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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을 칭찬한다
따지는 것도 칭찬과 함께
 
박선협   기사입력  2003/08/23 [20:27]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칭찬한다.
무엇보다 집권에 성공한 그 리더십을 칭찬한다. 노무현 그가 16대 대통령으로서의 옹립가치에 귀중한 한표를 던진 국민의 단합된 힘을 우리는 잊을 수 없으며 잊어서도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6개월간 꿋꿋한 모습으로 밀어닥친 내,외의 정치,경제,사회, 국제, 노동, 문화, 여성등 남녀노소의 제반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치전략적인 순발력을 발휘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며 칭찬한다.그 결과가 좋았건 좋지 않았건 어떻든 좋은 방향으로의 물꼬를 트고자 했던 노력은 평가할 만한 것이다.

따짐도 칭찬과 더불어

언론과의 고집스런 대각선 상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소신을 유지 관철하고 있는 의연함을 칭찬한다.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든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그가 가진 철학이 그렇고 그가 그어놓은 분명한 관점이 그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것의 호, 불호를 따지려면 5년 후에 정권을 획득할 시나리오를 담금질 하는 일에 몰두할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에 트집을 잡는 것은 물론 나무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가 대통령이라는 공인 중의 공인이라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대한민국 '화두'의 중심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특성상 불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그가 언론을 향해 '투정성' 발언을 일삼을 때가 있었으나 그것과 대통령의 역량을 대비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아슬아슬한 대통령의 언설은 시정의 장삼이사에게 좋은 '양념거리'로서 작용하여 국정을 보는 국민의 '카타르시스'를 유화시키는데 한 몫으로 자리매김해 온 사실 또한 과소평가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정권장악에 실패한 야당 '한나라당'에는 공격의 빌미를 여보란듯이 우정 던진 형국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소탐대실'의 궤도로 진입시켜 놓은 부수적인 효과도 톡톡히 보았다는 것이 일반론이기도 하다.

칭찬은 하기나름

미국, 일본, 중국을 다녀 오면서 얻은 독특한 애국심은 본래 노무현 대통령이 '흙 속에 바람 속에'서 당겨 내 불어 넣어진 '이어령'의 애국심을 달구는데 한 몫을 하였다.

각계약진으로 그들이 처한 지역과 단체의 이기주의 속에서도 그는 균형잡힌 역활을 추스리는 기민성을 보인바 있다.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업적은 또 있다.
북한문제에 대한 '쌈 말리기' 전략을 미국으로 하여금 피치못하게 한점이나, '특검, 노동정책상 주 5일제의 선택, 부안 핵페기물 처리시설문제, 대통령의 비서실의 정치적 전진배치문제, 64회에 걸친 정책회의 주재, 소위 양실장 처리문제,' 등등 어느 것 하나 국민의 초미관심사로서 등장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회제를 불러 일으켰다.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란 있을 수록 즐거운 것이다.
솜씨를 발휘해 볼 기회와의 조우를 내실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국민의 주목대상으로 언론이 대서특필 해 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바라지 않는 문제도 그 중에는 있겠으나 어떻든 그런 일의 처리시스템의 가동을 통해 업적이 하나 둘 자리매김 한다.

여기저기서 하도 대통령을 탓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젠 대통령을 바라보지 말고 바로 주변의 자기자신을 바라보라는 말이 그것이다. 물류대란도 그렇지만, 서로가 서로와의 간격 좁히기는 우선 '자기주변과의 직면'이상 좋은 처방은 없는 것이다.

관행, 그리고 미래비젼

언론도 그 관행에 젖어 온 것과 다른 현상이 심심챦게 되풀이되다 보니 자꾸만 그것이 대통령의 탓인양 호도하고 싶은 욕구가 전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관행'이란 '어느정도 컨센서스를 이룬 과거에서 지나 온 관습'이거나 '그전부터 관례가 되어 행함' 내지는 '한가지 일을 자주 행함, 숙달하여 잘함'인 것인데 전혀 새로운 관행을 창조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중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여간만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은 불 보듯 뻔 한 것이다.

그렇다 해서 대통령의 분위기를 언론이 바라는 방향으로 이끌려 든다면 자연 충돌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 정치적 절충이 요구되는데 언론이나 지식인들이나 비판적인 국민들이 그렇게도 바라는 '타협'의 비결을 일방적으로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먼져 나서 손을 내밀며 아우르기를 시도할 수는 없는가 하는데에 포커스가 모아진다.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하는 일마다 꼭두새벽 부터 나서서 미주알 고주알 각을 새우는 것보다, 비록 어느 성긴 구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비치는 햇볕은 없는가를 챙겨보는 당당하고 유연한 모습을 보인다면 사회는 한결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스스로 돕는자

도움과 공유는 하늘의 이치만이 아니다.
대통령을 칭찬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들 국민 자신에 대한 칭찬이란 얼찬 효험을 뿌려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 우리가 아닌가?

보아하니 노무현 대통령의 미소가 곱고, 그의 발걸음이 믿음직 스럽고, 그의 말씨에 호감이 가고 그의 분별력에 무게를 느끼며, 그의 2만달러 국민소득 비젼에 희망의 싹을 본다는 칭찬을 가질 수만 있다면 대한국민은 복받은 국민이다.

바꿀 수 있는 것이 생각이다.
노무현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시에 패스하여 법관이 되었으며 대통령이 된 역정은 한편의 드라마다. 이것을 국민이 인정한 것이다. 일류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4년제 대학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편향될 소지가 있다는 시중의 참새들이 말하는 정치심리학적 접근은 경계할 대상이지 수긍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그 모든 가정은 현실과 직면했을 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바로 그것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노무현 대통령이 우뚝 서있다고 볼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한 여름 잦은 빗 속으로 천둥이 울린다.
그리하여 한 송이 국화꽃은 몽실한 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꽃이 있어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어찌 문객만의 전유물인가?
꽃을 피워 낸 꽃의 어귀찬 인고의 관행을 새롭게 꽃무리로 터친 자연의 절묘한 운행이 없었다면 누구라 꽃의 아름다움을 찬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우리의 노무현 대통령을 칭찬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꽃 피워 내려는 겨자씨만한 '에고'가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의 얼굴을 보는 거울 몫이기 때문이리라. / 기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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