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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는 아나키즘이다.
[생명 창조시대의 자기경영 42] 엘리트는 아나키즘의 적인가 동지인가
 
이동연   기사입력  2005/10/06 [18:45]
아나키즘(無政府主義)
 
통치의 부재(不在)를 의미하는 그리스어‘an archos’에서 유래한 아나키즘. 원시 공산사회에서 정주 계급사회(定住階級社會)로 접어들면서부터 인류의 역사는 투쟁 없이 하루해를 마감한 적이 없다.
 
인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투쟁했으며 또 앞으로 무엇 때문에 계속 투쟁할 것인가? 평등과 자유를 위한 투쟁, 즉 아나키즘의 실현을 갈망해 투쟁해 왔으며 줄기차게 투쟁해 갈 것이다.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을 지켜본 헤겔은 '자유의식의 진보야말로 세계사 그 자체이다‘라고 말했다. 세계사의 흐름은 자유 의식의 진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유 의식의 최 정점에 아나키즘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과학의 발전도 아나키즘의 구현을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과학 발전의 의도가 부의 축적이나 개인 야망의 실현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결국 그 전체적 양상은 아나키즘에 좀 더 가까이 가는데 일조하고 있다.

도구와 교통의 발전이 손과 발의 해방에 기여했다면, 정보통신의 발달은 전통적인 화자(話者)와 청자(聽者)의 분리를 없애 일방적으로 세뇌 당해야만 했던 다수에게 객관적 판단의 자유를 주고 있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류의 마지막 남은 숙제인 생명의 자유마저 주려고 하고 있다.

어디 과학의 발전뿐인가, 예술의 방향도 아나키즘이다.
 
고대 예술은 춤이든 음악이든 회화든지 자연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신에게 비는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르네상스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간적인 것을 예술에 담아 내기 시작했으며, 18세기에는 모방(Mimesis)을 벗어나 감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이 도입되었다.

현대 예술은 전통 예술의 종말이라 할 만큼 자기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동시에 관람자에게도 해석의 자유를 주고 있다. 사회 전반이 그렇듯 현대 예술에서도 고상한 것들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키치-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기능적이고 편안한 것을 추구-가 범람한다.

아무래도  아나키즘 예술의 정수는  존 레논의 아름다운 노래 Imagine이다.

쓰나미 구호를 위해 마돈나가 열창한 Imagine. Imagine은 모든 권력 장치를 넘어서려는 사람들에게 사유의 신선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천국이 없다고..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고.. 소유물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욕심 낼 필요도 없고... 모두가 함께 산다고 상상해 봐요...

(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Imagine은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문명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간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인류의 미래이다. 대단히 가까운 미래이다. 인간의 본질 그 자체가 자유인 것을 어떻게 아나키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나키즘은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 역사적 경향이다.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이 경향은 계속 발전하고 개발되면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촘스키(N. Chomsky)의 말처럼 아나키즘은 단순 이념이 아닌 역사 진행의 원동력이다. 

아나키즘은 단순한 정치권력의 부재에서 그치지 않고 재산과 사제(司祭)의 부재까지를 요구한다. 모든 권력, 즉 국가 권력뿐 아니라 개인과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기업체, 종교 등 모든 조직의 권력이 개인들의 자유로운 협동을 방해하는지를 의심한다. 

아나키즘을 개인의 자유로만 국한한다면 일부의 오해처럼 아나키즘은 혼동, 무질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치면서 동시에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세 가지로 상정한다.

하나는 인간의 본래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존재로서 공동의 선을 추구할 만큼 충분히 선(善)하다고 본다.

둘은 인간이 지닌 선이 능력을 제도와 권력, 관습 등 인위적인 것에 의해 악해 진다. 그 중 특히 사유재산과 권위적인 국가가 인간을 서로 착취하게 만들며 악하게 만든다

셋은 사회변혁을 시도하는 모임이라도 자유로운 연대에 기초하지 않은 조직화된 운동은 권위조작의 또 다른 산물에 불과하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느낌이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기반으로 응집되어야 한다. 

자유를 본질로 하는 인간은 역시 똑같이 본질이 자유인 타자들과 공동체를 형성해 살아야 한다.  여기에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자유의 조화가 필요하게 된다.

자기의 절대적 자유를 자각한 인간이 관계행위를 통해 객관적 자유로 실현한 것이 법이며 도덕이며 이념이다. 따라서 법의 이념, 도덕의 이념은 자유이며 그 이념은 현존재가 파악한 개념이다. 

법은 아나키즘의 구현을 위해 점차 특수 계급을 위한 법에서 특수 계급을 말소하고 개별의 존엄을 구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

여기 엘리트들이 당대의 법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 당대의 법에서 더 진보해 가면 당대 엘리트들의 기득 권리가 해체되어 가기 때문이다.

당대의 법과 당대의 엘리트의 동맹은 대단히 강고 하다.

그러나 묘한 일은 당대의 법을 최고로 치하하면서도 당대의 법을 제일 많이 어긴 사람들은 바로 그 당대의 엘리트들이라는 점이다. 

아나키즘으로 가는 길목에는 언제나 당대의 엘리트들이라 불리 우기 원하는 가로막고 서 있다. 자율이 아닌 타율, 존재가 아닌 소유에 의해 질서를 잡고, 합의가 아닌 권위에 의한 복종을 요구하는 엘리트들은 자율적으로 재구성되어 가는 사회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역설적으로 엘리트들이 꼭 아나키즘으로 가는 장애물만은 아니다.

추악한 엘리트들은 아나키즘이 왜 우리의 미래여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다짐시키고 각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요즘처럼 엘리트란 말에 혐오를 느끼는 적은 없다.

자칭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뒷골목 양아치만도 못한 행동들을 보면서 서민대중은 엘리트의 지배와 가르침에 의문을 품으며 자연스레 아나키즘 의식화가 된다. 그래서 나는 30억 삥땅 사건을 일으킨 언론의 대표적 엘리트 홍석현에게 감사한다.

학계의 대표적 엘리트라는 일부 교수들, 연구비를 횡령해 그놈이 그놈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서민 대중에게 알게 해 준 그 교수들께도 감사한다.

더불어 재계의 대표적 엘리트 이건희에게도 감사한다. 일가의 변칙 증여가 문제되고  대통령선거에까지 개입했던 이건희 그리고 지금은 종적을 알 수 없는 회장님께 감사한다. 엘리트의 이중인격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아나키즘으로 가는 우리사회의 발걸음은 빨라질 것이다.

저 고대의 제사장이 버티고 있던 자리를 군주가 가로챘고 군주의 자리를 자본이 가로채자 약삭빠른 정치, 종교, 학술, 문화, 예술의 엘리트들이 자본과 결탁해 본연의 진실을 다 버렸다.

타락이란 문학은 문학, 종교는 종교, 학술은 학술 본연의 진실이 모든 자본으로 세탁된 것이다. 이 타락의 은폐를 쌍 방향 문화가 드러내 준다  

쌍 방향 문화에 결코 친숙해질 수 없는 엘리트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은 자본밖에 없다. 그들은 더욱 더 자본 애착증세를 보일 것이고 그럴수록 그들의 이율 배반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

아나키즘 경향으로 운동하는 역사의 제단 위에 고대제사장, 군주, 독재자, 영웅이 재물로 사라 졌으며 그 마지막 재물로 타락한 엘리트와 스타들이 뒤따를 것이다. 아나키즘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세력들은 역사를 끌고 가는 자유를 향한 진보 의식의 수레바퀴에 짓 밟혀 사라 져 간다. 영원히, 영원히 사라져 간다. / 편집위원

* 필자는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삼별초>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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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0/06 [18:4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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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물인 2010/10/09 [23:33] 수정 | 삭제
  • 그것을 무질서주의 정도로 생각하는듯하다. 하지만 무의 개념을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 의 개념인 무한의 개념으로 보면..무진장 많은 정부 주의가 된다. 강권적정부가 없어야 된다는 뜻보다는..아마도 일 개인이 스스로 자주관리의 주체로서 정부가 될수 잇다는 생각, 일 개인이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그래서 개인은 집단보다 더 존중되야 한다는 생각, 집단은 궁극적으로 집단을 위한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집단이 된다는 생각..등 여러가지 생각들이 무진장 떠오르게 된다. 무의 개념은 없다의 뜻이 아니라 무한하다라는 뜻이기에..다양한 상상력이 발동된다.
  • 인간 2007/03/06 [15:35] 수정 | 삭제
  • 저주받은 인간의 육체는 이용을 하지않으면 멸종한다.

    인간의 이용이 극한으로 다가갈때 어둠은 인사를 할것이다.

    인간은 욕심을 정지한적이 없다.

    욕심은 인간계층의 최상층부에서 시작한다.
  • 소나무 2005/10/15 [14:37] 수정 | 삭제
  • 맞습니다
    아나키즘의적은 엘리트입니다
    아나키즘을 증오하는 자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합니다
  • 투사 2005/10/08 [02:40] 수정 | 삭제

  • '천국이 없다고..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고.. 소유물이 없다고 생각해 봐요 욕심 낼 필요도 없고... 모두가 함께 산다고 상상해 봐요... '

    이건 말 그대로 상상이니까 가능하고 아름다운 노래인것을..
    인간에 대해 이토록 순진한 발상이라니..

    일부 부도덕하고 몰지각한 엘리트들이 있다고해서 이 세상에서 자본과 엘리트들을 모두 없애자는 것은 위험하고 유아적인 발상이다.

    뜬구름 잡는 이상적 비판은 집어치우고 인간에 대한 공부부터 하시길.....

  • 생존주의자 2005/10/07 [12:12] 수정 | 삭제
  • 생활공동체를 주장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의 실패를 보고도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니 천연기념물감이다.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 살던 모계사회가 붕괴되고 약탈을 잘하고 농경 목축의 부계사회를 이끄는 권력자가 나타난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제사장. 군주, 엘리트들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이동연씨는 폭넓게 역사를 보기 바란다.

    더나은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주장은 옳으나 불합리한 권력이기에 권력을 가진자들을 다 없애자는 주장은 옳지 않다.

    인류의 역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석기시대에도 생존을 위해서 권력자가 있었다. 제발 전제를 생각하지 않고 부분으로 역사를 보고 환상의 역사를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