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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시대, 문인이 괴로운 시대여
되돌아온 문인 박해의 시대; 남정현, 신동문, 현기영, 안도현들
 
정문순   기사입력  2013/11/12 [17:17]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주말마다 틀어주던 외화의 단골 번역자로 등장한 이름은 신순남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녀는 생업에 전념하지 못하는 남편 몫을 오래도록 감당해야 했는데, 그 ‘잘난’ 남편은 소설 ‘분지(糞地)’로 문학사에 남은 작가 남정현이다.

똥처럼 더러운 땅이란 제목은 소설이 나온 1960년대 한국을 가리킨 것이다. 홍길동의 후손이라는 홍만수가, 어머니는 미군에게 강간 당한 후 정신이상으로 죽고 누이동생은 미군 장교에게 예속된 삶을 살자 그 미군 장교 아내에게 어머니가 당한 대로 앙갚음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미군 범죄가 만연했고 기지촌의 한국 여성 인권 문제도 심각하던 시대였지만,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권 시대에 ‘반미’를 퍼뜨린 작가는 무사할 수 없었다. 소설이 조선노동당 기관지에 실린 것을 꼬투리 삼은 정권은 작가에게 반공법 위반 혐의를 걸어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촉망받던 젊은 작가에게 가한 권력의 매질은 그의 몸뿐 아니라 작가 생활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시인 신동문도 포악한 권력에 희생 당한 경우다. 긴급조치가 남발되던 시절, 창작과비평사 사장이던 시인은 리영희 선생이 쓴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는 논문을 게재한 일로 남산에 붙들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때 당한 고초는 탁월한 감수성으로 빛나던 시인의 앞날을 가로막았다. 서릿발 같은 권력과 고문 기구 앞에서 초라해져야 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시인은 스스로에게 절필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에 비하면, 4.3 항쟁의 비극을 최초로 제기한 소설 ‘순이 삼촌’을 썼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 고문대에 매달렸던 현기영은, 다행히 작품 활동이 왕성한 문단의 원로로 성장한 경우다. 그런 그도 인간이기를 거부당하고 짐승처럼 취급받았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밝고 정직한 눈으로 시대의 감수성에 황홀한 빛을 던졌으나 정작 자신들은 권력이 가한 모진 고초를 벗어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세상은 크게 빚져 왔다. 이 작가들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은 권력이 문학을 간섭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를 잡아다 매질하는 것을 취미로 즐겼던 독재자의 딸이 집권한 시대에 작가 탄압이라는 구시대의 망령이 슬슬 기어 나오는 조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최근 시인 안도현은 불의가 판치는 시대에는 시를 한 편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절필 선언을 할 무렵 안 시인은,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의 도난 당한 유묵의 마지막 소장자가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라는 의혹을 대선 직전 트위터에서 제기한 일로, 검찰에 의해 허위사실 유포 혐의 등으로 기소된 상태였다. 최근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안 시인의 혐의에 대해 전원 무죄 평결이 나왔지만,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선고를 연기하더니 일부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는 그동안 모범생 같은 시를 즐겨 쓰고 조선일보와 친한 것 같은 안도현 시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 일로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작고한 문인 중 황순원이 반독재 활동을 벌인 경력이 없음에도 학처럼 고고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이유는 우리말로 글을 쓸 수 없었던 일제 말기에 스스로 붓을 꺾었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황순원은 미래가 유망한 젊은 작가였고, 주변에는 자발적인 친일에 앞다투는 문인들로 들끓었다. 작가의 절필은 밥줄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명줄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안도현 시인이 지금 시대의 시는 무력하다고 한탄했을 때, 시인은 무력한 시를 죽임으로써 문학을 다시 살려 권력이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소설가 공지영은 1980년대에는 한강이 아름답다고 말해도 죄스러웠던 시대라고 했는데, 과장되기는 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표현은 아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시대,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치하에서나 있을 것 같은 작가의 절필이 케케묵은 옛날 일이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시대, 자신을 죽임으로써 시대의 어둠과 싸우는 문인을 배출하는 시대가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다.      

* 12월 5일 경남도민일보 게재 칼럼을 손본 글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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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1/12 [17: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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