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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법이 무시해온 양육의 명예회복 시급하다
[정문순 칼럼] 양육의 가치 무시는 여성 종속과 불가분의 관계 이뤄
 
정문순   기사입력  2008/12/01 [13:59]
법에서 보장된 권리 중 살아가는 데 대수롭지 않거나 제대로 안 지켜져도 무방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미성년 자식의 친권에 대해서는 마치 공기처럼 일상에서 존재감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형태의 가족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친권 문제는 자신에게 닥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식으로 이루어진 혈연관계만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가족 형태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이혼이나 재혼,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 또다른 형태의 가족이 겪는 친권 문제는 당사자들의 고통과 무관하게 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다수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다고 하여 친권이 무관심을 받지 않아도 좋은 법은 아니다. 친권문제는 소수가 겪는 고통이었기에 불합리한 상태로도 온존해왔다. 친권은 시원하게 개념 정리가 똑 떨어지는 법이 아니다. 성인이 되지 않은 자식의 법적 권리를 부모가 행사한다는 개념 자체가 어려울 것은 없다. 그러나 양육과 별개로 떨어져 있는 한 친권은 나 같이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갈피를 잡기 힘든 법으로 변모한다.
 
법이 상식에 맞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부부가 갈라설 때 아이에 대한 양육과 친권을 어느 쪽이 맡을 것인지 판사의 질문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양육권’이라고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만 상식적으로 양육에 권리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양육은 부모로서의 노력과 의무를 행사하는 것에 가까운데, 만약 아이를 키우는 것을 권리라고 말하려면 양육의 대가에 상응하는 다른 권리가 함께 주어져야 한다. 양육이라는 부담을 짊어짐으로써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양육권이 돼야 한다면, 친권과 양육은 둘로 분리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힘 들여 자식 키우는 것을 친권과 떼어내어 버리니 말이 안되는 것이다. 아이를 먹여살릴 권리는 있지만, 통장이나 여권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줄 권리는 없다는 것이 말이 될까. 양육과 친권을 하나로 통합하든지, 아니면 양육을 도맡은 부모 한쪽에게 친권이 우선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자식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상식일 것이다. 
 
▲ 조성민의 친권회복을 반대하는 카페회원과 시민이 지난15일 ‘카네이션 집회’를 갖고, 현행 친권관련법의 개정을 촉구했다.     © CBS노컷뉴스

자식 키우기와, 자식에 대한 권리를 왜 굳이 법에서 따로 떼어놓았을까 생각하다 양육이 주로 여성의 몫으로 맡겨진 현실을 떠올리자 이 불합리한 법의 출생 비밀을 알 것 같았다. 아이 키우는 것과 아이에 대한 권리는 묘하게도 각각 다른 성별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하는 ‘부생모육’의 관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출생과 양육은 각각 남성과 여성의 몫으로 차등 분배된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은 남자의 핏줄을 생산하여 키워내는 역할로 전락할 뿐 부모의 권리를 남편과 동등하게 나누는 처지가 될 수 없다.
 
우습게도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이 남성만의 몫도 아닐뿐더러 아이를 키우는 일이 여자만 해야 할 일이 아님에도 성별분업 의식은 여기에도 끼어들어 양육은 부모 중 어느 한 쪽 특히 여성이 전담하는 불완전한 일로 인식되었다. 대체로 이혼한 남성이 아이를 키우지 않는 현실에서 양육하는 부모 한 쪽에 친권을 부여한다면 남성이 불리해지는 수가 많다는 것도 법 제정자의 의식에 작용했을 것이다. 남성이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세상이라면 흠집투성이의 친권 법은 태어났을 리 없다. 양육과 친권을 분리하는 건 아이 키우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부여할 줄 모르는 지극히 마초적인 사고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친권 문제는 양육이 부모의 으뜸 가는 역할이자 부모의 권리를 인정받아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니라 남자의 자식을 여자가 키워내는 일일 뿐이라는 인식과 싸워야 하는 일이 된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활약하는 마초들이 현행 친권의 허점을 제기한 여성들을 공격하는 건 이것이 여성의 권리와 직결되는 일임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친권과 양육의 분리는 ‘기른 정’보다 ‘낳은 정’에 손을 들어주는 관습적인 가족 관념의 표출이기도 하다. 친권의 ‘친’은 핏줄을 의미하여 가족이 혈연관계로만 구성돼야 한다는 인식이 남긴 흔적이다. 이는 핏줄의 인연은 없지만 양육과 돌봄을 통해 한 울타리를 형성하는 새로운 가족이나, 변화된 사회에서 핏줄을 넘어 다양한 사람 관계를 모색하는 흐름과도 대척점에 선다.
 
핏줄을 강조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폐단을 신문 사회면 기사에서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얼마 전 장애를 가진 미성년자를 삼촌 이내의 친척들이 몇 년에 걸쳐 성폭행한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실형을 받지 않았다. 재판부의 관대한 처벌 사유가 기막히다.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를 계속 돌봐줄 친족이 필요해서란다. 핏줄로 얽힌 사람들이 설마하니 몹쓸 짓을 저지를까 생각하는데다 몹쓸 짓을 한 사실이 드러나도 응분의 처벌은커녕 그래도 친족인데 하는 생각에 재차 몹쓸 짓을 하도록 기회를 주는 딱한 판사의 머릿속에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인간 관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이혼, 재혼, 입양 등 돌봄을 통해 형성되는 또다른 가족 유형은 인정받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문제의 출발점은 그동안 여성이 도맡아온 양육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데 있다. ‘양육권’은 핏줄을 넘어서는 형태의 가족이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자식을 키우는 여성의 노동이 합당하게 평가받는 사회라면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 더 우대 받을 것이 분명하다. 자식을 낳기만 했을 뿐 키우기를 게을리하는 친부모보다는 돌봄과 양육으로 아이와의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해가는 양부모나 위탁 부모에게 친권이 주어졌을 것이다.
 
양육자에게 친권을 부여하는 데 인색하거나, 성폭력자 친족을 감싸 안는 한심한 한국의 법원과 달리 여론은 희망적이다. “낳았다고 다 부모냐, 부모 노릇을 해야 부모지” 하는 말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은 오랜 세월 동안 땅에 곤두박질쳐진 양육의 명예회복을 위한 밑바탕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여기에 더해 앞치마 두르고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남성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좀더 달라질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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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2/01 [13:5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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