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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N'Roll Diary] '아시아나'의 잊혀진 전설, 재생되다
 
김수민   기사입력  2002/06/01 [14:19]
- 터지는 감탄, 세속적인 질문 -


{IMAGE2_LEFT}‘시나위의 1집’을 구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전축에 LP를 올려놓았던 고2 시절 어느 날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얼마 후, 시나위의 1집이 재발매 되었고 온라인상에서는 mp3도 나돌았다. 듣고 싶은 음반을 구하지 못해 애 닳아 할 일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어렵게 찾아 구하면서 느끼는 기쁨도 맛보기 힘든, 그런 나날이 왔다. 이미 온라인상에 파다하게 퍼진 ‘아시아나 1집’ 역시 재발매되었다. ‘아마게돈’, ‘스트레인저’ 등의 음반과 함께 출시된 것이지만 나나 다른 락팬들은 아시아나에 이목을 집중할 수밖에. 아시아나를 빈틈 없이 표현해 줄 수 없는 말이 ‘드림 팀’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아시아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음반. 'Out on the Street'

백두산, 시나위, 부활이 트로이카의 축으로 지목되던 80년대 말은 헤비메틀이 중흥하던 시기였다. 메틀의 열기로 넘쳐나던 이 무렵, 뮤지션들과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많은 프로젝트들도 탄생했다. 다소 무명인 그룹들이 모여 만든(후에 K2에서 활동하는 김성면도 여기에 ‘Iron Rose'라는 팀의 리드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Friday After Noon'도 있었고, 조금 더 중량감 있는 락커들이 모여 ‘Rock In Korea'를 벌이기도 했다. ‘Rock In Korea'에서 바로 아시아나의 멤버가 될 김도균과 임재범이 교우했다.

기타리스트 김도균에 관해서는 몇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이를테면 산에 올라가 몇 달동안 피크 한통을 다 소비해가며 연습했다는 일화 같은 것이다. 천부성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노력했던 탓인지 김도균은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신대철, 김태원, 이근형 등이 자웅을 겨루던 그 당시의 락 필드는 마치 무협지를 보는 것 같았는데, 김도균은 ‘백두산’ 문파의 기타를 맡은 고수로서, 쉽게 뒤지지 않는 초절정의 초식과 내공을 선보였었다.

보컬 쪽도 경쟁이 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나위 출신만 해도 임재범, 김종서, 김성헌 등이 치열한 각축을 벌였고 백두산의 유현상과 부활의 이승철 등도 만만치 않았다. 이 일군의 노래꾼 가운데 반박자쯤 앞서 나간다고 평가되는 사람이 임재범이었다. 고교 때까지 혼자 보컬 트레이닝을 했으며 처음으로 가입한 밴드가 시나위였던 그. 그 임재범이 김도균과 만났었다.

아시아나는 영국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새로 멤버를 받으면서 ‘아시아나’로 거듭난다. 김영진(b), 유상원(Ds)이 새로운 멤버였다. 유상원이 연령은 좀 높지만 비교적 무명이었던 데 비해, 김영진 같은 경우 시나위 3집에서 활약했으며, 김도균이나 임재범에게 풀이 꺾이지 않을 만큼 베이스계에서 출중한 기량을 인정받고 있던 연주자였다. 이로써 아시아나는 슈퍼 프로젝트 그룹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이내 국내 락팬들의 시선을 모은다. 멤버들의 실력과 명성에다가, 앞서 존재했던 ‘카리스마(이근형, 김종서, 김영진, 김민기)’라던가, 일본 출신으로 미국 진출에 성공했던 'Loudness'와의 견줌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국내 메틀음반 최초로 작업이 영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있었으니까.

아시아나 멤버들의 사진. 왼쪽부터 임재범(v), 유상원(Ds), 김영진(b), 김도균(g)


아시아나의 ‘Out on the Street'의 녹음 결과는 ‘보컬에 한해서만’ 듣는이를 고무시켰다. ‘한국의 로니 제임스 디오’로 불리우던 임재범의 보컬은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락 보컬은 고음 위주다’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탄성을 지르게 하는 흉성 위주의 중음, 취향에 따라 찬반이 갈리겠지만 ‘이게 육성이 아닌가’ 싶기까지 한 고음역에서의 반가성 등등. 영국 현지의 레코딩은 임재범의 보컬을 잘 잡아내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김도균의 호쾌한 플레이는 졸지에 날이 무딘 칼처럼 되어 음반에 담아졌고, 그만큼 녹음상태는 기대를 걸었던 팬들을 맥 빠지게 할만했다.

분명 개개의 악곡은 뛰어난 것이었다. 특히 블루스 필이 물씬 풍겼던 'Tom Kat', 그간 메틀음악 인생의 실력이 축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Out on the Street', 국악과의 접목을 시도했던 김도균의 노력이 엿보인 'Asiana', 가슴에 처절함을 선사하는 'Dancing All Alone'은 물 건너 어떤 뛰어난 밴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역작이었다.

한국 메틀은 90년대에 초반에 들어서며 스스로 요절을 선언한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메틀 그룹의 해체, 두 번째는 메틀 키드들의 외도. 아시아나는 이렇다할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흩어지게 되고 머지않아 시나위, 부활, 백두산 역시 해산을 선언한다. 90년대 초에 락필드에서 활약했던 그룹은, 메틀 키드였던 김준원, 강기영, 박현준, 김민기가 모여 만든 ‘모던한 락그룹’ ‘H2O'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로 나타났고, 김종서와 임재범은 발라드로, 유현상은 트로트로 업종을 변경했다.

지금은, 락 매거진이 하드락/헤비메틀보다는 하드코어/핌프락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그 경향은 웬만한 아마추어의 공연에도 나타나고 있는 2000년대 초다. 하지만 요즘에도 가끔 의지를 불태우며 옛 영광을 되살리려는 메틀 그룹이 얼굴을 내밀고, 아마추어 공연에서도 ‘추억의 곡들’이라는 듯 7, 80년대의 곡이 나오긴 한다. 그럼 이때 가지곤 하는 감정이 아시아나를 들으며 느끼는 허전함과 같은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아시아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10년도 더 지난 현재에, 당대의 락팬이 아니었던 나에게도 그들의 실패가 가슴 아프다. 실력은 실력이고 걸작은 걸작이니 누구도 이를 훼손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속적인 질문은 남는다.

저주받은 이 작품을, 누가 얼마나 기억해주고 인정해 줄까.

* 필자는 연세대 [조선바보] 편집주간, 노사모, 노벗 회원인 동시에 이문옥팬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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