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의원이 민주노동당 새 대표로 선출되자, 어떤 신문은 “붉은 장미꽃이 피었다”고 썼다. 붉은 장미가 서구권에서 진보의 상징인데다 당사자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는 설명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대표가 남자이고 제일 좋아하는 꽃이 장미라고 했다면 똑같은 제목은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년 전 진보와 어울릴 수 없는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대표로 뽑혔을 당시도 언론들은 꽃 이름을 거듭 불러냈다. 여성 정치인을 향기로운 꽃에 비유하는 사람의 인식에는, 남성 정치인들이 장악한 악취 나는 정치에 대한 실망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연약한 꽃과 결부시키는 건 여성을 낮추어 보는 익숙한 관습을 이탈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정희 대표는 “부드럽고 명쾌한 진보”를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명쾌하다’라는 수사는 ‘부드럽다’는 표현이 줄 수 있는 유약한 인상을 중화하려고 쓴 것일 뿐, 이 대표의 말에서 방점은 ‘부드럽다’에 찍힌다. 이 대표는 부드러운 진보가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 적이 없다. 그가 싸워야 할 부드럽지 않은 진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수정당 못지않게 경직되고 투박한 진보 정당의 조직 문화인가? 아니면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정당이 그간의 정책과 대여 활동에서 부드럽지 않음을 보였다는 의미인가? 이 대표가 남들 앞에서 집안 내부를 들추어 욕할 리는 없을 테고, 아니면 민노당이 걸어온 노선을 반성적으로 거론한 거라면 이 대표 자신은 진보 정치의 부드럽지 않은 뻣뻣함의 측면을 비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이 대표가 아무런 맥락 없이 ‘부드러움’을 거론한 이상, 부드럽지 않은 것에는 국회 점거 농성, 노상 단식 등 이 의원과 그녀가 몸 담은 민노당이 도맡아 했던 타협 없고 격렬한 이력도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한나라당이야말로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지도, 국회를 농성장으로 삼아 점거한 적도 없으니 가장 부드러운 정당이라도 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이정희 대표가 강조하는 ‘부드러움’은 남성 정치인이나 정치 문화에 대비되는 자신의 여성성을 의식한 발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 대표에게는 남성 정치인들이 타협과 소통을 중시하기보다 상대방에게 시비 걸고 싸우는 데 치우쳤다는 인식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대표가 별다른 설명 없이 ‘부드러움’에 집착하는 것은, 꽃을 여성에 빗대는 것만큼이나 구태의연한 태도일 수 있다는 의심이 가로막는다. 부드러움이 굳이 여성의 전매특허일 필요는 없으며, 부드러움을 쉽게 수용하기 이전에 싸워야 할 것이 여전히 많다는 의견이 있다면 이 대표는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는가?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이 대표의 발언은, 남성 지배문화가 여성에게 바라는 것과도 일치한다. 여성이 싸우기를 바라지 않는 남성은 여성을 딱히 배려하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어쩌면 싸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남자들만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여성 정치인이 유순하거나 부드럽지 않은 태도를 대중 앞에 드러낸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 빨간 바지를 입거나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등장하거나, 남자 국회의원들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단상에 섰다고 하여 남자 정치인이나 남자 기자들로부터 재임 내내 비아냥거림을 당한 여성 장관도 있었다.
반면 치마 정장 차림에다 치아를 보이지 않게 웃을 줄 아는 박근혜 의원은 남자들이 호감을 느낄 만한 표면적 태도를 취한 덕분에 덕을 본 경우이다. 사학재단 이사장이기도 한 그녀는 사학재단의 독점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고, 사립학교법이 개정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어깃장을 놓기도 했지만, 그녀를 과격하고 비타협적인 정치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용이야 어떠하든 속마음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표정과 느리고 낮은 발성으로 포장된 조신한 이미지 덕분이었다.
한국 정치는 여성 정치인에게 투사나 협객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목소리 크고 자기 주장이 거센 것도 질색이다. ‘여성다운’ 이미지의 정치인은 늘 점수를 땄고 승승장구했지만 그 반대 편에 선 경우는 손해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당대 정치 무대에서 대척에 선 이미지로 상반된 평가와 대우를 받는 경우라면 나경원과 전여옥 의원일 것이다.
최근에는 약발이 급격히 떨어졌지만, 과거 조선일보 칼럼니스트에서 한나라당 대변인을 맡던 시절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독설로 쉬지 않고 구설에 올랐던 전여옥 의원은, 대중에게 거의 유일하게 전형적인 악녀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는 여성 정치인이다. 그녀가 자신의 발언 내용 때문에 악녀라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면, 당 대변인을 지내며 전 의원 못지않은 거친 입의 소유자임을 널리 과시한 나경원 의원도 똑같은 대우와 평가를 받아야 합당할 것이다.
두 사람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똑같이 몰상식하고 수준 이하의 내용을 담은 발언을 하더라도, 일부러 거세고 격렬한 어휘만 골라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치중한 사람은 자신의 발언 태도만큼이나 거센 반발을 부른 반면, 한 사람은 표정과 말이 따로 놀 정도로 무표정하고 냉정한 외양으로 (남자들로부터) 점수를 땄다. 한창 연쇄살인범 검거로 세상이 흉흉하던 무렵 야당 의원들을 싸잡아 살인범처럼 사이코 패스 같은 정치인들이라고 공격한 사람과, 그 유명한 BBK 동영상과 관련한 “주어가 없다.” 발언의 주인공 중 누가 진정 막장 발언의 고수인지 가늠할 수 있을까?
오히려 막후에서 한나라당의 미디어 법 개악을 조종한 장본인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 받는 나 의원에 비하면 전 의원은 현재로서는 정치 무대에서 영향력도 실권도 거의 없는 편이다. 비유하자면 한 사람은 일부러 없는 적이라도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나기라도 한 듯 창끝을 벼려서 상대를 겨누는 반면, 나머지 한 사람은 입 속에 칼을 숨기는 교묘한 태도로서 오히려 자신이 야기한 논란의 피해자를 자처했다. 나 의원은 ‘100분 토론’에 나왔을 때 상대 패널에게 말이 가로채이자 상대방을 반박하기보다 사회자를 향해 ‘억울한’ 처지를 불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 의원이 서울시장 경선 후보에다 한나라당 최고의원으로 뽑힐 만치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은 ‘우는 여자’의 이미지를 차용한 데 전적으로 기인할 것이다. 야당 대변인 시절 아무리 독설을 퍼부어도 미워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지난 정부의 어느 집권당 의원이 한 말처럼 그녀는 조신하고 우아한 ‘여성적인’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능했다.
그러나 여성답다고 평가받는 여성이 마냥 환호를 받을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에게 보내는 호의적 평가일망정 이중성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평택 미군기지 이전과 관련하여 시민들의 항쟁에 직면한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가 대국민담화에서 점잖은 태도에 강경한 발언을 담자, <한겨레21>은 “아름답지만 교묘했다”고 표현했다.
당시 한 총리가 남자였다면 이 기사는 여성에 대한 호의적 평가인 ‘아름답다’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대로라면 여성 총리는 여성의 미덕으로 치부되는 ‘아름다움’을 무기로 내세워 뒤에서 나쁜 일을 한 사람이 돼버렸다. 기사가 발언 당사자에 대해 가면을 쓴 이중인격자인 양 묘사하는 데 여성성을 끌어왔으니, 기사는 여성에 대한 호감을 이용하여 여성을 도로 공격한 것이 된다.
세상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성적 자질이 되레 여성을 흠집 내기 위해 동원되는 것은, 교묘하게 성차별적이라는 점에서 드러내놓고 여성을 공격하는 것 이상의 폭력적인 태도이다. 여성적 미덕이니 자질이니 운운하는 표현들은 언제든 추켜올려진 여성을 향하는 칼이 되기 쉬우니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남성이 독점한 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여성적’ 이미지로 점수를 따고 있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본색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일 것이다. 이들이 세상이 보내는 호감과 성원에 만족하거나 그것에 부응하는 한 숨어 있는 비수의 희생자가 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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