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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금기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단상
안정환의 어깨와 '조폭마누라'의 등짝은 어떻게 다른가?
 
조현설   기사입력  2003/09/25 [14:09]

두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문신

▲문신을 새겨 병역을 기피하려 했던 용의자들     ©한겨레
근래 우리는 문신에 관한 한국 사회의 두 표정을 목도한 바 있다. 하나는 골인을 자축하기 위해 웃옷을 벗어젖힌 한 축구선수의 어깨 위에 새겨진 문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병역기피라는 죄목으로 구속된 젊은이들의 등판에 아로새겨진 문신이었다. 둘은 몸에 무늬를 새겼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행위가 환기하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현역징집을 피해 보려고 문신을 한 청년들의 마음속에는 신체검사 후 필요하면 지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작금의 세련된 레이저 박피술은 '문신은 영원하다'는 고전적 담론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의도나 기대와 상관없이 문신을 하는 순간 이미 그 청년들은 '나쁜' 상징의 옷을 걸친 것이다. 왜냐고? 한국 사회에서 문신이라는 옷은 입어서는 안 되는 옷, 유가적 신체관이 금지하는 미니스커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옷을 입고 병역이라는 신성한 의무에 도전했으니, 그들은 정말 나쁜 아이들이 된 것이다. 의미에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문신한 등을 카메라가 조폭들의 문신한 등과 똑같이 취급한 까닭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문신이라도 안정환과 같은 국가대표 선수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으면 대접이 달라진다. 물론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는 한국인들이 없지 않겠지만 적어도 언론들은 그의 문신을 병역기피자들이나 범죄자들의 문신과 동일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팬들은 아내에 대한 사랑의 서약으로 새겼다는 그 문신에 환호했다. 거기에는 문신에 낙인찍혀 있는 어둡고 사악한 그림자가 없었다. 영화, 음악, 스포츠 분야 등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스타'들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문신이라는 새로운 징후는 문신에 관한 부정과 금기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유가적 신체관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SOUL ON YOUR SKIN 후원의 밤 행사 포스터, /사진 출처: 타투아티스트 김건원 카페(http://cafe.daum.net/artistgun), 이 카페는 김건원씨 구명운동과 타투 법제화를 위해 만들어진 카페이다.
©타투아티스트 김건원 카페
문신에 대한 부정과 긍정. 두 개의 상징적 의미가 지금 젊은이들의 어깨 위에서 흔들리며 부딪히고 있다. 물론 여전히 문신에 대한 터부와 거부가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병역기피자만이 아니라 그에게 문신을 해 준 한 문신예술가가 의료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이한 사실이 그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달리는 말의 속도를 줄여보려는 이런 법적 고삐에도 불구하고 문신이라는 말이 멈출 것 같지는 않다. 인터넷상에서 나를 잡아가라고 시위를 벌리는 문신족들을 가두고, 모든 안정환을 구속하지 않는 한 말이다.

문신을 둘러싼 이 같은 사회적 갈등은 우리에게 문신 문화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촉구한다. 대체 문신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습속인가, 아니면 특수한 지역이나 계층의 문화현상인가? 또 누가 언제 왜 문신을 하는 것이며 문신한 사람들은 왜 그 고통스러운 새기기를 감내하는가? 나아가 문신은 왜 그토록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것은 또 왜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민감한 사회적 사건이 되었는가?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이 모든 물음에 일일이 답하기는 어렵다. 이 글에서는 다만 우리가 지닌 문신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의 역사적 기원을 답사해보려고 한다. 이 답사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신에 관한 논란의 뿌리를 캐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정적 문신 이미지의 역사적 기원

한국 사회에서 문신은 왜 터부시되었을까? 그러나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우리 사회의 문신에 대한 기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 유교·한문 문화권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보자. 왜 동아시아 사회에서 문신은 금기시되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피부 위에 물감을 넣어 특정한 글자나 무늬를 새기는 것을 지칭하는 말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입묵(入墨)·자문(刺文)·자청(刺靑)·경면( 面)·문신(文身) 등이 쓰였는데 오늘날에는 문신(文身)이라는 말이 대표성을 얻었고, 남태평양에서 흘러나와 영어화된 타투(Tattoo)와 같은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글월 문'으로 새기는 '문(文)'자는 본래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을 형상화한 상형문자였다. 그림에서 보듯이 고대 은(상)나라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나온 갑골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文)'자의 어원은 금기화된 문신의 역사를 살피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단서 가운데 하나는 갑골문을 사용했던 은나라에 문신 습속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은나라에 가슴이나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없었다면 '글월 문'자는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문신한 사람이 사제나 족장과 같은 특정한 계급의 사람이든 아니든 은나라에 문신이 존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신의 역사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주나라가 은나라의 문신 습속을 부정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할 텍스트가 흔히 {서경(書經)}이라고 하는 {상서(尙書)}이다. {상서}를 보면 주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기술하고 있는 [주서(周書)] '여형(呂刑)'편에 '하늘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絶地天通)는 고대적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얽혀 있는 내용은 단순치 않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화하족(華夏族), 다시 말해 한족(漢族)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황제(黃帝)가 묘민(苗民)들이 마음대로 하늘에 오르내리는 것을 금하고 중려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묘민들의 하늘과의 직접적인 소통은 단절되고 이제 하늘과의 소통은 황제가 임명한 중려를 통해서만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 고대적 사건이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황제와 묘민의 관계 때문이다. 여기서 황제는 주나라에 그 기원이 있는 중화 이데올로기가 말하는 중화(中華)의 표상이고, 오늘날 중국의 먀오족 등과 관계가 있는 묘민은 중화의 주변에 있는 사이(四夷)의 표상이다. 중세가 저물 때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민족관계를 규정하고 사대명분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괴롭혀 온 화이론(華夷論)의 기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관계 속에서 중화의 주변에 있는 오랑캐들은 황제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하늘과 바로 소통할 수 없는 타자적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황제는 중려로 하여금 하늘에 제사하는 일을 대신하게 했을까? '여형편'의 기록은 그 원인을 묘민의 악행에서 찾고 있다. 묘민들이 사형(死刑), 궁형(宮刑), 월형( 刑), 의형( 刑), 경형( 刑)이라는 다섯 가지 가혹한 형벌을 법률로 정해 놓고는 죄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형률을 남용하자 그 악행을 하늘의 상제가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형벌체계가 춘추전국시대의 일반적인 형벌이었던 것을 보면 이를 묘민들의 문제로만 떠밀어버릴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황제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묘민들에게 악행의 혐의를 부과함으로써 황제의 절지천통과 덕을 통한 교화를 정당화하려는 기획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교화자는 현덕(賢德)하고 교화를 받는 자는 우악(愚惡)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신은 바로 묘민의 악행 안에 형벌의 형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경형이란 얼굴이나 이마에 먹으로 무늬를 넣거나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말하는데 묘민들에게 이런 형벌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묘민들이 문신 습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이들의 문신 습속이 주나라와 [주서]의 담론 속에서 지극히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 보이는,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아들인 태백(太伯)이 동생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오랑캐들의 습속인 문신에 단발을 하여 자신이 쓸모없음을 보여줌으로써 동생 계력을 피했다는 기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문신에 단발은 쓸모없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지 않은가! 묘민을 포함한 양자강 이남 지역의 많은 소수민족들이 지닌 문신 습속은 {상서}에서 {사기}로 이어지는 주도적 담론체계 속에서는 어리석음과 무용함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유가철학의 집성인 {예기(禮記)}가 무례한 자들을 분별하는 다음과 같은 담론의 방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오랑캐 등 오방의 백성은 모두 습성이 있으니…동방의 오랑캐를 이(夷)라고 하는데 피발(被髮)에 문신을 했으며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남방의 오랑캐를 만(蠻)이라고 하는데 이마에 먹물을 넣어 새기고 두 다리를 엇걸고 자며 화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예기(禮記)} 왕제(王制))

서융과 북적의 풍속에 대한 진술을 생략했지만 이런 식의 분류체계 속에는 주나라로부터 전해 내려온 중화주의가 깔려 있다. 이런 화이론의 담론 속에는 이미 중국/사이, 화식/생식, 비문신/문신 등의 이원론이 전제되어 있고, 이 이원론 속에는 후자, 즉 이(夷)에 속한 것은 전자에 대해 열등한 가치라는 우열론이 숨어 있다. 이런 우열론 위에서 중국은 사방의 이족을 예(禮)로서 가르쳐야 한다는 교화론도 창안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은나라 갑골문으로 돌아가 보자. 문신을 상형한 '글월 문'자를 만든 은나라 사람들은 동이족과 무관치 않다. {예기}가 머리를 풀어헤치고(묶지 않고) 몸에 문신을 하는 풍속을 가지고 있다고 한 동이족이 세운 고대국가가 은나라이다. 그렇다면 은을 몰아내고 건국한 주나라가 은을 부정하기 위해 은의 문화를 부정하고 은에 대한 주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피발이나 생식과 같은 맥락에서 문신을 열등성의 표상으로 강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통해 우월감을 확인하는 방식은 자신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모든 민족, 다시 말해 사방의 오랑캐들에게 적용되어 갔을 것이다. 이런 방식은 자신들 역시 문신 습속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훼의 명령을 통해 문신을 금지하고 그 금지를 통해 가나안 사람 등 문신을 하던 주변의 '악한' 백성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던 유대인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역사와 담론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결국 동아시아 지역에서 문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주나라와 그 권력이었고, 이 시기부터 시작되어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강화된 이른바 화이론이라는 이름의 권력의 담론이었다는 사실이다. 문신이 문명의 선도자인 중화민족의 문화가 아니라 열등한 사방 오랑캐의 습속으로 규정되고, 이런 이데올로기가 중세적 보편성을 획득하여 동아시아 한문문명권 안에서 정당한 것으로 통용되면서 문신은 몸에 기어 다니는 벌레와 같은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유가적 신체관의 형성과 문신 금기의 강화

사실 문신은 이렇게 벌레 같은 대접을 받을 만한 행위가 아니었다. 문신은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민족의 특수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상당히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미개하거나 열등한 민족의 습속이라고 매도해버릴 문화 현상도 아니었다.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유럽에서도 5천 년이나 된 미이라가 문신의 흔적을 지닌 채 발견되었으며, 알타이 산맥이나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에서도 문신한 미이라들이 나타나고 있다. 4천여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의 여신 하토르의 여사제 아무네트의 미이라 역시 몸에 문신을 지니고 있었다. 아메리카를 침략했던 유럽인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북 아메리카의 인디언들도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지역의 찌르기 문신과는 달리 흉터 문신이라는 독특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인들 역시 문신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유명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을 비롯한 남태평양 지역의 대부분의 민족들도 문신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인류학적 보고에 따르면 이들은 20세기 초까지도 문신 습속을 지니고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확인한 것처럼 은나라를 비롯한 동이족이 문신 습속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양자강 이남의 소수민족들에게 문신 습속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전통적 문신을 몸에 지닌 노인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아래 자료들을 참조한다면 일본이나 베트남, 그리고 우리도 문신 습속에 동참하고 있었다.

일본 : 이곳에서는 남자는 어른이나 아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넣고 또 몸뚱이에도 바늘로 먹물을 넣어서 글자나 그림을 넣는다. …지금 왜인이 물 속에 들어가 물고기와 전복·조개를 잘 잡고 몸뚱이에 그림을 넣는 것도 역시 큰 물고기나 물새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이 문신의 위치·대소를 가지고 사람의 높고 낮은 것을 구별한다.({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왜인(倭人))

베트남 : 당시 숲과 산록의 백성들이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종종 교룡(蛟龍)에게 해를 입었다. 그래서 왕께 아뢰었더니 왕이 말하기를 "산만(山蠻) 종족은 수족(水族)과 다르다. 교룡이 자기 부류는 좋아하고 다른 부류는 싫어하여 너희들을 침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백성들의 몸에 먹으로 용군(龍君)의 모습과 수중 괴물의 형상을 새기게 했는데 이후로는 백성들이 교룡에게 물리지 않았다. 백월(百越)의 문신 풍속은 실로 여기서 비롯되었다.({영남척괴열전(嶺南 怪列傳)} [홍방씨전(鴻 氏傳))

한국 : 남자들은 때때로 몸뚱이에 바늘로 먹물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그린다. 이것을 문신이라고 한다.({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韓))

이 같은 주마간산격의 개괄적인 문신 산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문신은 원시 혹은 고대사회에서 보편적인 문화 양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신 사회에서 문신은, 토템이 그러하듯이, 한 집단이 밖으로는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안으로는 집단적 동일성을 구현하는 하나의 사회적 장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문신에는 종족이나 신분 표시와 같은 집단적 욕망만이 투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미적 욕망도 스며 있다. 이런 함의를 지닌 문신 사회에서의 문신이 미개함이나 어리석음의 표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들 사회에서 문신은 사회적 의무와 같은 것이었고, 집단의 일원임을 인정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징표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화이론과 같은 차별의 담론을 통해 문신이 어리석고 미개한 오랑캐의 습속으로 규정되고, 그것이 강력한 담론적 지배력을 가지게 되자 문신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문화적 맥락을 잃고 미개함과 어리석음, 혹은 악행의 표상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제 문신은 뭔가 나쁜 이미지의 옷을 걸치게 되고, 이제 대중들은 오히려 그 옷이 문신에 잘 어울리는 옷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인식의 변화 과정에서 문신 습속은 뭔가 불편하고 꺼림칙한 옷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삼한시대의 문신 습속이 삼국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진 것, 야요이·고분 시대를 거쳐 지속되어 오던 일본의 문신 습속이 나라 시대에 금지된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인식의 변화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유가적 신체관의 내면화이다. 일찍이 공자가 제자 증자에게 이야기하고 증자가 {효경(孝經)}에 담은 말 가운데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뜻이겠는데 이런 {효경}의 담론 체계 속에서 신체를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문신은 불효자가 되는 지름길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이 같은 유가적 신체관은 주자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6세기에 사림들이 민중을 교화하기 위해 주희의 제자 유자징이 엮은 {효경} 등을 수용한 {소학(小學)}을 강조하고, {소학언해}나 {효경언해}와 같은 한글본 책을 펴내 백성들을 교화하면서 유가적 신체관은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유가적 신체관의 형성 이전에 문신 습속은 사라졌고, 도둑질을 하여 유배당한 곳에서 도망한 자는 얼굴에 글자를 새긴다는 {고려사} [형법지]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 오면 문신은 형벌로만 존재하게 되어 유가적 신체관의 내면화 이전에 문신은 이미 범죄자를 연상케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가적 신체관은 이미 형성되어 있던 문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 불효라는 반인륜적인 낙인을 찍으면서 문신을 결정적으로 패륜아적 행위로 규정해버린 것이다.

필자는 같은 유교문화권 안에 있으면서도 일본이 우리와는 달리 문신 기술과 예술이 발달하고, 문신 시술이 자유로운 것도 유가적 신체관의 강도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강항이 일본에서 유학을 가르칠 정도로 일본 유학은 조선에 비해 미미했고 그만큼 유가 사상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유가적 신체관의 내면화 강도가 그만큼 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문신이 18세기 중반부터 사회적으로 크게 확산되고, 1880년에는 문신자를 형법으로 다스려야 할 정도로 사회적 문제가 된 것도 그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는 가톨릭의 지배력이 약했던 19세기 영국에서 유럽의 문신이 가장 꽃을 피운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가 문신에 대해 민감한 반응으로 보이는 까닭도 유가적 신체관의 강도와 깊이 연루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세대와 달리 새로운 세대들이 문신에 대해 좀더 유연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은 기성세대들이 충효관에 기초한 근대적 학교교육을 통해 내면화하고 있던 유가적 신체관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운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왜 같은 국가대표선수인 홍명보는 문신을 하지 않았는데 안정환은 문신을 했을까? 단지 이는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문신 금기, 그 너머에 있는 것

사실 문신은 인류사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우려고 했던 많은 원시적 기억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고도 흥미로운 것은 근대를 통과하면서 돌아온 문신이 인류가 부정하려고 했던 바로 그 원시적 문화에 원천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 사회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유행하기 시작한 문신이 그들이 점령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혹은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유럽에 영향을 준 일본의 문신 역시 남태평양의 섬들과 문화적으로 이어진 일본의 점령지 류큐(오키나와)에서 온 것이다. 범죄집단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이른바 개항 이후 우리 사회의 문신도 그 발원지는 일본이다. 오늘날의 문신은 잃어버린 원시적 기억의 근대적 복원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굳이 이런 문신의 귀환과 귀환의 출처를 거론하는 것은 문신이 중세적 제도가 만들어 놓은 규격화된 몸으로부터 풀려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문신이라는 새로운 대중문화가 하나의 뚜렷한 흐름으로 밀려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유럽이나 미국, 혹은 일본에서 문신은 이미 하나의 문화 양식으로 형성되어 있고, 한국 사회에서 문신은 이제 막 새로운 세대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매체의 하나로 선택되기 시작했다.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코나 귀나 배꼽을 꿰듯이 그들은 몸에 무늬를 새김으로써 자신들의 미의식이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일시적 문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문신과 바디 페인팅의 중간에 있다고 할 수도 있는 헤나 문신이나 플라노 아트의 유행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한국의 새로운 세대들이 자신의 몸을 단지 유가적 이데올로기와 같은 기존의 담론과 질서를 드러내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주체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지금 이렇게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나는 새긴다, 고로 존재한다.

지금까지 살폈듯이 동아시아 사회에서 문신에 대한 금기가 화이론 이데올로기에 기원을 두고 유가적 신체관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형성되고 강화되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이 금기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화이론과 같은 차별의 담론들은 이미 20세기를 건너면서 구조주의적 사유를 통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유가적 담론 역시, 한편에서는 문신예술가에게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 영향력을 더 줄어들 것이다. 물론 쉽게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결국 문신은 문신을 부정적인 행위로 만들어온 담론들의 퇴조와 부재 속에서 '개인적 취향'의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필자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입니다.
* 본문은 격월간『아웃사이더』15호(http://eoutsider.co.kr)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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