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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의 천국', 이청준 문학의 빛과 그늘
[정문순 칼럼] 시대 모순엔 우의적 풍자, 적극적인 문학적 응전과 거리 둬
 
정문순   기사입력  2008/08/05 [14:18]
<서편제>, <이어도>의 작가 이청준이 별세했다. 이청준의 전집 간행 소식을 본 것이 7년 전이다. 그때 나는, 연로한 나이에 이르렀지만 아직 필력이 왕성한 작가의 전집을 내다니, 출판사가 유명 작가를 내세워 돈 벌고 싶은 욕심에 몸이 꽤나 달았나보다고 생각했다. 당시 이순을 넘겼던 작가는 고희를 갓 넘긴 올해까지도 쉼 없이 작품 활동에 정진하여 전집을 계속 쌓아왔다.
 
영면에 이르러서야 창작 활동을 멈출 정도로 이청준은 등단 이후 평생 원고지에서 펜을 떼지 않는 일생을 보냈다. 작가가 한평생 한우물만 판다는 건 원론적으로는 이상할 게 없지만 한국에서는 희귀한 경우로 탈바꿈한다. 작가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글만 파고들어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황석영이나 박완서 외에 몇이나 될까.
 
예나 지금이나 작가가 배고픈 직업임을 생각하면, 통속소설을 쓰지 않고도 전업 작가로 살 수 있는 것은 문인으로서 복 받은 인생이라 할 만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고인이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촉수를 열어놓은 다양한 작품 세계와, 삶에 대한 중층적 인식, 그리고 빼어난 문학성을 밑거름으로 견고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청준의 쉼 없는 작품 활동이 빚은 안정적 문학 세계는 그 자신의 문학적 태도나 작가적 기질과도 결부된다. 이청준은 현실과는 거리를 둔 채 심미적인 것에 집중한 작가로 알려지거나, 영화로 각색되어 대중적 성공을 거둔 <서편제> 연작 탓에 민족적 정한을 탐구한 작가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것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딸이 판소리를 잘 하도록 마음의 한을 심어주기 위해 딸의 눈을 일부러 멀게 하는 아비(‘서편제’ 연작), 또는 자신의 재능이 소진됨을 알자 줄타기 공연 중에 떨어져 죽는 늙은 광대(‘줄’)가 보이는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고집은, 삶과 예술의 일치를 추구하려는 예술가적 노력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삶과 예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둘을 갈라 놓는 자본주의의 물신성에 대한 작가의 비판 의식이 깃들어 있다.
 
현실 정치를 비판하면서도 이청준은 직설적이지 않고 우회하거나 알레고리 방식을 쓴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허리춤에 총을 찬 군인 출신 병원장이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려 한 것은 당시 유신체제를 염두에 둔 것이었고, 영화 <밀양>의 원작이 된 <벌레 이야기>에서 아이를 유괴 살해한 범인으로부터 사죄를 받지 못한 어머니의 고통은 오월 광주의 피해자에 가닿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에 심어둔 교묘한 우의적 장치 덕분에 작가는 공안 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수난을 겪거나 작품 활동에 제약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김지하, 현기영, 남정현처럼 오적(五賊), 4.3 항쟁, 외세 침탈 등 ‘겁 없이’ 직설적인 필력으로 현실의 첨예한 모순을 드러낸 작가들이 필화에 희생되거나 심지어 향후 작가 활동에 두고 두고 상흔이 남겨진 경우와 달랐다. 이청준이 즐겨 쓴 우의적 기법은 자신에게 문학 활동의 안전판만이 되어 준 건 아니었다. 그는 소설을 당대의 정치와 직결시키는 데는 신중했기에 ‘당신들의 천국’은 섬에 세워진 한센병 환자들의 천국을 박정희 정권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지배 권력 전반의 문제와 접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청준 문학은 당대의 사회 현실이라는 시대성의 틀을 넘을 수 있는 장점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이청준은 현실을 외면한 작가는 아니지만 치밀한 역사적 사회적 상상력과 다소 거리를 둔 작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서편제> 연작의 경우 작가는 자본주의 생태의 일반적 문제나 민족의 한을 부각하려고 했을 뿐 판소리의 고장인 전라도에 서린 역사적 고통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라도 소리꾼의 목소리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던 정한은 호남에 근거지를 둔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 보편으로 추상화된 것이었다. 남도 사람들의 가락에 배태된 그들만의 설움은 구체성과 맥락이 상실된 민족의 한에 묻혔다.
 
예술이란 본디 소수자의 영역이다. 남도에서 예술이 발달한 것부터가 정치적 진로가 가로막힌 탓에 문화계로 인재가 몰릴 수밖에 없었던 호남 차별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임을 작가가 모르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모든 작가들이 호남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곧 수탈과 저항의 땅 호남 출신이기에 송기숙이나 문순태 같은 전라도 출신 작가의 역할을 기대한 것이 지나쳐 보이지는 않는다.
 
이청준의 작품에서 현실정치에 대한 작가의 육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가 수많은 작품을 낳았음에도, 소설의 기교 뒤에 작가가 숨을 기회를 주지 않고 사회에 대한 작가의 총체적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하소설에 손을 대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 발언 중 드물게 정치적인 건 <가해자의 얼굴>에서 통일운동가인 딸의 활동을 가리켜 그 아버지 입을 빌려 피해의식에 젖은 행동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있다. 억압적 체제와 싸우는 이들에게 피해자라는 자기 규정에 빠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피해자 의식을 스스로 거부한 때문인지 작가 자신은 현실정치의 가해자 편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살지는 못했다. 2000년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개편 때 종신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위촉된 것은 비정치적인 그의 작가적 이력에서 오점으로 남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지배권력의 생리를 모르지 않는 그가 신문 이상의 신문이 만든 상의 심사위원을, 그것도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닌 종신직이라는 막강한 지위를 수락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을까 싶다. 대놓고 거부하기가 힘에 부쳤다면 적당한 핑계를 대며 거절할 수 있는 정도의 분별력을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에게서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까. 한국의 작가 중 권력을 쥔 세력이 아무리 선의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끝내는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스만큼 치밀하게 보여준 이는 없다.  그들만의 천국을 세우려는 욕망에 휘둘리기는 권력신문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분단과 독재체제라는 시대적 억압이 영민한 작가에게 소설적 영감을 주는 것과 동시에 상상력의 제약과 보신을 낳게 했음을 그에게서 본다. 그의 영면과 더불어 작가에게 자기분열을 강요하는 사회도 함께 저물었으면 한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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