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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主思派) 찬동
생명 창조시대의 자기경영 28
 
이동연   기사입력  2004/01/07 [17:33]

지난번 성탄절을 기념해 불교방송에서 주관하는 '무명을 밝히고'라는 프로에 한 비구니스님과 함께 초청을 받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대담프로를 진행하는 중앙 승가대학의 김상영 교수는 나에게 '이 시대의 종교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물어 왔다.

대 다수 국민들이 어느 종교든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나라, 특히 국회의원을 비롯한 지도층(?)이라 일컫는 사람들 대 다수가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는 나라, 그런데도  가장 비 종교적이고 물신적인  대한 민국의 현실을 고뇌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비구니 스님과 내가 동의한 대답의 핵심은 이러했다.

'한국의 종교는 그동안 스스로를 목적화했습니다. 목적화하면 우상이 됩니다. 종교는 목적이 아니고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종교가 개개의 사람들을 포교와 종교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기를 포기할 때에야 비로소 종교는 사회의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류의 평등과 개개인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기능해야 합니다.'
  
어찌 종교뿐이랴?
학교 교육이나 언론매체나 정치인들이나 인류 공동체의 구조를 해명하고, 공동체의 관계에 권력으로 개입하는 집단의 사람들은 늘 자신을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자리 매김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어떤 생물체 못지 않게 경험과 학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학습의 주도권을 지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공동체 - 국가. 시민단체, 언론, 교회, 사찰, 학교 등등 - 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단지 공동체를 위한 수단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저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목적으로 남으려 한다면 구성원들이 나서서 끌어 내려야 한다.

21세기의 인간들에게 제일 필요한 자유는 심리적 자유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심리적 종속 상태에 있다. 심리적 종속이야 말로 개인의 창의성과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게 하는 자유를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서커스 단장들은 코끼리 길들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코끼리가 아직 새끼였을 때 잡아와 말뚝에다 묶어 놓는다. 새끼 코끼리는 몇 번 그 말뚝을 뽑고 돌아 다니기를 시도해 보다가 안되니까 포기한다. 그렇게 길들여진 채로 자란 코끼리는 나중에 커서 어머 어마한 힘을 가지게 되었으면서도 그 말뚝에만 묶어놓으면 여지없이 말뚝에 사로 잡힌 코끼리가 된다. 과감히 말뚝을 뽑아 버리면 되는데도 그 짓을 할 수 없는 심리적 노예가 되어 버린다

이게 어디 단지 코끼리만의 이야기이랴 ?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원래 종속이론(從屬理論, dependancy theory)은 정치· 경제적 용어였다. 20세기를 풍미했던 종속이론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주로 남 아메리카의 구체적 현실에서 제기되었다. 
 
교역량은 늘어나는데 '남 아메리카의 경제는 왜 계속 침체되어냐 하느냐' 라는 고민을 하다가  북반구의 선진국과 남반구의 후진국사이의 종속적 관계에 주목하였다. 북반구의 선진국가들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규모의 세계 규모의 연계체계(system of links of exchange)를 잉여 수탈 메카니즘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종속 이론에서는 선진국들이 특히 상호의존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내세워 후진국의 선진화에 대한 꿈을 자극하면서 한편으로는 서구식 자본주의를 확산시켜 결국 후진국들을 종속시키려 한다고 본다. 차츰 서구 선진국가를 최정점으로 세계국가들이 서열화되어 간다. 이 서열속에 종속된 나라와 국민들은 헤어날 수 없는 침체속에 빠진다. 이 종속 메카니즘은 서구적 자본주의가 흘러 들어 가는 개별국가에도 예외없이 적용되어 극소수의 거대 자본가들이 상대적 소수 자본가들을 들러리로 앞세우면서 노동자와 서민들을 수탈한다.

종속이론은 개별 민족의 역량, 문화, 의식수준, 과학과 경영 능력 등의 경제 외적요인들을 간과하는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한때 저 개발국가들 사이에 열병처럼 번졌다.

이 종속이론을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자아를 점검해 보는 힌트로 원용(援用)해 보자. 나와 당신의 정신을 점령하고 있는 사상은 무엇인가? 나와 당신의 생각을 사로 잡고 있는 사건은 무엇인가?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가? 인간에게는 누구나 개인 감독관이 있다.  프로이드(S. Freud)는 그 감독관을 슈퍼 에고(super-ego)라고  불렀다. 그 감독관이 '꼬끼리의 말뚝'이다. 이 감독은 시도 때도 없이 늘 개인의 의식과 행동에 대해 늘 재판을 한다.

다행이 감독관이 선량하고 합리적이며 개방적이라면 좋으련만, 만일 이 슈퍼에고가 잘못된 교육이나 신념, 편견과 진리의 오해들로 왜곡되어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서커스단에서 자란 코끼리의 슈퍼 에고는 '말뚝은 절대 못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문명변혁기에 제일 희생당하는 사람은 문명 변혁이전의 슈퍼에고에 묶여 있는 사람이다. 또한 문명 변혁기에 가장 앞설 수 있는 사람들은 문명변혁기 이전시기의 슈퍼에고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말뚝을 뽑아 던지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사농공상의 계급의식에 얽매인 사람들, 간판에 집착해 부득불 전공에 관계없이 명문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부모들, 쌍 방향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 아직도 독자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일부 종이신문들, 남존 여비 사상에 얽매여 '기저귀발언'을 거침없이 내 뱉는 부류의 지도자들이 모두 문명 변혁기이전의 슈퍼에고에 사로 잡힌 사람들이다.

나는 절대 경험과 학습의 노예가 아니라고 아무도 큰 소리칠 수 없다. 유· 무식과 관계없이 누구나 다 시대의 아들과 딸들이다. 명문가니 서민이니를 가리지 않고 왜 지금까지도 한국의 아녀자들은 부엌에 들어가 당연히 밥을 하고 빨래를 해야 하며 한국의 남자들은 명절이면 안방에 앉아서 잔칫상을 받아 먹어야만 하는가? 아직도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슈퍼에고를 못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견 작가인 이경자씨가‘허스토리(http://herstory.hani.co.kr)’ 2004년 1월호에 자신의 이혼에 관한 심경을 밝혔다.
"나는 처녀로 28년 살다가 결혼해서 28년 살았다. 그리고 쉰 여섯살이 되었다..... 여자인 나를 남자의 말뚝에 고삐 매려고 아득바득 시달리는 어리석은 인생 다시는 살지않으려 한다. 남자를 벗어 던지자 비로소 내가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를 깊은 병에 들도록 한 분노는 남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학대한 것에 대한 분노라는 걸, 이제 깊이 깨달았다”
  
당신의 말뚝은 무엇인가?
무엇이 당신의 삶을 지치게 하고 퇴행적이게 만드는가?
우리를 옭아 매는 말뚝들은 원래의 우리의 것이 아니며 영원불변의 가치들도 아니다. 한 때나마 사회를 이끌어 갔던 계층과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설정했던 이념들에 불과하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그 이념들에 의해 훈육(訓育)받아 순치된 결과물이다. 우리는 3을 좋아 한다. 왜? 3은 양(陽)의 기본 수이며 하늘을 상징하는 성수(聖數)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4는 싫어한다. 아파트나 빌딩에서조차 4자 대신 F로 표기한 곳도 많다. 또 유달리 검정 색이나 붉은 색 등 특정 색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3이든4든 0이든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또한 한국 풍속의 세례를 받고 자란 사람의 슈퍼 에고속에는 꿈속에서 뱁이나 돼지를 보면 길하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 문명의 세례를 받고 사는 사람들의 슈퍼 에고속는 돼지나 뱀은 추악하고 마귀를 상징한다. 4자나 검은색이나 특정인이, 또는 돼지나 뱀이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슈퍼에고가 그 사물과 숫자와 그런 형태의 인간에 대해 혐오와 불쾌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퍼에고는 가능하면 백지 상태로 놓아 두는 것이 낫다.

그렇다고 우리가 받은 교육과 경험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세계관중에는 분명히 인간으로 버려서는 안될 소중한 진리도 있으나 반면 개인은 물론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도 도움이 안되고 단지 특정부류의 군상들과 몇 몇 사람에게나 좋을 내용도 있다.
 
고대, 중세 근세, 현대의 역사들을 고찰해보면 각 시대의 사람들이 품었던 세계관의 좋은 점과 어처구니 없는 면들을 비교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영웅이라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세계관을 초월해 있었다.  그러나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그 세계관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지독하게 강조하여 세뇌시켰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한다.
결코 '전문가는 중독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않된다.
게임 전문가는 게임에 중독되지 않는다. 마약 공장사장은 마약에 중독되지 않는다.  마작 만드는 사장은 마작에 중독되지 않는다.
 
그처럼 세계관을 만들고 세계관을 유포하는 사람은 단지 그 세계관의 주인이되어 세계관의 노예가 될 사람들의 무한 봉사를 받고있다. 정치인들을 보라. 어디 저들이 일관되게 자기 이념에 충실한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가? 필요에 따라 당을 바꾸고 쉽게 주군을 바꾼다. 국민들만 영 호남으로 갈려 한번 모신 주군을 섬기고 또 섬겨왔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항상 남의 종이 되어 산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주사파(主思派). 이 주사파야 말로 곧 인생의 전문가이다. 인생의 전문가는 아무에게도 휘둘리지 않는다. 인생의 전문가는 과거 자신이 받은 모든 교육과 경험들을 결코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활용 가능한 시종으로 부린다.

간디는 '나는 다른 위인들의 사상이 그 더러운 발로 내 생각을 밝고 다니지 못하도록 한다'면 자신을 주사파가 되어 자신의 슈퍼에고를 주체적으로 지켰다.

인생의 전문가들은 안다. 먼저 많은 경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떤 객관적 사실이나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슈퍼 에고의 인지적 왜곡 때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자. 이것만 인정해도 우리가 겪는 불행의 90%는 사라진다.

주사파여! 그대들이 21세기의 주인공이다. 우리모두 주사파가 되자.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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