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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성범죄자 옹호에 두 번 울다
[정문순 칼럼] 성범죄 관련 민사에 법원 조정제도 적용은 온당치 못해
 
정문순   기사입력  2010/05/16 [13:24]
내 아이는 ‘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법 위반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형사재판이 끝난 뒤 창원지방법원에서 가해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얼마 전, 조정 결정이 났으니 아이의 법정대리인 자격으로 법원에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법원의 조정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했더니 일단은 출석해야 한단다.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는데, 다른 일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해놓지 않았다. 재판부가 임명한 조정위원들이 속을 긁어놓을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얼굴을 비치지 않는 피고를 기다리는 중에 연로한 조정위원 이씨가 형사재판 기록을 더듬어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술이 문제군. 술을 안 먹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피고가 음주 상태에서 아이를 강제추행한 사건의 전말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관심사가 중재인지 술인지 모를 정도로 조정위원이라는 자는 당시 피고가 얼마나 취한 상태였는지 내게 거듭 캐물었다. 술과 결부시키지 말라고 반박하는 내게, 피고가 술에 취한 사실은 맞지 않느냐고 했다. 재판을 피하고 있는 피고가 만약 자리에 나왔다면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대우는 사실 처음이 아니다. 지난 해 형사재판 판사도 죄 없는 술에다 죄를 떠넘기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어떤 사고방식의 소유자인지 궁금증을 일으키는 그 판사는, 경찰 조사에서 아이가 한 진술에는 눈을 감은 채 피고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만취 상태를 참작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무슨 이득을 보자고 민사소송을 걸었을까. 민사재판에서마저 피고가 두둔 받는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절대로 법원을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 아이는 형사재판에서 민사재판에 이르기까지 줄곧 국가기관에 의해 2차피해를 당해온 셈이다. 성범죄의 원인을 애꿎은 술에 돌려야 할 만큼 남성 성범죄를 옹호하기 바쁘신 국가 기관의 본색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바보였다.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설마 민사 재판부에서 딴 소리가 나올까 생각했다.  

어린 아이에게 성범죄 피해의 책임은 못 돌리겠고 국가가 기껏 구실을 찾은 게 술이다. 방어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성범죄에 대해서도 엉뚱한 변명거리를 찾는 나라라면, 성인 여성이 피해자일 경우 음주를 핑계 삼을 것도 없이 피해 여성에게 고스란히 피해의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법원에 문제의 조정위원에 대한 자질을 거론하며 위촉 해제를 요청했더니, 해촉 요구는 과하며 당분간 업무를 맡기지 않겠다는 답변이 왔다. 그러나 법원은 조정위원 이씨가 음주에 피고의 죄를 떠넘기는 일은 없었다고 했다. 10년 넘게 조정위원직을 맡아온 베테랑인데 일에 치여 긴장을 잃어서 실수한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의 근본적인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이 문제라는 인식은, 형사재판부가 피고를 편들던 것과 같은 논리다. 법원의 뜨뜻미지근한 답변은 예상 못한 바가 아니었다. 음주 발언이 문제가 안된다면 근신은 왜 시키는가. 조정위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법원의 판단이 맞다면, 술이 유죄라고 한 조정위원의 말을 들었던 내 귀가 엉터리인 모양이다.  

조정위원의 무책임한 태도가 눈물을 닦아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두 번 울리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문제의 근원을 따져보면 법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조정제도가 당사자간의 원만한 합의나 화해를 위한 것일진대 성범죄 관련 민사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법원이 성범죄 피해를 ‘합의’와 ‘화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으니 조정위원 입에서 가해자 피고를 두둔하는 발언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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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5/16 [13: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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