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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의 갈림길, MB, 파멸이냐 파쇼냐?
[벼리의 느긋하게 세상보기]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이명박 정권의 내면
 
벼리   기사입력  2010/05/27 [03:54]
이제 돌이킬 수 없다. MB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남북관계 개선 40년사가 MB의 한 발짝에 파탄에 이른 것이다. 1972년 남북 공동 성명 이래 우여곡절을 거듭하면서도 그나마 희망의 진폭을 키워 온 것은 ‘대화’와 ‘타협’이었으며, 그 궁극적 목표로서의 한반도 ‘평화’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 거대한 변화의 임계점은 누구나 알다시피 천안함 사태다. 

김태영 국방장관은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조사결과를 믿는 사람이 70%밖에 안 된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 언급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것도 정반대 방향에서 섬뜩하다. 첫째, 이 여론조사 자체가 국방장관 자신에 대한 사형 언도임에도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계와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최소 징역 1년에서 사형에 이르는 중죄에 처해진다는 것을 군 최고 책임자인 그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머리 뒤에 총구를 두고도 웃는 형국이다. 둘째, 믿지 않는 30%의 국민들은 군사적 판단에 따르면 결코 아군이 될 수 없으며 ‘적’이다. 지금의 준전시상황으로 봤을 때 군사작전에 돌입할 경우 이들은 모두 반역의 무리가 될 것이다. 

하나의 가정. ‘만약 우리 군을 공격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리고 단 하나의 결론. ‘그것은 북한이다.’ 나아가 강화된 결론. ‘그것은 북한 <밖에> 없다.’ 가상으로부터 실재로 가는 가언적 판단의 이 계열. 이때 가상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곧 ‘적’이 된다. 가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어지는 적대의 논리. 그리고 이 가상의 논리가 실재로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모든 파시즘은 여기서부터니까 말이다. 가상의 적을 설정하기(유대인, 반소비에트 분자들). 반대자들(지식인들과 레지스탕스, 트로츠키주의자들 그리고 자각된 민중과 시민들)을 악마화하기. 적을 섬멸하면서 애초의 가상을 극대화하기. 내외부에 피와 살육의 권능을 과시하기. 파시즘의 효과는 이렇게 달성된다. 

최근의 정세는 이와 같다. 따라서 나는 천안한 사태를 전후한 MB 권력의 구도와 역학이 파시즘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MB 권력의 이러한 경향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서히 형성된 것이며, 초기의 권력 취약성을 만회하기 위한 ‘반동’이고, 한국사회 민중과 다중의 저항에 대한 수세적 ‘반응’이다. 

하지만 낡은 파시즘이 성공할 것인가? 나는 MB에게 하나의 성공비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즉 ‘관계성’을 장악하라는 것. 존재론적 선점. 가능할 것인가? 힘 닿는데 까지 해 보라고 할 수밖에. 우리는 노래나 부르며 애쓰는 MB를 위해 관이나 미리 짜 둘까. 

천안함 이전

이 시기에 MB 권력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권력에 대한 불신이 광범위하게 전염되었다. 국정지지도 상승률은 답보 상태에서 50%까지 갔지만 그 완만한 상승 곡선 배후에는 다중의 분노가 그만한 강도로 함께 자라고 있었다. 양적 결과가 말해 주지 않는 질적 강도들이 정세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미 현실화되어 있는 여론과는 별개로 잠재된 상태로 흐르는 이 역능은 재보선 결과로 잠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으나 MB 권력은 이 결과에 대해 순응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몇몇 국면은 따라서 MB 권력이 다중의 요청을 일방적으로 기각해 가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권력 기반을 침식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매우 폭력적이며 비합리적으로 진행되었다는 데 있다. 게다가 노골적이었다. 즉 상식을 벗어나는 동시에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 사람들은 모욕 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촛불을 들었을 때와는 다른 식으로 스스로의 ‘제헌권력’을 깨달아 갔다. 

이와 같은 잠재적 사태는 MB 권력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그리고 권력 주위의 동향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대적이었다. 촛불 기소자들에 대한 잇따른 법원의 무죄 판결(미네르바, PD 수첩)은 이러한 적대적 상황에 기름을 끼얹는 효과를 가져 왔다. 만약 MB 권력이 다중의 제헌 권능을 절반만이라도 받아 안고 갔다면 검찰의 기소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MB는 그리 현명하지 않았다. 검찰의 기소권 남용을 용인했으며 그 결과는 무더기 무죄판결과 다중의 MB 권력에 대한 냉소였다. 여기에 심각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제 다중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임계국면은 여기서부터다. 다중이 신민이 되지 않고 권력을 비웃으며 인민이 되는 순간. 권력은 즉각적으로 그동안 누려왔던 대의권력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역설적 상황이 도래한다. 권력도 마찬가지로 인민을 경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지는 부덕을 양산한다. 부덕은 몰락을 재촉한다. 인민을 경멸하면서 스스로 부덕해지기로 결심한 권력은 기층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삼성을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권력의 입장에서 봤을 때 불가사의한 것이거나 최소한 인터넷 상의 음모로 인한 것이다. 경멸할 만한 신민들이 현혹된 것이며, 그런 것 정도는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종합편성채널만 가진다면, 또는 영화진흥위원회를 장악하거나 KBS와 MBC를 국영화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터넷을 검열할 수만 있다면. 이 검열의 욕망, 이것은 다름 아닌 파쇼의 욕망이며,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괴벨스가 히틀러 밑에서 최초로 꿈꾸었던 것이기도 하다. 

임계지점으로 치닫는 정국 속에서 권력은 스스로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권력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즉 다중의 욕망이다. 하지만 다중이 사라진 자리에서 권력은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여기에 임계국면의 두 번째 계기가 도래한다. 한명숙 무죄 판결과 검사향응 파동이 그것이다. 

사실 한국사회 권력의 나르시시즘이 가장 탁월하게 작동하는 지점은 검찰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 그것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검찰의 나르시시즘은 곧 권력의 자기자정능력의 상실 정도를 나타낸다. 한명숙에 대한 기소는 노무현 서거 이후 검찰이 권력의 암묵적인 공모 하에 어떤 자기정당화에 빠져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러한 자기정당화는 무죄 판결 이후 향응 파동으로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검찰의 주인인 MB 권력이 또한 침묵했기 때문이다. 충견은 주인의 채찍만으로 길들여질 뿐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스스로를 제어하지 않는다. 이 주인-충견 관계는 양 쪽 모두가 독립 선언을 하지 않는 이상 지속된다.(노무현의 독립선언은 충견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인은 언제나 바뀔 것이지만 그에 따라 충견은 또 언제나 충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명숙 기소의 실패는 곧 한명숙 정치 재개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MB권력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죽은 노무현의 자식들과 수구층에 대한 미래의 책임 사이에서 말이다. 무간도. 

천안함이라는 불빛

이 무간도를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상황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천암한 사태 이전의 다중의 잠재력이 MB권력을 위협하는 국면들이다. “촛불정국과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노무현 서거 → 4대강 반대 → 종교계와의 갈등 → 재보선 참패 → 검사향응파동, 교육감 비리 → (?)” MB 권력은 ‘?’를 통해 이 위협적인 국면들을 탈출해야 할 절박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다시 말해 계속되는 다중의 냉소에 대해 스스로 소통을 끊고 있는 것은 대의권력의 본질상 지속적이지 못하는 것이다. 뭔가 대답이 필요했다. 그러나 깨달음은 너무 늦었고, 선거가 코 앞이었다. 심판을 기다릴 것인가? 그리고, 2010년 3월 26일 천암함이 침몰했다. 

침몰 소식이 전해지던 날 MB는 침착했다. 긴급회의를 마치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으며, 날이 밝자 (죽음을 무릅쓰고) 태연하게 백령도를 다녀왔다. 그리고 대답이, 아니 다중에 대한 공격이 밤사이에 조중동 기자실에서 준비되었다.

MB는 여전히 침착했다. 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했고, 얼마간의 불만을 터트리기는 했으나 공식적인 정치 패턴을 잃지는 않았다. 상당한 정치 공학적 고려가 투여되고 있었던 것일까? 야당과의 만남에서도 그는 말했다. “애초에 북풍을 원했다면 북한이 했다고 그러지 않았겠냐?”고 말이다. 이로서 알리바이가 생겼다. 그리고 이 신중함이 필수적인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아직 선거까지 2달이 남았고, 그때까지 이슈를 선점해야 하며, 외교적인 절차들이 필요했다. ‘연기는 피우되 불을 보이지 말라. 의구심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불 대신 붉은 천을 흔들어라. 모두 믿으리라.’ 

합조단에서 천을 흔들었다. 노무현 1주기 이틀 전. 사상 유래 없는 단시간의 조사를 마치고 유성매직으로 ‘1번’이라고 쓰여진 어뢰 조각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어김없이 가상(시뮬레이션)이 등장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다시 한 번 외쳤다. “북한 소행이다!” 학습된 바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중이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 들였다. ‘1번’이 실재라고 믿게 되었고, 시뮬레이션이 실재라고 믿게 된 것이다. 파블로프에게 큰 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2달 동안의 실험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순식간에 다중이 신민을 지나 우중이 된다. 

그렇다고 그게 다가 아니다. 분명 의혹이 제기될 것이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민간 조사위원 중 한 사람, 전문가 여럿. 준비한 대로 고소고발로 맞선다. 그 와중에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룰렛은 신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MB는 판돈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 담화 내용은 MB 권력이 이 도박에 올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제부터 권력은 파시즘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기 시작한다. 공포와 불안으로 다중을 우중화하기. 수구층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중간층에게 공포를 선물하면서 권력의 방향성을 강요하고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는 것이다. 경제는 일시적으로 요동칠 것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미 토건 세력과 재벌들에게 약속된 수 십조원이 있다. 경제 불안은 MB 권력을 흔들지 못한다. 

MB 파시즘의 미래

파멸이냐, 파쇼냐, 중간 항은 불가능했다. 천안함 사태는 MB 권력에게는 일종의 승부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강요된 것이다. 그동안의 다중의 저항에 대한 ‘반동’일 뿐이다. 더구나 46명이라는 목숨을 밟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정치적 리스크도 크다. 그 리스크를 감당하려면 오히려 거대한 허위가 필요하며 그것은 매우 폭력적 방식으로 관철될 것이다. 지방선거는 MB 권력이 선택한 이와 같은 파쇼적 경로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할 것이다. 

두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첫째 지방선거에서 패배했을 경우. 이때 MB의 선택은 심판대에 오를 것이다. 미국이 그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진상 조사가 탄력을 받을 것이고 레임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또 강하게 MB 권력을 덮칠 것이다. 이렇게 때문에 나는 선거에 패색이 짙어 질수록 MB 권력이 북한에 대한 자극의 강도를 높여 갈 것이라고 본다. 지금 MB 권력은 확전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일시적인 물리적 충돌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수구층과 중간층을 장악할 수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이렇게 해서 선거에 승리할 경우 그때부터 본격적인(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니라 실물화된) 파시즘이 시작된다. 한명숙은 다시 기소되고, 노무현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사회 전반적인 통제가 강화되는 것은 물론이며, 대북 정책은 일정한 유화국면을 거치긴 하겠지만 강경기조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통해 국내 불만 요인들을 제거할 것이다. 공안, 파쇼 정국의 도래.

그러나 한 가지 빠트린 것이 있다. 외부효과 말이다. MB의 천안함 담화 이후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했다. 수 십 조 원이 공중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또 국고채를 발행했다. 국가재정이 졸아드는 상황. 비명들이 나온다. 그것도 수구층 내에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생긴다. 정몽준도 말했다. “이제 천안함으로 정쟁하지 말자”고 말이다. 치고 빠지기. 물리적 충돌의 위협이 생기자 다중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선거용 천안함이 역풍이 될 수 있는 이 예민한 국면에 당 대표가 논의를 접자고 나온다. 여기 첫 번째 MB 파시즘의 한계가 있다. 결국 저들의 최대 무기인 안보논리로도 다중을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뭔가? ‘관계성’이다. 한국은 고립된 민족국가가 더 이상 아니다. 경제적 관계가 70년대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박정희 파시즘으로 돌아가겠다고? 글쎄. 관을 더 준비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 경제적 관계는 앞서 말했다시피 견딜만 한 것이다.

두 번째 한계가 더 본질적이다. 이 위험한 도박에 끌어 모을 충성스러운 우중들이 많지 않다는 것. 다만 그간 충분히 우둔해졌던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밖에 없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덕분에 그들은 쇠락해 가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다중들은 MB 권력을 냉소하면서 애초에 완전히 다른 ‘소통’을 하고 완전히 다른 관계성을 형성해 왔다. 파시즘이 이 관계성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인가?(구글에 완패한 MB 권력이?)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아니 그 이전부터 이 시도는 불가능했다. 파시즘의 둔한 몸놀림으로는 예리하고 재빠른 이들의 역능을 포획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일주일 남았다. 대통령 담화라는 임계지점이 24일이었으니까 그때가 되면 10일이 지난 셈이다. MB 권력 파시즘 10일? 다중에게 이것은 반격이 될 것인가? ‘지하의 격정’(Deleuze)으로 남을 것인가? - redbrigade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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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27 [03:5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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