경제적 이득을 준 것도 아니고 평화를 보장해 준 것도 아니다. ‘유연한 진보’가 이룩한 대미 외교의 성과다. 미국을 몰랐다고 할 셈인가? ‘유연한 진보’는 그 때 그 때 달라요?

‘유연한 진보’의 미국관

2002년 4-12월

“나는 미국에 볼 일 있으면 가고 볼 일 없어도 한가하면 가지만, 국내 정치용으로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 (2002년4월 서울 지구당 간담회)”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해) 부시 대통령의 사과가 필요하며 그것을 요구한다 (12월4일 외신기자클럽 간담회)”

2003년 5월

“53년 전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 (13일 코리아 소사이어티 주최 연례만찬)

“미국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 자유와 정의가 항상 승리해온 나라로 대단히 부럽고 정말 좋은 나라다.”(14일 워싱턴 교민간담회)

외교적 수사인가 아니면 변절인가의 논란을 일으켰던 첫 미국 방문에서 쏟아낸 노대통령의 발언이다. 결국 이 사태는 초기 햇볕정책을 계승한 평화번영정책의 혼선을 가져와 한 동안 남북관계 경색으로 이어졌고, 그 후 햇볕정책을 복원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국민적 고통을 감수한다. 하지만 일관성을 상실한 정책은 언제든지 사고가 터지는 바, 지난 해 PSI논란 때 ‘가입 한다 안 한다’는 갈지자 행보를 촉발시켰고,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에 한국정부도 서명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유연한 진보’는 화장실 들어 갈 때와 나올 때 말이 바뀌는 신개념인 모양. 이럴 거면 차라리 ‘교조적 진보’가 낫다.

‘유연한 진보’의 노동정책

2003. 4-5월 철도노동자파업

조중동이 친노(親勞)정권이라고 비판했다. 철도노조가 2003년 첫 파업을 노정권과 타협으로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순간 일제히 조중동은 노대통령을 비난했다. 그 결과 타협 즉 정부의 약속을 이행해야 싸움이 끝나는데 현 정권은 이를 거부, 2차 철도노조의 파업을 유도했고, 파업 시작 몇 시간 만에 공권력을 투입, 무력으로 진압한다.

‘유연한 진보’가 ‘조중동’에 무릎 꿇은 첫 사례이자 일관된 노동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유사이래 어떤 정치권력도 민초들의 입장을 대변한 적이 없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한국에서 주류언론이 노동자들의 주장과 요구 그리고 파업의 이유를 객관적으로 전달한 적도 찾아보기 힘들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변호사니 노동전문변호사니 하면서 밥 벌어 먹고 살았고 지지표를 싹쓸이했던 노대통령이 전혀 새로운 노사관계를 정착시킬 듯 후보시절 가는 곳마다 ‘뭔가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줘 놓고 ‘혹시나?’를 ‘역시나!’로 고착시킨다.

이런 반노동정책이 어디까지 이어졌나? 노동계의 거센 반발을 무릎 쓰고 비정규직관련법안을 관철시킨다. 반비정규직 법안이라는 ‘진보진영’의 거센 항의를 뭉개버리고 통과시킨 법안이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가? 지금 대규모 해고사태가 어디서 집중되고 있는지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법안과 상관없는 KTX 여승무원 사건을 일으킨 철도공사의 이철 사장을 임명한 유연한 진보 노대통령의 임명권은 언급하지 않으련다. 이 법안만 보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정부와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각종 공사 등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확인해 보라. ‘유연한 진보’는 언제든지 진보의 원칙을 뒤집을 수 있다는 의미겠지. 노동시장유연성을 주장하고 싶겠지만, 이미 한국은 세계 최정상위의 노동시장 유연성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임을 모르진 않겠지. 차라리 ‘교조적 진보’라고 했으면...

진보진영과 수구진영은 항상 그 자리를 지켰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앞서 언급한 노대통령의 정책과 발언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살펴 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 아주 기만적이다.

*본 기사는 <미디어오늘>(www.mediatoday.co.kr)에도 게재됐습니다.

* 글쓴이는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입니다.
언론학 박사이며,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과
대자보 논설위원을 역임했습니다.

*블로그 : http://yms7227.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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