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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감독들의 거품; 마초주의와 상업성
[정문순 칼럼] 성적 편견과 관객의 호기심에 부합하는 '작가' 영화감독들
 
정문순   기사입력  2009/05/12 [11:27]
김기덕,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한국 영화계에서 작가로 평가받는 소장파 감독들의 대표적인 이름임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그것 말고도 내게는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이 떠오른다. 

이들이 감독한 영화의 여자 주인공 배역은 남자와 달리 대개 대중에게 친근한 인기스타로 낙점되거나, 스타가 나오지 않을 경우 간혹 알려지지 않은 신인의 몫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들의 영화에 주인공 이름을 올렸던 여자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당대 여성 연예인의 인기 지형도가 한눈에 윤곽이 잡힐 수 있을 정도도 톱스타의 등장은 관습처럼 굳어지고 있다. 영화 <마더>의 경우에는 중년 베테랑 연기자가 여자 주인공으로 발탁되니까, 남자 주인공 배역을 ‘꽃미남’ 연예인에게 맡기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 봉준호 감독의 신작 <마더> 메인 포스터     © <마더> 공식홈페이지

여자 배우를 캐스팅하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 여성에 대한 특정한 시각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여자 배역의 자리에 연기자가 아닌 스타가 요구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여성에 대한 관습적 편견이라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상업주의 때문이다. 남자 배역을 뽑을 때는 굳이 외모와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와 비교해보면, 주연이라도 여자 배우에게는 뛰어난 연기력을 요구하지 않는 대중의 성차별적인 시선에 이 ‘작가’ 감독들이 순응했거나 아니면 관객을 핑계 댈 것 없이 그들 자신의 의식이 딱 그 수준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인기스타의 출연은 영화 제작자나 감독으로서는 관객의 발길을 극장에 끌어들일 수 있는 손쉬운 마케팅 전략일 테지만, 출연자로서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평범한 감독도 아닌 작가로 인정받는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돈만 밝히는 연예인이라는 사람들의 평가를 상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인기 드라마나 상업광고를 찍는 데 본업을 둘 뿐, 거친 고생과 연기 능력이 요구되는 영화 출연을 전업으로 할 사람도 아니다. 다만 부와 명성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는 작가 감독의 영화에 외출하듯 얼굴을 내미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인기스타가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탈각하고 배역에 몰입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스타의 명성에 기댄 영화에서 그것이 가능하기를 바라기는 무리다. 그럴 경우 영화는 상업광고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쌓은 연예인의 작위적인 이미지를 고스란히 갖다 쓰는 일종의 ‘상호텍스트’로 변질되기 일쑤다. 출연자의 이력을 알지 못하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귀족적이고 청순한 이미지를 구축해온 상업광고의 여왕을 캐스팅한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 스타의 이미지에 기생하는 정도가 어떤 것 못지않게 노골적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이들의 연기력이 형편없다는 평가는 잘 나오지 않는다. 출연 결정부터 쉽지 않았을 터이니 당사자들이 쏟은 땀과 노력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들로서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연기자 이력을 한 줄 보태는 것이지만, 감독으로서도 수확이 적지 않다. 연기와는 담을 쌓은 줄 알았던 인기 스타가 연기라는 것을 해냈다면 관객들의 시선은 배우 못지않게 그의 숨은 역량을 키워낸 감독에게 향한다. 영화감독, 프로야구 감독, 오케스트라지휘자가 남자가 해볼 만한 3대 직업이라고 했다던가. 그만큼 영화감독의 위상은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다. 한편으로는 스타 연예인들의 인기에 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용하여 감독으로서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공고히 세우려는 욕망이 번뜩임을 간과할 수 없다.  
 
▲ 박찬욱 감독의 2003년 작 <올드보이>     © <올드보이> 공식 홈페이지

반면 <올드보이>처럼 여자 주인공의 비중이 남자보다 떨어지는 경우는 간혹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은 무명의 앳된 신인이 발탁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거칠게 말하자면 유흥업소에서 성 경험이 없거나 적을 것 같은 나이 어린 여자를 선호하는 마초 남자들의 심리를 연상하게 한다.  

이들의 마초적 시각은 비단 여자 배우 캐스팅에서만 관철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감독들 중 여성 평론가들의 비난을 독차지하다시피하고 있는 사람은 김기덕 감독이다. 그러나 김기덕의 경우 표현 방식이 워낙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라서 혼자 부각되는 것일 뿐 실상은 다른 감독들의 남성우월주의도 그에 못지않다.  

<올드 보이>의 경우 미성년 남자의 여성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과 성적인 환상을 변명거리로 내세워 성적 폭력이 정당화되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손수 제 혀를 자르는 것은 어린 날의 실수에 대한 자기징벌로 나오지만, 그럴수록 여성에 대한 폭력은 슬쩍 합리화될 뿐이다. 철 없는 아이 때의 일이고, 죄값도 스스로 치렀으니 남자의 성적 폭력성은 더 이상 비난할 이유가 없게 된다.
 
한편 ‘웰메이드 상업영화’라는 이름을 얻었던 <살인의 추억>은 여성에 대한 잔혹한 범죄를 별명 그대로 상업적 대상으로 다루는 무책임함이나 흥밋거리 차원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관객들이 범인을 알 수 없는 잔인한 범죄에 소름이 끼치다가도 장면이 바뀌자마자 낄낄거리며 영화를 소비하는 와중에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1990년대 초입 당시의 비극은 망각 속에 내려앉고 만다.  

젊은 ‘작가’들이 충격적인 소재를 밥 먹듯이 다루는 습성에 대해서도 그다지 동의하기는 힘들다. 홍상수를 제외하고 왜 이들은 하나같이 자극적인 영상을 다루는 데 미쳐 있는 것일까. 어린 날의 실수를 제 손으로 징벌한답시고 자신의 혀를 자르거나, 범인이 어린 아이를 유괴하여 살해하면서 그 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해 촬영하는 장면에 관객을 경악에 빠뜨리는 것 말고 도대체 어떤 심오한 작가 정신이 서려 있을까. 십중팔구,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이면이 그만큼 추악하고 잔혹하기 때문이라는 모범 답안은 늘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이면이 아닌 정면을 보아도 이들이 묘사한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충격적이다. <살인의 추억>이 아무리 자극적인 그림을 만드는 데 골몰할지라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대를 살았던 나로서는 당시 사건에서 받은 충격을 능가할 수 없었다. 방과 후 귀갓길에 참혹하게 희생된 어린 피살자가 암매장 당한 현장을 찍은 20여 년 전의 흑백 보도사진 한 장은 여전히 내 뇌리를 떠나지 못한다.  

영화 <워낭 소리>의 경우 감독은 세상이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서 화면에 늙은 소의 울음소리를 한가하게 풀어놓은 건 아닐 것이다. 또 영화 <밀양>은 유괴살인을 다루긴 했지만 끔찍한 장면은 직접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목표는 아니었다. 자극적인 소재의 참신성을 따지더라도 이들의 영화는 그다지 신선한 것이 별로 없다. 피해자들이 모의하여 살인범을 죽이는 것이 줄거리인 경우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한 옛날 영화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에서 이미 선보였던 안전한 소재다.  
 
▲ 영화 <박쥐>의 한 장면.     © <박쥐> 공식 홈페이지

그러나 김기덕을 제외하고, 이들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내가 접한 것 중 젊은 ‘작가’들에 대한 희귀한 혹평은,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어느 여성 평론가가 예쁘게 생긴 여자는 나쁜 짓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영화라고 평한 것 정도였다. 제목부터 영어를 옮긴 것처럼 어색하고, 성을 떼고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호칭에서 보듯 여성을 아래로 내려보는 태도가 다분한 영화에 거부감을 느낀 내가 이상한 걸까. 상업성에 노골적으로 구애하는 ‘작가’ 감독들에 대해 직설적인 비평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의문이 미치자 그것도 영화산업의 마케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이 해외에서 인정을 받거나 흥행이 될 것 같은 영화에는 찬물을 쉽사리 끼얹지 않는 것이 국내 주류 영화 평단의 태도임은 나도 알고 있다.  

영화 마케팅은 제작자만 하는 게 아니라 영화산업과 관련한 모든 분야에서 각자 역할을 분담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박쥐>에서 남자 주인공 ‘성기 노출’ 운운으로 장사를 한 건 제작사의 광고와, 자극적인 기사들로 도배를 해놓은 포털사이트뿐만이 아니었다. 그 기사를 비판하기 위해 지면을 왕창 할애하여 한국영화의 노출 역사까지 뒤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언론사의 문화부 기자들도 영화 장사에 한 몫 거들었다.  

상업성을 결코 외면한 적이 없는데도 젊은 ‘작가’ 감독들이 명작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상찬 받는 근거는 국내가 아니라 칸영화제 같은 해외에 있다. 국내보다 권위가 있을 것 같은 외국의 영화제나 해외 영화계에서 눈길을 보내오지 않는다면 폐쇄적인 한국사회에서 근친상간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싶은 영화는 제작자를 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 젊은 ‘작가’들은 이미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세상에 혹하지 않을 자질을 기르는 건 본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만, 이들을 보는 시각도 조금 더 직설적이고 과감해져야 하지 않을까.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자극적인 그림으로 관객의 구미를 맞추면서도 작가 대접을 받는 것이 한국영화계의 관습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노력하더라도 이들은 내 눈에는 작가라는 호칭을 황송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니 말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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