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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의 침묵과 가해자의 당당한 입
[정문순 칼럼] 피해자의 말 못할 고통 강요하는 사회가 성폭력 더 조장
 
정문순   기사입력  2008/01/08 [03:47]
지난 연말에 ‘언니네’ 인터넷 사이트는, 연수 자리에서 동료 여성에게 입에 담기조차 힘든 언어 성폭력을 휘두른 사실이 뒤늦게 탄로 난 어느 지방의원을 ‘올해의 꼬매고(꿰매고) 싶은 입’ 중 하나로 뽑았다.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의 주인공은 진해시의회 한나라당 소속 배학술 의원으로, 그는 이전에도 술자리에 늦게 온 여성 동장에게 저질스런 욕설과 폭언을 한 전력이 있음도 드러났다.
 
이 사건들은 발생 후 1년 가까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피해자들이 공론화하기보다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다. 피해자 대신 입을 움직인 사람들은 목격자들이었다. 피해자들을 몸서리치게 했던 가해자의 폭언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다 세상의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빛을 쬐였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느 성폭력 사건이 그렇듯이 피해자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 것도, 가해자가 응분의 대가를 치른 것도 아니었다. 가해자를 규탄하는 여론이 물 끓듯 하자 배 의원과 시의회는 형식적인 사과문을 내는 것으로 파장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들은 배 의원의 자진사퇴와 시의회에 의한 징계 요구에 대답하지 않았다. 피해자인 정영주 의원에겐 세월 속에 혼자 삭였던 고통보다 더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맞닥뜨려야 했던 건 남성들의 일사불란한 동맹이었다. 이미 사건 당시에도 남성들의 한 패거리 움직임은 있었다. 정영주 의원은, 당시 폭언 현장을 두 눈 뜨고 보았던 시의장을 포함한 의원들까지 지금껏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게 자신을 더 힘들게 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남성들은 언제까지고 침묵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응집력을 과시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리는 입에는 그들도 입으로 맞섰다. 정 의원은, 남자 시의원들이 노골적으로 가해자를 두둔하면서 자신은 말썽이나 일으키는 시끄러운 여자로 내모는 바람에, 가해자로 뒤바뀐 처지에 있는 듯하다고 했다.
 
정영주 의원은 진해시의회가 개원한 이래 처음으로 배출된 여성 의원이다. 의회에서 자신의 우군은 없었다. 조직내의 남성들이 가해자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피해자로선 기억을 돌이키고 싶지 않은 성폭력 피해의 연장이자, 한 명의 가해자가 떼로 불어난 것과 다르지 않다. 아픔을 나눠야 할 동료들이 가해자의 자기복제물로 변모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피해자에게 침묵이 요구되고 사건이 알려진 후 더한 고통이 가해지는 것, 반성 없는 가해자의 뻔뻔함과, 그의 주변이 동원된 2차성폭력 등 성폭력 사건의 전형적인 수순을 보여주었다. 정 의원의 입장 표명이 나오자, 가해자는 언제 사과를 했느냐는 듯 입을 닦더니 자신에 대한 중상모략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말로 맞섰다. 표면상으로는 자신의 의원직 사퇴를 주장했던 시민단체를 겨냥한 발언이지만 궁극적으로 누구를 표적으로 삼았는지는 뻔하다.
 
배학술 의원은 자신은 “의원직을 사퇴할 만한 폭언”은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폭언의 정도가 사퇴할 만 한 것인지 아닌지 가르는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폭언 사실을 부인하지도,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도 못하면서 죄가 없다고 대드는 격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없던 사실로 지워버리고 스스로 피해자인 양하는 적반하장의 태도로 나올 때, 피해자는 절망한다. 죄상이 드러나도 고통은 결코 죄 지은 자의 몫이 아니었다.
 
조직 안에서 2차성폭력이 빈번히 일어나는 이유는 성폭력이 대수롭지 않게 치부되거나,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가 남성-여성간의 성적 대결 구도로 왜곡되어 이해되기 때문이다. 여성 비하 의식으로 가득 찬 남성들에게 성폭력 가해자의 처지는 남다르지 않다. 성 인식에 관한 한 자신들이나 가해자나 오십 보 백 보이기 때문이다. 시의원이란 지위를 걸치고 동료 여성과 공직자 여성에게 믿기 힘든 성희롱 폭언을 행사한 자라도 어디까지나 남자의 이름으로 연대해야 할 우군이며, 피해 여성은 자신들의 독점적인 성적 지위를 위협하는 듯이 보이는 위험한 타자에 속해 있을 뿐이다.
 
성폭력은 자신의 자리를 여성이 침해할지 모른다는 남자들의 위기의식과 떼어놓을 수 없다. 집 안에 머물러 있거나 사회에 나오더라도 남자의 보조적 위치에 있는 것을 여성의 자리라고 믿는 남성들에게, 사회적 지위를 가진 여성은 정상적인 여성의 규범을 일탈한 존재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용할 수 없는 여성들에게 성적 모멸을 가함으로써 여성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력한 존재인가를 확인시켜 남자들의 영역에 발을 들인 죄를 응징하고 추방하고자 한다. 징벌을 당한 여성들은 피해자의 권리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그들은 피해자임에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정 의원은 피해 사실이 공론화될 때까지 자신의 입으로 먼저 밝히지 못했으며, 여성 동장은 사건 이후 공교롭게도 다른 곳으로 전출되었다. 
 
성폭력의 고통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원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칼끝은 가해자가 아니라 인격적 존엄을 낱낱이 해체당한 처지로 떨어진 자신에게 겨누어진다. 배학술 의원은 시민단체들이 1년이나 지난 일을 뒤늦게 떠벌린다고 불평했지만, 그 1년은 정 의원이 피해를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속을 갉아먹은 시간이었다. 가해자에게는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과거가 피해자에게는 결코 과거가 될 수 없는 영원한 현재다. 가해자가 1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피해자가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여 낸 1년이 있었기에 가능할 뿐이다. 그 고통은 본디 가해자가 치러야 할 몫이었다.
 
성폭력이 여성의 입에 재갈을 물리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하는 한 가해 남성의 입이 누리는 자유로움에는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 자유로움은 가해자를 향해야 할 원망과 증오가 자신에게 겨누어져 여성으로서 자존감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감당하기 힘든 자기모멸과 마주해야 하는 이가 있기에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 여성이 스스로 삶에서 주인 자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라면, 피해자의 말 못할 고통을 대가로 가해자의 입이 자유로워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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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1/08 [03:4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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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지나가다 2008/02/12 [18:30] 수정 | 삭제
  • 대자보'의 링크를 보고 들어온 기사는 참으로 어이없게도
    반여성적인 발언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김영국이라는 분이 쓴 기사는 심하더군요.
    그 기사 하나보고 대자보의 여성주의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이런 섹션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또한 리플에서 볼 수 있었던 자칭 진보세력이라고 하는 자들의
    여성주의에 대한 몰인식,
    을 넘어 가부장적인 행태에 참으로 암울해졌습니다.

    저는 가끔씩 지나가다 들르는 사람이고
    단위에서 여성주의 논쟁을 하기도 지치는 사람입니다.
    소위 진보매체 라고 하는 곳에서 저런 수준의 댓글이 판을 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안그래도 힘드실) 여기서 활동하시는 여성주의자 동지들께
    또다시 부담을 지우는 거 같아 송구스럽긴 하지만,
    저런 쓰레기같은 리플은 집어치우고서라도,

    그래도, 기사에 대한 토론과 첨삭 과정은 최소한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 고양시민 2008/01/14 [16:06] 수정 | 삭제
  • 이런 거 보면, 한국땅에서 여성주의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겠다..
  • 2008/01/09 [17:53] 수정 | 삭제
  • 성폭력은 남자가 하고 피해자는 여자라는 낡은 사고부터 버려라.
    남자들의 위기의식, 피해의식..?
    대체 그런 관점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