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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총선과 4·19 44주년, '여전히 혁명중인가?'
잊혀지는 4·19 되돌아 본 4·19정신, 정치인은 국민의 매서운 눈 의식해야
 
홍성관   기사입력  2004/04/19 [11:18]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4.19 당시 모습  
4월 19일이다. 간만에 내리는 보슬비로 인해 도시 전체가 차분해진 느낌마저 든다. 그 때문인지 4월 혁명에 대한 사람들의 되새김도 여느 해보다 조용한 것 같다. 19일로 편성된 각 방송사의 방송 중에 4·19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고, 거의 모든 신문에서도 4·19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연례행사처럼 치러왔기 때문일까. 4월 19일을 떳떳하게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말이다.

이 맘 때면 대학 안에서 교양학습을 한다, 4·19 뜀박질을 한다 바빴었는데, 학생운동이 날로 쇠퇴하면서 이런 풍경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4·19가 나오긴 해도 이 나라의 비뚤어진 입시교육 때문에 현대사는 통상 건너뛰기 일쑤기 때문에, 대학생들도 4·19의 전모나 의의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을텐데 안타깝다. 그런 까닭에 4·19를 모르거나 잊고 계신 분들을 위해 짧게 정리해본다.

1960년 봄. 온 국민들의 눈과 귀는 5월로 예정된 제4대 대통령·부통령 선거에 모아져 있었다.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2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연임한 이승만이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등 거듭된 실정과 독재로 민심은 오래전에 이승만과 자유당을 떠나 있었다. '못 살겠으니 갈아보자'는 야당의 선거 구호가 이런 국민들의 속마음을 잘 대변한다.

5월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자유당의 부정은 극에 달했다. 59년 3월, 선거를 앞두고 새로 임명된 최인규 내무장관은 취임사를 통해 "공무원과 공무원 가족은 대통령과 정부의 업적을 국민에게 선전해야 하며 이 같은 일이 싫은 공무원은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공무원을 공공연하게 선거에 동원하기도 했다.

한편 자유당은 야당인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신병치료차 미국에 간 틈을 타 5월로 예정되어 있던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하겠다고 공고한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병옥이 강력히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이 와중에 조병옥마저 2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이승만의 당선은 더욱 유력해진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관심은 부통령 선거로 모아졌다.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부정선거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무더기 투표, 사전 투표 등으로 자유당 표가 전체 유권자 수보다 더 많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선관위는 당황하며 개표를 중단했고, 이승만과 이기붕에 대한 지지율을 낮춰서 발표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3·15선거가 부정과 폭력으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많은 국민이 분노에 떨었다. 그 가운데 마산의 시민·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이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격분한 시민·학생들은 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 이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시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4월 11일 행방불명됐던 열여섯 살의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주검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 바다에 떠오르면서, 마침내 온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4월 혁명의 불씨가 당겨진 것이다.

김주열의 시체 인양으로 마산에서 4월 11일 두 번째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데모를 한 후 귀교 길에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반공청년단의 습격을 받아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자유당 정부의 무모한 행위는 오히려 의분에 찬 학생들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4.19 당시 모습    
그리고 4·19일 화요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10만에 달하는 학생들은 완전 무장을 한 경찰이 저지선을 펴고 있는 중앙청으로 돌진하였다. 그러자 경찰이 학생 시위대에 총을 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총을 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더욱 분노한 학생들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총을 쏘는 경찰에 맞서 싸웠다. 이날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전국적으로 무려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다.

정부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서울 등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승만대통령은 4월 21일 내각 교체, 22일 자신의 자유당 총재직 사퇴, 이기붕의 모든 공직 사퇴 등으로 국민들의 반발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학생들의 시위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선전하여 시위의 확산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시위는 날로 늘어났고, 4월 25일엔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4백여 명이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 행진을 하기에 이르렀다. 시민들의 궐기는 더욱 거세졌고, 다음날인 26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 하야를 앞당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6일의 시위에는 국민학교 학생들이 '언니 오빠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고 쓰인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결국 이승만은 이날 오전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의 설득으로 하야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한 달이 지난 5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는 '4·19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서울특별시 남자 중·고등학교 대표 김석준'은 추도사를 통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을 이렇게 밝혔다.

<이제 원한도 슬픔도 다 가고 시간은 역사의 단계를 밟아갑니다. 고귀한 피로 말미암아 잃었던 국민 주권도 도로 찾고야 말았으니, 얼마나 장절, 쾌절한 역사의 행진입니까? 민주주의의 새벽은 도래하였습니다. 이 땅에 비로소 희망과 건설이 태양이 자애로운 미소를 던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악몽에서 깨어나 제 2공화국의 위대한 탄생이 힘차게 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열의 영전에 굳게 맹세합니다. 선열의 뿌린 씨에서 돋는 새싹을 수호하고 육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새싹이 자라나서 꽃이 필 날을 믿고 열매가 맺어질 날을 믿으며 그날을 위하여 선열들이 남긴 뜻을 이어서 투쟁하겠습니다. 조국의 앞날에 어떠한 폭풍이 오고 암야가 뒤덮더라도 선열들이 남긴 뜻을 계승하여 삼천리강토에 세계만방에서 제일가는 민주 낙원을 건설하고야 말 것을 맹세하면서, 여기 모든 학우들이 깊이 영전에 고개 숙이고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며, 아울러 무궁한 명복을 누리시기를 비옵니다.>

4월 혁명은 80년 광주, 87년 6월 항쟁, 2002년 촛불시위로 이어지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킨 모태로 역사에 기억된다.

일전에 한 지인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여전히 혁명중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일이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정의보다 불의가 앞서고, 민주보다 비민주가 팽배한 요소들이 많지 않은가. 분단이라는 구조 역시 우리의 갈 길이 멀었음을 방증한다.

이라크 전쟁이 악화일로에 치닫고 있음에도 정부는 6월 파병을 확언하고 있으며, 재계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고 있어도 서민들은 어려운 살림에 허덕이고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통일에 대한 열망을 실현할 길이 열렸음에도, 정치인들은 정략적으로만 이용할 뿐, 남북관계 개선은 여전히 요원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총선이 끝났다. 정치적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가 되었다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나라당이 국민들로부터 절반의 용서를 받았다고 호언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반세기만에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이루었다고 자축하고 있다.

말잔치는 끝났다. 이제 흥분들을 가라앉히고, 민생을 돌아보길 바란다. 한반도가 처한 현실에 눈 돌려주기를 바란다. 벌써부터 국민들의 선택을 또 다시 배반하려는 흑심을 품은 국회의원이 있다면, 4월 혁명의 의미를 재차 새겨보기 바란다. 이제 국민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국민들의 예리한 눈이 당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혁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 4·19에 대한 자료는 박건호 님의 역사사랑(http://guno.pe.kr)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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