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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제사 거부로 더불어 행복한 사회 만들래요”
[사람] 호주제 폐지이어 제사거부 운동나선 고은광순 종추련 대표
 
지강유철   기사입력  2009/12/31 [17:26]
여성 작가 이하천이 『나는 제사가 싫다』는 책을 내면서 조상을 핑계로 여성을 억압해온 제사 제도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은 지난 2000년이었다. 논쟁이 뒤따랐던 것은 사실이나 호주제라는 하드웨어를 돌리는 소프트웨어로서의 제사를 무력화시키기엔 다소 역부족이었다는 느낌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는 동안 호주제가 폐지되는 감격이 있기는 했으나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 여성 차별의 체감온도는 호주제 이전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09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134국 가운데 115위다. 이명박 정부 들어 양성평등 순위는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을 뿐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추락하는 형국이다.
 
노무현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위기의식을 느낀 여성계가 2010년을 맞아 하나로 결집하고 있는 이때에 본지를 통하여 호주제 폐지 운동을 우리 사회에 첫 제안했던 고은광순 종교법인제정추진시민연대 대표가 새로운 운동의 깃발을 들고 ‘현장’으로 돌아왔다. 2010년의 벽두에 고은광순 선생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운동의 화두는 “내 제사 거부 운동”이다. 이 인터뷰는 지난 12월 5월 고은광순 선생이 원장으로 있는 우면동의 홍명한의원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여성차별 115위의 나라 대한민국

지강유철 - 1998년에 본지를 통해 최초로 호주제 폐지를 공식 제안하셨습니다. 된다는 확신이 있었나요?

고은광순 - 꼭 되어야 한다는 희망으로 시작했지요. 미국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면서 후진국에서 아들과 딸을 키우는 차이점을 요약해 놓은 글을 읽었어요. ‘하이프로텐’, 즉 고단백 음식을 아들에게 주는 것이 제3세계의 특징이더군요. 병원도, 교육도 아들에게만 혜택을 주고요. PC통신을 하던 시절, 하이텔동호회에서 신정모라라는 굉장히 똘똘한 여자가 남자들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공격당하는 걸 봤어요. 도대체 한국 남자들이 왜 이런가 싶었어요. 똑똑한 여자 꼴을 못 보는 거예요. 그중에 굉장히 젠틀한 남자가 보였어요. 알아 본 결과 그 사람은 UFO를 믿는 라엘리언이었어요. 이단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않은 한 한국 남자들은 모두 여자에 대한 차별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 고은광순 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 대표     ©<인물과사상> 권영탕
그 무렵 『여성신문』 한 귀퉁이에서 김주수 교수가 쓴 작은 칼럼을 읽었어요. 호주제를 폐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법학자의 한숨이었어요. 그 칼럼을 읽으니 말도 안 되는 한국 남성들의 여성 차별의식이 시스템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호주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여성단체연합에 토론회를 제안했어요. 남녀 차별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주제로 말이에요. 1990년대 말 당시의 남녀 출산성비는 116대 100, 특히 1994년 영남지방의 셋째아이 출산성비는 300대 100이었어요. 이 정도면 셋째 딸은 골라서 다 죽인 거예요. 토론회를 계기로 양성평등을 위한 해결과제 중 호주제 폐지를 일순위로 넣었어요. 호주제 폐지는 넷째 딸로 자라며 여남 차별로 분노와 슬픔을 가졌던 제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지강유철 - 최근 ‘내 제사 거부 운동’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고은광순 - ‘호주제’가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제사’는 소프트웨어의 핵심이에요. 최근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양성평등지수를 관찰했더니 134개국 중 한국은 115위였어요. 그동안 굉장히 많은 여성운동이 일어났는데 아직도 115위니 한국 사회가 여성의 잠재능력을 인정도, 이용하지도 않는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권력 찬탈 세탁용으로 시작된 조상제사

지강유철 - 양성평등지수를 표기할 때 왜 여성을 100으로 표기하나요?(웃음)

고은광순 - 여성은 재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준점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100이라고 표기합니다. 앞자리 숫자는 남자고요. 결혼 적령기의 남성은 26∼30세, 여자는 22∼26세로 보잖아요. 출생 당시의 성비를 놓고 볼 때 2010년이 되면 남자 129명에 여자가 100명밖에 안 되니 남자 네 명 중 한 명은 장가를 못 간다는 얘깁니다. 2010년에 남녀의 성비가 129대 100이 된다는 의미는 여자아이들을 많이 골라 죽인다는 뜻이에요. 역으로 계산해보면, 1980년대 중반부터 1년에 3∼4만 명을 죽인 거예요. 『한겨레』에 실린 2001년도 어느 학교의 입학생 남녀 학생 성비는 132대 83이에요.(사진 속의 남자 줄보다 현저히 짧은 여학생들의 줄을 가리키며) 여기에 있어야 할 아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지강유철 - 제사가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고은광순 - 제례(祭禮)란 아들을 통해서 호주를 승계하고, 가문의 대를 잇겠다는 발상입니다. 그건 남자만 씨가 있다는 무식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 무식한 거짓말이 권력을 가지니까 여자 아이들이 이렇게 죽어 나가고 있고, 결국 남자들도 결혼을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 겁니다. 여자아이를 골라서 낙태하는 게 제 눈엔 너무 이상했어요. 왜 태어나지 않은 여자아이들 때문에 제가 이렇게 괴로운지 모르겠어요. 누가 내 몸에 칩을 박아놨나 싶을 정도예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잘 때까지 호주제 폐지를 생각했던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영이 나로 하여금 숙제를 풀게 한 것 같아요.

제사의 연원을 따져보면 굉장히 교활해요. 갑골문 전문가인 김경일 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보면, 1899년에 황하유역에서 갑골문이 발견됐다고 해요. 김 교수의 책에서는 공자가 쓴 유교 역사가 다 거짓이라는 거예요. 기원전 1324년,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에 ‘조갑’이 부친의 명을 어기고 형 ‘조경’을 해치우고 왕권을 찬탈했어요.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조상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천신이나 황하 강을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조갑이 그것들을 다 없애고 조상제사만 허용한 거죠. 자기 조상제사를 지냄으로써 민망함을 없애고 차별화를 꾀했죠. 그 엄숙하고 까다로운 제사의식을 ‘유(儒)’라는 무당 집단에게 관장토록 했어요. 유림(儒林)은 왕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이용되었어요.
 
조갑이 조상 제사를 엄격하게 지낸 것은 전두환이 권력을 찬탈하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자기 권력이 올바르고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제사의 본래 의미는 더불어 행복하겠다는 뜻이 절대 아니에요. 나만 권력을 독점하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평민과 상민은 절대 제사를 지내거나 족보를 기록할 수가 없었어요. 만약에 제사를 지내면 끌려가서 곤장을 맞았지요. 그런 부자연스러운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려면 억지를 많이 써야 하는데 그 수단 중 하나가 제사와 족보였어요. 제사에는 그런 천박한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는 겁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조상제사는 양반의 전유물

지강유철 - 양반부터 상민까지 제사를 드린 것이 100여 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고은광순 - 우리나라에 김․이․박씨가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 성씨의 45%나 됩니다. 그중 김씨는 전 국민의 21%고요. 반면 일본은 성씨가 8만 개고, 중국도 1만 2000개가 넘어요. 김․이․박씨가 대한민국 성씨의 45%나 차지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백성의 40%는 성씨가 없었어요. 그러다 조선 중기에 주자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여자를 시집으로 들어가게 하는 친영제라는 개념이 도입되었어요. 예전엔 여자가 시집가지 않고 남자가 장가를 갔지요. 그래서 신사임당도 아이들을 여럿 낳고 시집에 들어갑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친가, 외가의 개념이 거의 없었고, 남자가 장가를 드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교가 뿌리를 내리면서부터 가부장적인 위계질서가 왕권을 강화하는 데 이용됩니다. 혼인을 하면 중국에서 도입한 친영제에 따라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라는 칙령이 여러 차례 내려져요. 그래서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결혼 문화로 정착된 겁니다.

제사가 일반화된 것은 일제 시대였어요. 인적 자원을 파악해야 수탈하기 좋으니까 일제는 성씨 없는 사람들이 성을 가지도록 만드는 걸 제일 먼저 했어요. 그 덕분에 때문에 평민과 상민도 호적을 가질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아했지요. 평민과 상민들이 앞다퉈 김씨, 박씨, 이씨가 된 겁니다. 그때부터 집집마다 조상제사를 지냈어요. 제사는 남성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연례행사입니다. 아직도 제례를 통해서 남성들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명절 때 보면 종교가 있건 없건 무조건 남자 집, 장남 집으로 모이잖아요. 만약에 큰며느리가 거부한다거나 싫다고 하면 도덕적․합법적으로 여성들을 공격할 수 있는 구실이 생기는 거죠.

지강유철 - 선생님이 전개하시려는 ‘내 제사 거부 운동’에 대한 여성계의 입장이 궁금합니다. 호주제 폐지 때도 처음엔 여성 단체들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이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만.

고은광순 - 제사 문제 역시 아직 많은 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사는 양성평등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굉장히 교묘한 문제입니다. 양성평등이 사회에 널리 확산돼 상식이 되고 하부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식의 역사 후퇴가 없어집니다. 진보적인 사람들 중에도 호주제까지는 괜찮지만 “제사를 문제 삼는 건 너무 나가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가족이 해체된다며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제사 때문에 가족관계가 파괴된다고 생각해요. 남녀노소가 종과 횡으로 소통하지 않고 모두가 죽은 자를 향해서 일렬로 뒤통수를 보며 서게 만드는 게 제사입니다. 제사는 죽은 사람이 중심이기 때문에 행복을 위한 소통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돼요. 조용하고 엄숙해야 하잖아요. 제례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거예요.

미국에 있어 보니 마르틴 루터 킹 목사를 추모하는 날이 휴일이었어요. 그런데 그날이 킹 목사님의 생일이더라고요. 이처럼 죽은 날에 집착할 게 아니라 그가 남겨준 과업으로 행복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생을 축하하면 좋겠어요. 죽은 자라도 생일을 기념하자는 거예요. 팔도 난봉꾼이었다는 우리 할아버지가 60여 년을 살았는데 그 이후 80년 이상 제사를 받고 계세요. 이건 우리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게으르게 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에요. 현재에 충실하면 살아 있음을 더 많이 축하하고 서로 격려하는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 남녀차별이든 여성이 느끼는 억압감이든 점차 사라지게 되겠지요. 그래야 남자도 행복해져요.

제사 거부, 내 권력 포기일 뿐 타인의 권력 침해 아냐

지강유철 - 제사의 기원과 본질을 정면으로 문제 삼은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유교에 동의하지 않고 매사에 실용의 정신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왜 유독 제사에 대해서만큼은 순한 양이 될까요?

고은광순 - 무식한 호주제가 깨졌기 때문에 호주제의 파트너로 존재했던 제사라는 소프트웨어도 깨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제사를 계속하면 그것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어요. 여자도 예외가 아니에요. 시어머니가 되면 명예남성의 권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며느리를 보면 권력을 갖게 되죠. 늘 서비스만 하다가 명예남성이 되면서는 제례와 명절을 통해 며느리를 휘어잡는 겁니다. 며느리는 사회활동에서는 마음껏 자기주장을 할 수 있지만 집안으로 들어가면 그게 절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사는 개인 차원을 떠나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내 제사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명예남성으로서 가질 권력을 스스로 내놓겠다는 거예요. 권력의 포기일 뿐 상대방의 권력을 침해하자는 게 아닙니다. 더불어 행복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화두를 던지는 거죠.

지강유철  - 어떻게 운동을 전개하시려는지요?

고은광순 - 제가 『딴지일보』에 추석에 벌어지는 불륜 시리즈를 몇 번 썼을 때 엄청난 비난과 환호가 있었어요. 많은 사람이 추석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고 말하기에 미국 성씨 문제에 대해 글을 또 썼어요. 미국 여자들이 결혼해서 남편 성씨를 따르는 것은 관습이지 법률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결혼하고도 성을 바꾸지 않는 여성이 많아졌고, 캐나다는 자기 성을 바꾸지 말라고 권장한다고 해요. 성씨는 부모의 유전자가 부단히 섞이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어요. 『딴지일보』 독자들에게서 성씨에 대한 강박에서 해방됐다는 글을 받았지요. 한 줄기 혈통이나 가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성씨에 대한 강박이 사라집니다.

중국 전족(纏足)의 예를 들어 보면, 중국 여자들이 1000년 넘게 발을 묶고 다녔잖아요. 전족은 당나라 때 시작된 풍습인데 중국이 1900년대 초기에 외래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사라졌어요. 여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발을 묶어둔 전족은 나쁜 겁니다. 가고 싶으면 가야지 왜 발을 묶느냐고요. 사실 전족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다고 해요. 여자의 발이 발달되지 않아 뒤뚱거리면서 걸으면 질의 구조가 성숙하지 못해 남자들의 성적 쾌감이 더 높아진다는 거예요. 이걸 모르고 발이 크면 결혼도 못하고,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고 부모들이 열 살이 되기 전에 딸의 발을 묶기 시작한 거예요. 깨어 있지 않으면 10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때까지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거예요.

지강유철 - 다음 카페(http://cafe.daum.net/nomyjesa)에 들어가 보니 제사 거부 운동 서명용지를 만드셨더군요.

고은광순 - 저도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서명을 받기 시작했어요. 1월 20일 쯤에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위한 여성모임’이 출범할 거예요. 여성 오피니언 리더들을 모아서 여러 가지 일을 할 겁니다. 결혼 문화와 제례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도 부단히 하려고 해요. 진화가 제일 안 되는 게 가족문화예요. 최근에 장례는 화장(火葬)이 많이 정착되었는데 결혼 문화는 거의 제자리걸음입니다.
 

중국서 없어진 제사, 우리나라만 지내

지강유철 - 어떤 분들이 참여하시나요?

고은광순 -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여성들이 거의 다 모였어요.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는 여성들이 좀 모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위기의식 같은 걸 느꼈던 거죠. 지난 10년 동안은 정부가 잘하리라 믿어왔고, 각각의 차원에서 일을 했는데 다시 뭉쳐야 한다는 절박함이 생겼습니다. 출산 파업을 주장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어요. 양극화 해소하지 않으면,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경쟁 교육 멈추지 않으면 “딸들아, 임신하지 마라!”라고 외치고 싶은 거죠.

지강유철 - 출산 파업이 점점 보수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면 좋겠네요. 중국에서는 제사가 흘러간 옛 노래가 된 것 같더군요.

고은광순 - 그렇습니다. 제사가 중국에서 수입되었지만 중국은 제사를 안 지낸 지 오래예요. 1년 만 제사를 지내면 그걸로 끝이에요. 아들 딸 구별도 안 해요. 형편 되는 자녀가 한 번 제사를 지내는 거죠. 일본 사람들은 아예 제사를 모르더군요. 중국의 조갑이 전두환의 삼청교육대 식으로 만든 게 조상제사인데, 조갑의 후손들은 제사를 버린 거죠. 중국은 공자를 버렸는데 우리나라 성균관에서는 아직도 공자에게 제사해요.
 
그렇다면 우리가 조상에게 제사를 드려서 행복한가요? 우리가 조상을 공경한다고 할 때의 조상은 오로지 남자 조상이에요. 내 10대 조상은 1024명이고, 20대 조상은 104만 8576명입니다. 많은 조상의 피가 섞여서 나와 네가 됐으니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진정한 조상 공경 아닌가요? 내 조상은 20대까지만 하더라도 104만 명이 넘는데 그중에 한줄기만 잡고 조상이라고 하면 나머지 조상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서명용지를 주면서 한마디 쓰라고 하면 ‘살아 있을 때 뽀뽀 한 번 더 해드리고, 전화 한 번 더 하겠다’는 이야기가 많아요.

지강유철 - 클래식 음악계는 2009년에 헨리 퍼셀 탄생 350주년, 헨델 서거 250주년, 하이든 서거 200주년, 그리고 멘델스존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와 음반들로 풍성했습니다. 음악가의 탄생과 서거를 같은 비중으로 기념하는 거죠. 우리도 최소한 탄생과 죽음을 공평하게 다룰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고은광순 - 그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탄생해줬으니 얼마나 고마워요.

내 제사 거부, 모두가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

지강유철 - 앞으로 내 제사 거부 운동은 어떻게 전개하실 건가요?

고은광순 - 우선은 뿔난 페미니스트의 별난 주장이 아니라는 걸 이해시켜야 하고, 제사의 기만적인 출발과 왜곡된 논리를 사람들에게 홍보해야겠지요. 수기 공모 같은 걸 할 수 있겠고요. 제사 안 지내고 이렇게 하여 우리가 더 행복해졌다는 여론을 만들어나갈 겁니다.

지강유철 -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이유는 뭔가요?

고은광순 - 생명이 참 소중하잖아요. 살아 있을 때 행복하기를 신께서도 바라실 거예요. 출생의 목표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의식과 영혼이 성장하는 거 아니겠어요? 교육기관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달달 외우고 시험치고 채점하는 게 아니라 영혼의 성장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죽은 이들의 제사나 명절 때문에 시간을 너무 낭비했어요.

지강유철 - ‘내 제사 거부 운동’이 성공하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고은광순 - 우선, 남녀 양성평등 세상이 성큼 다가설 거예요. 그러면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행복해지고 아울러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들이 생기겠지요. 상하좌우, 종과 횡의 관계들이 훨씬 더 부드러워지겠죠. 결혼 문화도 훨씬 더 자유로워질 거고요. 천편일률적으로 남을 쫓아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모습이 좀 더 다양해지고 창의력이 넘칠 거예요.

지강유철 - 기대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인터뷰 진행: 지강유철, 사진: 권영탕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10년 1월 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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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2/31 [17: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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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물인 2010/11/02 [15:02] 수정 | 삭제
  • 남에게 자기 집안의 위신을 강요하는 면도 있었지만. 그것은 해방 후 양반 족보 하는 따위를 논하면서 사람들 상호간 뿌리찾기 같은 개념에서..조상을 미화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현재 자신은 정말 아눌한데 집안에 그래도 조선조에 벼슬이라도 했던 조상이라도 있으면 웬지 뿌듯함이 생기지 않는가? 지금 당신의 형편이 좋고 고관대작의 지위에 있다하면 그것이 더욱 조상의 은공이 아니겟는가? 비록 조상은 노비나 천민의 신분이었다고 하더라도..그 노비 천민 제도가 양반들이 세금덜 내려고 그랬다는데..그래서 중앙의 왕의 권력을 신하의 입장에서 견제하려고 했다는데..하지만 당시의 문화는 왕이 윤리의 모범이 되는 것이라..다 그런 왕들은 아니었겠지만, 제사를 지내는 장식가지고도 신하들끼리 서로 논쟁을 했다고 한다. 그것을 무슨 당파사움이니 하는 말도 사실은 후대에 사람들이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고..그것은 소위 식민사관이라는 아주 몹쓸 사고에서 나온것이다. 당시 권력교체가 용이했던 시절도 아니고 보면 정치논리보다는 수탈을 쉽게 하려는 양반들의 경제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제사문화도 그런 경제논리에 의하여 과시되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당시에도 정말 찌져지게 가난한 천민 노비들은 제를 지내고는 싶었지만..그것이 인간의 속성이기에..하지못하는 처지여서..아마도 다른곳에서 신앙을 찾아 갖고 그 대표적인 것이 만신에 의한 치유적 제사이었을 것이다. 고관대작 양반들이 하는 제사는 규칙에 의하여 정돈이 되 있었느나 만신에 의한 제사는 오로지 지성으로 기도하는 방법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찌져지게 가난한 입장이 되보면 알 것이다.
  • 다물인 2010/11/02 [14:42] 수정 | 삭제
  • 공자 노자 장자 불교 이 모든것이 모택동의 공산혁명과 문화혁명으로 사라지지 않았는가? 현재 중국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여서 잘먹고잘사자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것을 가지고 있나? 우리도 그런것을 버린지 꽤 오래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면서 조선의 사상과 문화는 급변했고 신흥국가를 독립운동의 명분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민주국가의 틀을 조성해 왔다. 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단지 제사를 지내는 문화는 조선시대 국가의 예를 지도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책이 아니라..또 그것을 남성주의문화라고 하면 안되는 것은 제사상에 남자조상만 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여성조상도 제를 지낸다는 측면에서 남녀평등한 것이고, 젯상을 준비하는 것이 여성노동력을 착취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벌어다주는 남성은 헛깨비인가? 요즘은 남녀 맛벌이를 해서 그런 면은 다소 완하되었지만..제사 한상차릴려면 경비가 만만치 않아서 물가도 비싸고 제사많은 어떤 종가집은 음식을 다 차릴수가 없어서 위패만 모시고 향을 피우거나 술한잔 따르는 정도로 아주 간소하게 하기도 하고..또 어떤 돈 없고 찌져지게 가난할 때는 정안수 한잔 떠올리고 제를 지내기도 했다. 음식을 많이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제사가 아닌 명절차례를 반대한다는 것인데..요즘이야 수시로 먹는게 풍요로워서 차례상에 차리는 음식이 지겨울것 같다. 하지만 예전에 정망 찌져지게 가난할 때는 명절에 잘먹는 때만 손꼽아 기다리던 세대가 있었다. 사실 요즘도 노숙자나 빈민들은 정말 그렇게 바랄 것이다..찌져지게 가난함을 체험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오만이다..위의 제사반대운동하는 넘들은..
  • 다물인 2010/11/02 [14:18] 수정 | 삭제
  • 공자가 예에 관하여 박식하기에 그 제사에 초대해서 잘 알거라고 생각했는데..공자는 계속 묻기만을 거듭하고 예에 관해서는 아무말도 안하더라고 ..그 제사가 끝나고 한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는데..그렇게 아는척 하는 것보단 물어보는게 예라고 했더라는 ...도올 선생의 강의가 생각난다.
    예란 무엇인가? 아마도 이 덕목은 일방적인 잣대에 의하여 강요되는 법이 아니라, 항상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함으로서 생기는 찰나적인 법이 아닐까? 그 순간이 지나면 그 법은 사라지지만 그렇게 행동한 사람에게는 예가 있다고 하는..그래서 법은 순간적일 때 가치가 있고 예는 지속적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마도 인간사는 그 모습 일 뿐이다.
  • 마지막으로 2010/01/11 [12:23] 수정 | 삭제
  • 비과학적인 한의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ㅋㅋ 2010/01/11 [12:14] 수정 | 삭제
  • '중국은 공자를 버렸는데' '조선시대에 평민과 상민은 절대 제사를 지내거나 족보를 기록할 수가 없었다' '제사가 일반화된 것은 일제 시대' '일본 사람들은 아예 제사를 모르더군요' 이런 거짓말 좀 하지 말자. 문혁때 홍위병도 아니고...ㅉㅉ
  • 허참 2010/01/11 [12:04] 수정 | 삭제
  •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같은 10년 묵은 한물간 베스트셀러나 들이대면서 제례를 비방하다니-_-;;;;'그리고 조선시대에 평민과 상민은 절대 제사를 지내거나 족보를 기록할 수가 없었'다는 건 또 무슨 괴담인가. 주자가례에 근거해 서인까지 제사를 받들게 한게 고려말인데....
  • 허참.. 2010/01/11 [11:54] 수정 | 삭제
  • 중국은 공자를 버렸는데 우리나라 성균관에서는 아직도 공자에게 제사해요. 중국은 공자를 버렸는데 우리나라 성균관에서는 아직도 공자에게 제사해요. 중국은 공자를 버렸는데 우리나라 성균관에서는 아직도 공자에게 제사해요. 중국은 공자를 버렸는데 우리나라 성균관에서는 아직도 공자에게 제사해요. 중국은 공자를 버렸는데 우리나라 성균관에서는 아직도 공자에게 제사해요. 어처구니가 없다. 중국은 후진타오나 원자바오 같은 지도자급 인사들까지 공개적으로 유교사상을 인용하면서 강조하는 판국에 '중국이 공자를 버렸다'같은 낯간지러운 거짓말이나 늘어놓다니.....
  • wlskrkek 2010/01/04 [13:07] 수정 | 삭제
  • 제사가 가부장제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해서 조상을 추모하고 공경한다는 제사의 의미까지 부정하려고 드는군요. 비림비공을 주장했던 문화혁명의 페미니즘판을 보는 듯 합니다. 그것도 아주 왜곡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