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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검사님께, 검찰독립을 믿습니까?
우리 모두 진지하고 당당하게 삽시다
 
유시민   기사입력  2003/03/17 [23:30]
지난 3월 10일 아침편지 '대한민국 검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덕분에 막 문을 연 제 홈페이지가 좀 알려졌습니다. 이 홈페이지를 방문해 수백 개의 리플을 달아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생각에 동의하는 분도 많았지만 비판하는 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반응을 보면서 기다렸습니다. 혹시 어떤 검사가 자기의 이름을 걸고 논쟁을 걸어오지 않을까? 마침 김원치 대검 형사부장이 검찰인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기에 전문을 구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검사들만 볼 수 있는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이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반박문이 올라왔습니다. 시골 지청에 근무하는 젊은 검사 두 분이 편지를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인터넷 언론 사이트 <대자보> 필진인 양문석 박사를 통해 인터넷에 게재되었습니다.    

[관련기사]
하림, 나도 감히 평검사들을 변호한다,  대자보 98호
이승훈, 검사스러운 검새들이 검사로 거듭태어나기를 바라며,  대자보 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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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대한민국 검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호불호 따지기 전에 강금실을 배워라, 유시민씨 홈페이지 양문석,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대자보 98호

저는 이 편지를 쓴 검사가 대통령과의 토론회에서 발언했던 젊은 검사들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대변하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볼만한 문제들을 제기했다고 판단합니다. 중요한 대목을 하나씩 예시해 가면서 대화해 보겠습니다. 오늘 편지가 길어지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홈페이지에서 저를 비판하신 많은 네티즌들께 일일이 답변 드리지 못하는 처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편지에 다른 네티즌들의 비슷한 비판들에 대한 저의 생각을 함께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며칠 아침편지를 쓰지 못한 것을 사과 드립니다. 국립방송과 문화방송 토론회 때문에 짬을 내지 못했습니다.

인용문 가운데 '편집자주'는 양문석 박사가 첨가한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이 검사의 이름은 편의상 그냥 홍길동으로 하겠습니다. 신상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인적 사항과 관련된 부분은 빈칸으로 처리합니다. 홍길동 검사의 반박편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먼저 당신께서 '자격'을 따지시니 자격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00대 00과 00학번이고 00년부터 소위 운동 좀 했습니다. 00년도에 군대 갔다가 00년 제대해서 현장 준비(편집자주: 노동운동)하다가 '학삐리'는 필요 없다는 대세에 밀려 어찌어찌 살다가 사법시험까지 봤고 00년 검사가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정도면 말을 할 자격은 갖추어 진 셈이죠?

대통령과 토론한 검사들은 30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분들도 제 글을 읽고 홍검사처럼 제가 검사들의 자격에 시비를 걸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대통령도 법무장관도 저도, 그 누구도 그들의 '말을 할 자격'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검사 자격을 의심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죠. "386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검사들 가운데 강금실의 법무장관 자격에 시비를 걸 권리를 가진 이는 하나도 없다." 검찰 전체 분위기도 그러려니와 젊은 검사들까지도 강금실 장관을 장관으로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 부당성을 지적한 것뿐입니다.

저도 1978년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법대를 지망했고 사법시험을 치려 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선택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강금실 장관은 저와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저는 그가 한 선택도 존중합니다. 홍검사도 같은 고민을 한 끝에 강금실 장관과 비슷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선택을 또한 존중합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홍길동 검사가 노동운동을 하다가 그만두고 사법시험을 본 데 대해 어떤 부정적인 선입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홍검사가 한때 노동운동을 했기 때문에 말을 할 특별한 자격을 지녔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우리 모두가 자기가 한 선택이 부끄럽지 않도록 떳떳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강금실이든 홍길동이든 유시민이든, 저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잘 살면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유신시대에 사법시험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그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가 한 선택에 충실하게, 변호사로서 또는 정치인으로서, 자기가 느낀 만큼 실천하면서 살았고, 그래서 저는 그를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제게는 같은 시대에 강장관과 같은 길을 걸어간 선배와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당당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분들을 저는 존경합니다.      

대통령과의 토론에서 검사들은 아내를 돌보지 못하는 남자 검사들의 애로와 만삭의 몸으로 야근을 한 여자 검사의 이야기를 했고, 저는 그런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검사들의 의식과 정서를 비판했습니다. 홍길동 검사도 그 발언들이 그 날 그 토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너무나 야박하게 비판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검사들에 대해 무슨 원한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그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서 제가 감정적인 비판을 한 것 역시 적절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직 인격수양이 부족합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선인들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혹시 검사들의 가족들 가운데 제 말에 상처를 입은 분이 계시다면 그분들께도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

세월이 지나면 그날 대통령과 토론했던 젊은 검사들 중에서 검찰총장도 나오고 법무부장관도 나올 것입니다. 그들의 수준이 후일 우리 검찰의 수준을 결정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의 젊은 검사들이 절제하는 생활, 공부하는 자세, 소신을 잃지 않는 업무처리, 검찰조직 외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열린 마음을 지켜나가기 바랍니다. 검사의 길을 택한 초심 그대로 자기 길을 가서 큰 검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검찰조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책임질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평검사들이 나라의 동량재로 커나갈 수 있을지 몹시 걱정합니다. 홍길동 검사의 다음과 같은 말씀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항목에는 이런 말도 있네요. 검사들에게 쫓기고 박해받은 한총련 수배자, 구속된 양심수... 저는 감히 묻겠습니다. 이게 검사 책임입니까? 검사는 법을 수호하고 집행합니다. 악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무리 처벌하기 싫은 피의자도 현행법을 위반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검사 맘에 들면 봐주고, 맘에 안 들면 처벌합니까? 저는 요구합니다. 그 놈의 현행법 좀 고치세요. 국보법 얘기 몇 십 년 되었지요? 검사가 국보법 폐지하지 못하게 하고 있나요? 도대체 누구 책임입니까? 그게 저희들 책임입니까? 저는 공안부에 떨어지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만약 공안부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실망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가요. 언젠가 신문기고에서 국보법 이야기를 하셨지요? 제가 당신보다 얼마나 나쁜 놈이기에 이런 얼토당토않은 비난을 들어야 하지요? 당신의 글 마지막 부분에 강금실 장관을 배우라고 하면서 법관으로서 할 일을 했으며, 철저한 법률가라고 하셨지요. 법을 어긴 사람을 잡는 경찰관은 죽일 놈이고 훈방시켜 준 판사는 훌륭한 법률가인가요? 장관님은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한도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물론 잘 하셨지요. 저도 그런 판사에게 재판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운이 안 따랐나 봅니다.
어떤 의도로 위와 같은 주장을 하신 건가요. '검사가 현행법을 어기고 법 집행을 맘대로 해도 좋다', '기분에 따라 일해도 좋다'는 주장을 하시는 건가요? 정반대로 죄는 안되지만 나쁜 놈이라고 생각되면 전부 잡아넣으면 어떨까요? 그런걸 원하십니까? 법 집행을 하는 검사가 그렇게 기분 나쁜 존재입니까?


그렇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만든 것은 검사가 아닙니다. 국회의원들입니다. 검사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법대로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홍길동 검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검사인 동시에 법률가입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당신은 법률가로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국가보안법이 헌법을 짓밟는 악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 또는 사회 구성원 다수의 뜻에 반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표현했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는 법률은 문명국가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검찰이나 법무부가 단 한 번이라도 국가보안법 개정 의견을 낸 적이 있습니까?

홍길동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공안검사들이 자기네가 '반국가단체', '이적단체' 조직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수사할 때 형사소송법을 비롯한 관련 법규를 제대로 지켰다고 믿으십니까? 지난 시대 김근태씨가 고문 흔적인 상처딱지를 변호인과 가족에게 전달하려 했을 때 그가 고문당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증거 보존을 방해했던 검사가 검찰조직의 존경받는 선배로 통하고 대통령과 '맞장을 떴던' 386 평검사들이 집단으로 몰려가 그 검사에게 검찰 잔류를 읍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분노를 넘어 슬픔을 느낍니다. 출세를 위해, 또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이념을 위해 사람을 고문하거나 고문 사실을 은폐했던 공안검사들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서도 승진을 거듭한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입니까?

홍길동 검사님. 당신이 직접 쓴 위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법률가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법률가의 체취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검사는 단순히 무언가를 집행하는 로봇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학 4년의 학업과 그 어려운 사법시험 공부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이런 자세로 법률을 집행하는 사람이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격무에 시달리느라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개인의 자유와 국가권력 사이의 필연적 긴장관계를 다룬 좋은 책도 짬짬이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홍검사가 제 편지에 심정이 상한 나머지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한 번 엇나가 보신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홍검사는 검사들이 격무를 자초했다는 저의 주장을 반박하셨습니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 요구에 대해서 판단을 유보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기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권고합니다. 경찰과 대화해 보십시오. 그들은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침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배제하려는 의도 역시 없습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 등 관련법규에서 검찰이 모든 사건 모든 영역에서 경찰을 지휘하도록 한 것을 고치고 싶어합니다.

경찰도 기소 불기소 여부를 검사들이 판단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검사들은 경찰의 수준을 의심합니다. 홍검사의 글에도 그런 의심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경찰은 검찰의 '횡포'에 반대합니다. 경찰의 자율적 영역을 검사의 시혜에 의해 받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그들은, 예컨대 검찰 직원이 술집과 파출소에서 난동을 벌이고도, 검찰 직원이기 때문에 별 일 없이 넘어가는 일에 대해서 모욕감을 느낍니다. 제가 검사의 격무를 자초한 것이라고 한 이유는 검찰이 이 문제에 대해 너무나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검찰에 몸을 낮출 것을 권고합니다. 몸을 낮추고, 어깨에 힘을 빼고, 사법시험과 경찰대학 입학시험은 격이 다르다는 식의 자부심 또는 우월의식을 잠시 접고, 그렇게 해서 대등한 입장에서 경찰과 대화해 보십시오.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도 검찰의 업무량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음은 검찰의 정치적 독립 또는 정치적 중립에 대한 문제입니다. 홍길동 검사는 정의감이 무척 강한 분입니다. 젊은 검사답습니다. 저는 당신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흔쾌히 동의합니다.

재벌개혁 많이 떠듭니다. 저도 어떻게든 그 일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얘기를 들어보면 제도개혁으로서의 재벌개혁만 되면 여태까지의 실정법 위반, 다수 투자자들에 대한 막대한 손해쯤은 충분히 봐 줄 수 있다는 분위기인 것 같은데 아닙니까? 2천 만원 사기 친 놈들 구속하면서 경제를 말아먹는 놈들은 어떤 짓을 했든지 그냥 봐주자고요?

그런데도 홍검사는 그걸 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외압'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외압에 대한 홍검사의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몇 부분을 편집해 봅니다. 문장의 순서는 바뀌었지만 메시지는 같습니다.  

얼마 전 노 대통령의 사정속도 조절 발언도 그 외압 중 하나라는 것 모르십니까. 적어도 지금까지 검찰이 판단하기에는 외압이 분명합니다. 정 원하신다면 봐줄 수 있지요. 하지만 다시는 검찰이 자기 역할 못한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정치권력이 수사하라면 하고 말라면 안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검찰이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역대 정권의 대통령들이 사적인 비리로 얼룩져 있고, 검찰도 그 정권들에 의해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존경해 마지않는 김대중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철통같이 믿으시나 보지요. 전 아닙니다.

어제 문화방송 백분토론에서 홍준표 의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수사에 대한 외압을 뿌리치면 구체적으로 어떤 불이익을 당합니까.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상관한테 볶인다. 시골로 발령날지도 모른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 그런 것이었습니다. 딱하지 않습니까? 홍준표 의원이 그러시더군요. 시골 지청에 발령난다고 해서 검사가 서기 되느냐고. 그렇습니다. 검사는 어디 가도 검사입니다. 그런 정도의 불이익이 두려워 소신을 접고 외압에 굴복하는 검사들이라면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어도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너무 가혹한 요구입니까? 그 정도의 배짱과 도전 정신과 고집이 없다면 검사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니면 정치적 독립에 대한 요구를 접어야죠.

제가 노무현 대통령을 철통같이 믿느냐구요? 아닙니다. 저도 철통같이 믿지는 않습니다. 그 역시 완벽한 인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정치인입니다. 저는 검사가 정치인보다 높은 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검사나 정치인이나 비슷비슷하다고 봅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검사 스스로 지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검찰총장이 민주당 사무총장과 경제부총리 등에게 에스케이(SK) 사건 수사 속도조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평검사에게 옮길 정도라면 그런 검찰은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합니다. 젊은 검사들이 피의자의 변호인이 은근슬쩍 '협박'한 것을 두고 '다친다'는 외압이 들어왔다고 공개적인 엄살을 떨 정도로 나약하다면 이 나라 검찰에 밝은 미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홍길동 검사님께 권합니다. 부당한 압력은 무시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지위를 위협하면 투쟁하십시오. 국민들이 지켜줄 것입니다. 그걸 믿지 못하십니까?

편지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대한민국 검사 모두에게 권합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하십시오. 검찰 내부 식구들끼리만 모여서 욕하고 한탄하지 말고 일반 국민들과 대화하십시오. 여러분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억울함 가운데 어떤 부분이 정당한 것인지 국민들 속에서 검증해 보십시오. 마구잡이 쓴 소리를 내뱉는 비판자들을 검찰청사로 모셔서 토론해 보십시오. 그럴 시간조차 없다면 업무를 줄일 방안을 강구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실수를 하더라도 언제나 대화하고 호흡을 나누면 국민이 안아줄 것입니다.

또다른 어느 지방 검찰청의 초임 검사가 보내주신 편지의 한 토막을 소개하는 것으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초임검사의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줌으로써 저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 고마운 편지입니다. 혹시 검사가 되면 부귀영화라도 누리게 되나 기대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인생설계를 재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검사가 되지 않은 것이 정말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다 듭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진지하고 당당하게 삽시다. 제각기.

아무리 밤을 새고 열심히 일을 해도 할 여력이 없습니다. 계장 1명, 여직원 1명 데리고 한 달에 300여건씩 떠넘기는 경찰송치사건 처리하는 것만도 벅찹니다. 검사가 아무리 노력하면 뭘 합니까. 수사관 1명이 수사할 수 있는 사건이 한 달이면 몇 건이나 되겠습니까. 어떤 사건은 하루 종일 조사해도 조사가 끝나지 않습니다. 구속사건은 마구 배당됩니다.
구속시한 내 조사를 마쳐야 되니 얼른 조사해야죠. 조사를 하다 보면 그 내면에 엄청난 비리의 냄새가 도사리고 있는 걸 봅니다. 하지만 열흘, 이십 일에 이걸 조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참고인은 조사를 거부하고 피의자성 참고인도 절대 나오질 않습니다. 일단 구속피의자만 기소해야죠. 엄청난 비리는 시간을 갖고 조사하리라, 수사기록을 복사해둡니다. 몇 번씩 소환을 해 봅니다. 역시 안 나오고, 또 다시 경찰송치사건이 밀려옵니다. 복사해 둔 수사기록은 또다시 캐비넷 한 편에 처박히게 됩니다. 이런 사건을 포기하지 않는 검사님들이 명검사님임에도 저는 능력이 부족하군요.  


* 본문은 개혁국민정당 고양시 덕양구(갑) 위원장 유시민씨 홈페이지 http://www.usimin.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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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3/17 [23: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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