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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장애인과 노약자 대량 학살 전쟁
[주장] 59년이 흘러도 여전히 전쟁 중인 장애인
 
이훈희   기사입력  2009/06/25 [17:57]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장애인이 사망한 사건은? 화재나 교통사고가 아니다. 1950년 시작된 6 25 전쟁이 바로 이 때. 3년 동안 남북한에 이르러 순수 민간인만 해도 300만명 이상이 사망한 참혹한 전쟁은 동시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포함한 무수한 장애인의 희생 또한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양민 대량 학살. 지난 노무현 정권 당시 발족된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남한 군경에 의해 학살된 양민의 수는 최소 10만명이다. 

1950년대 당시 남한의 정치범은 3만명이었으니 적어도 7만명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거나, 장애로 인해 마을에 남을 수밖에 없는 노인, 임산부, 장애인, 어린이가 대부분일 것이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올해 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등 모두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했다고 밝힌 바 있다. 
 
▲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 출처 : , 촬영일 : 1948.11.1,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1950년 11월~1951년 12월까지 1년 여 동안 순창지역에서 최소 129명 이상의 민간인이 국군과 경찰의 공비토벌과 빨치산 거점 제거 과정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살해된 사건이 그것.

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참혹했다. 집단 사살된 희생자들은 대부분 농민들로서 장애인을 비롯한 여성, 어린이, 노인 등 노약자가 전체 희생자의 절반인 48.1%를 차지했다. 양민이 학살된 노근리, 거창 등 다른 지역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장애인 가족들의 희생도 잇따라 

지난해 AP통신은 아버지를 잃은 전숙자 씨 사연을 소개한 바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 장애가 있은 전 씨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딸의 건강을 걱정해 집에 들른 아버지는 국군에 체포되어 학살되었기 때문. 이처럼 장애인의 가족들 또한 희생의 도마 위에 올라야 했다.

양민학살을 다룬 기록물 <지리산 킬링필드>(선영사 刊)에서는 장애 노인들이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강씨는 이밖에 2.8 산청 양민학살을 목격한 할머니(당시 11세)의 증언을 빌어 ‘(국군 공비토벌대가) 집에서 빨리 나오지 않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쳐 피범벅을 만든 뒤에도 질질 끌고 다니면서 집에 불을 질렀다’고 폭로했다.”

미군이 장애인 학살에 앞장선 ‘짐승같은 행동의 증거’

양민 학살에는 미군의 주도적인 지시 및 참여가 있었다. 52년 3월 미군의 만행을 조사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성들과 어린이를 포함한 조선의 일반 주민들에 대하여 미국군대가 범한 대량 및 개별 학살과 짐승같은 행동의 증거는 감행된 범죄의 양에서나 또한 그 사용된 방법의 다양성에서 전례없는 것이다.”

실제 1950년 7월 26일과 27일, 미 25사단의 윌리엄 킨 소장은 예하 부대에 보내는 두 건의 명령서에서 “이 지역의 모든 양민은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걸맞는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한다. ‘걸맞는 조치’란 ‘사살’을 의미했고, 이 조치는 무수한 피난민을 대량 살상한 노근리 사태로 이어졌다.

피난을 떠날 수 있었다면 중증의 장애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족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상 당시 장애인이 있는 가정은 오로지 두 가지 판단만이 가능했다. 온 가족이 마을에 남든지, 어떻게 해서든 장애가 있는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가든지 하는 것.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는 미군이 찍은 한국전쟁 당시 기록 사진이 수천점 있는데, 이중 1950년 9월에 찍은 사진에는 남편이 지게에 아내를 싣고 피난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아내는 병환 중인지 매우 수척하며, 시각 장애인이다.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든, 지게에 타든 장애인의 피난도 잇따랐지만 급박한 전쟁 와중이고, 거기에 “전선을 통과하는 피난민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공격까지 겹쳐 결국 희생을 면치 못한 장애인의 삶은 그 어디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는 ‘적 아니면 아군’ 뿐이었고, 장애인이란 개념은 더 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북한 점령지역에서 미군의 지휘 감독 하에 172,000여명이 학살되었으며, 황해도 신천군의 경우에는 총 인구의 1/4인 35,383명이 학살되었는데, 그 가운데 장애인과 노약자, 부녀자가 16,234명이었다. 이를 통해 남한이든 북한이든 양민학살이 일어나면, 절반은 자기 몸을 보호하기 어려운 양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학살의 생존자도 중증 장애를 겪다가 사망

전쟁은 지옥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위험한 건 전쟁의 참혹함을 잊는 것이다. 한국 전쟁은 역사상 최단시간 내에 국민 중 장애를 겪는 사람과 노약자, 임산부 등을 대량 학살하였으며 또 이 수만큼이나 많은 인구가 장애를 겪게 되었다.

또한 학살의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중증의 장애를 겪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원한 또한 깊고 넓다. 1950년 8월 7일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여수시 남면 두룩여 조기잡이 어민 집단 학살사건 생존자들이 그러하다.

강수만 씨는 허벅다리 관통상을 입었지만, 평생 중증 장애인으로 살다가 사망했고, 김동암 씨 역시 다리 관통상으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그 역시 사망했다. 김청원 씨도 허벅지 관통상으로 중증 장애를 겪던 중 3년 후 사망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두 손과 발을 쓰지 못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사의 비극인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피해보상은 사실상 없었고, 진상규명조차 미미하다. 공식적인 사과 역시 없다. 양민학살의 희생자가 된 장애인 대중의 유가족은 세월이 흘러서도 전쟁의 딱지 속에 저소득층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 저소득 계층에서 전체 장애인의 90% 이상이 지속적으로 재등장하고 있어 고통의 되물림은 여전하다.

59년이 흘러도 여전히 전쟁 중인 장애인

장애인에게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59년 전에는 전쟁이, 59년이 흐른 지금에는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시설에서 총성 없는 희생이 이어진다. 오죽하면 “"외부출입 통제와 충분히 음식을 먹지 못해 배를 채우려 비닐과 나무껍질까지 먹는 등 비인간적인 생활을 해왔다"고 말할까. 59년 내내 죄수 아닌 죄수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장애인들은 ‘탈시설-자립생활 보장’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과 예산확보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모로쇠로 일관하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외면하고 있다.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노숙농성을 하며 투쟁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이 ‘탈시설 자립생활 쟁취 영화제’를 6월 27일 저녁에 개최한다. ‘제 3세계, 그래도 희망은 버릴 수 없다, 산책가,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고용하시겠습니까?’ 등 8개의 영화가 상영된다. 

전쟁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이 영화제를 권유한다. 6 25 전쟁 당시에는 무참하게 학살당해야 했던 무력한 존재에서 이제는 인간됨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 장애인 대중의 역사를 스크린을 통해 치열하게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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