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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정운찬, 여성문제엔 '소신' 보였다
[정문순 칼럼]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별로"라는 정운찬 후보의 '소신'
 
정문순   기사입력  2009/09/09 [15:50]
국무총리에 지명된 정운찬 후보는 나처럼 머리가 둔한 사람을 여러 모로 헷갈리게 하는 인물이다. 서울대 총장이 되기 전만 해도 정 후보는 월간 ‘말’지에서 경제 전문 필자로 단골로 얼굴을 내밀던 학자였다. 재벌이 주무르던 한국 경제의 근본 구조를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인물이었기에 그를 진보적 경제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가난한 진보 잡지에 얼굴을 내밀던 필자가 서울대 총장으로 영전했다는 소식에 의아스러웠던 기억이 조금 나지만, 상아탑의 수장이 된 후 그는 애초의 이미지가 많이 모호해졌다. 장관도 부럽지 않은 최고 국립대학 총장의 지위, 잦은 언론 노출에다 학자 출신이 대중에게 주는 호감 때문에 총장 시절 그는 행정가보다 유사 정치인처럼 비쳐졌다.  
 
정운찬 후보는 정치적으로 중도주의자 정도로 평가받는 듯하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나 금산 분리 완화엔 비판적이지만, 한·미자유무역협정엔 찬성하고 교육 분야에선 경쟁과 엘리트 교육 방식을 선호하는 것이 중도적이라고 평가받는 근거다. 경제력을 한쪽에 몰아주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이 뻔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에는 찬성한다? 또 경제력 집중은 반대하지만, ‘수월성 교육’이란 이름으로 교육 자본이 부자 자식들에게 집중되는 것에는 찬성한다? 어떤 분야는 흰 색이고 다른 분야는 빨간 색이면 중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락가락’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모순적인 두 얼굴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 신임 국무총리 내정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지난 3일 오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내정 소감을 밝혔다.     ©CBS노컷뉴스

그는 지난 대선 정국에서 여당의 대권 후보 중 하나로 모락모락 여론이 지펴지려는 찰나 돌연 대권 욕심이 없다고 잘라 말하고 정치와 선을 그었다. 후보 자원이 빈약하던 당시 열린우리당은 힘이 빠졌다. 학자답게 정치적 야망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것이 언론의 평가였다. 그러나 총리 후보 지명에 즈음한 그의 행보를 보니 공부밖에 모르고 권력욕도 없는 ‘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총리 발탁을 위해 본인이 먼저 청와대에 문을 두드렸다는 기사도 보인다. 권력에 뜻이 없어 대권 도전을 포기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이전의 행적도 눈 비비고 다시 봐야 하게 됐다.  
 
그의 본심은 무엇일까.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이 가지 말아야 길에 발을 들인 사람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색깔이 다를망정 현실 권력에 몸을 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한때 허망하게 접었던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 총리직을 삼으려는 것일까. 
 
그의 갈지자 행보에 대해 내 깜냥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해 유일하게 분명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 한 가지는 있다. 그는 총장 재임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최초로 법정 소송까지 갔던 성희롱 사건인 서울대 ‘신교수-우조교 사건’을 통해 여성 문제에 관한 매우 분명한 ‘소신’을 밝힌 적이 있다. 가해자와의 사적인 친분을 거론하면서까지 가해자와 그의 가족들을 피해자인 양 두둔하더니 정작 피해 여성의 고통에 대해서는 “별로다.”라고 무 자르듯 단언하여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자로 나선 것이다.
 
“잘 모르겠다.”라거나 “깊이 생각해본 적 없다.”는 따위의 입에 발린 에둘러가는 표현마저 정 후보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수식도 필요 없다는 듯 그의 입에서 나온 비린내 나는 날 것 그대로의 시정잡배식 어법을 떠올리자니, 시장에서 카메라 기자 모아놓고 ‘민심 탐방’을 즐기는 자리에서 수행원들을 수족이나 하인 대하듯 “야!”라고 불렀던 현직 대통령의 자질이 함께 떠오른다.  자가당착적인 정치적 태도에서 노무현 정부와 어울리지 않나 싶었지만, 역시나 그는 이명박 정부와 격이 맞는 사람인가보다.
 
다른 부분은 기성 정치인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모호하게 행동하면서, 여성 문제만큼은 아무 꺼릴 것 없다는 듯 당당하게 본심을 밝힐 수 있는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 없는 발언으로 자신의 격이 떨어지는 건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피해자의 고통이나 여성 문제를 하찮고 모멸스럽게 만들게 싶었는가? 
 
여성 문제에 대한 본심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냈다고 해서 손해 본 권력 남성이 별로 없음을 그도 잘 알 것이다. 심심찮게 목사의 성희롱 발언이 터져 나오는 교회도, 성추행을 저지른 국회의원도, ‘맛사지 걸’을 희롱하는 언급을 한 후보 시절의 대통령도,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한국 사회다. 그가 그런 선배들을 닮으려고 했거나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발언을 한 전력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정치판의 마초주의 대열에 머릿수 하나 더 늘리는 것밖에 없다는 평가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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