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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가족’은 없다, 이데올로기일 뿐
[벼리의 Cine Review] 가족? 혹은 ‘실재의 사막’
 
벼리   기사입력  2007/04/19 [09:14]
“참, 아름답다, 아름다워.” 영화 초반부에 인구(송강호 분)가 강둑 위에서 뇌까린다. 그런데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거다. 차라리 조금 슬프고, 웃기고, 어이없는 거다. 강둑 아래로는 똘마니 둘이 피를 질질 흘리는 건축업자를 쫒아 간다. 엎어지고 나뒹군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이유는 영화 중반부에 인구와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노상무의 강둑 아래 추격전에서 드러난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포스터     ©한재림 필름
언제나 구질구질한 일상은 빈자리로 남아 있고 이른 시일 안에 거기서 활약하게 될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래서 시놉시스의 대칭구조, 다시 말해 ‘반복’은 일종의 비극을 암시한다. 또는 (맑스를 따라) 희비극이다. 이 영화 전체는 이러한 반복의 희비극 위에 구축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반복이 어떤 경향성을 띄고 있느냐는 것이다. 점점 확대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특이점 아래로 붕괴되는 것인가? 나는 후자의 경우에 내기를 걸고 싶다. 이 영화는 썩 잘 된 영화지만, 내기에서는 반드시 지게 되는 수를 선택했다, 고 난 생각한다. 영화에서 기세등등한 패기(?)는 인구의 저 말 뿐이다. 하나에서 셋? 또는 넷 정도를 살펴보자.

하나. 다시 ‘아버지’다. 송강호가 아버지였던 영화가 또 있다. <효자동 이발사>(2004, 임찬상). 내 기억에 이 영화는 어버이날 특수를 노리고 개봉했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울었으며, 몇몇 평론가는 별점 5개를 마구 던졌으며, 나는 심드렁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문제에 관해서, 나는 <우아한 세계>도 심드렁하다. 조폭이라고 해서 다른가? 이건 그저 감독이 농담이나 하자고 생각해낸 것이다. 농담이란 본래 상식적인 선을 고려하고 트랜드를 ‘조금’ 앞서 가면서 비꼬는 것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거기다 ‘조폭’이라는 말을 붙이면 하나의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여기서 리얼리티 운운하면 곤란하다. 조폭이든 아버지든 눈물 나는 리얼리티를 구현한 영화는 널렸으니 말이다.

▲가족, 가족주의에 집착한 <우아한 세계     ©한재림 필름
둘. 이러니 다시 ‘가족’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관객들은 이게 무슨 ‘기러기 아빠’ 영화인가 수군댄다. 물론 이 말을 한 관객은 조금만 맞다. 생뚱맞게 감독이 그걸 중심에 놓고 영화를 만들었을 리도 없다. 문제는 다른 데 놓여 있다.
 
마지막 장면, 인구는 가족이 모두 캐나다로 떠난 텅 빈 집에서 라면을 먹는다. 소포가 온다. 아들이 보낸 비디오 테이프. 거기는 인구가 없는 ‘단란한’ 가족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빨아 먹던 라면 그릇을 든 채로 인구는 비디오를 튼다. 어벙하게 클클대며 웃는다. 인구의 얼굴, 미디엄 숏에서 클로즈 업으로 간다. 조금씩 운다. 송강호만이 할 수 있는 연기. 콧물도 흘린다. 관객들은 조금 혼란스럽지만, 곧 이게 어떤 페이소스인지를 이해한다.
 
라면 그릇을 던지고 박살난다. 카메라는 인구의 뒷모습과 대형 스크린 티비를 함께 잡는다. 카메라 밖으로 나간 인구, 다시 들어온다. 화면을 보면서,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면서 흩어진 라면 가락들과 그릇 파편들을 손으로 비닐에 쓸어 담는다. 이 미장센은 매우 훌륭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인구의 삶은 영화 밖에서 반복될 것이다. 관객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영원히 저 미장센에 갇힌 채로 말이다. 
 
그래서 불행한가? 인구의 불행은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대책 없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건 인구가 선택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 모두가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구는 여전히 캐나다에 돈을 보낼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왜?’라는 질문이 여기 통용될 것인가? 글쎄. 
 
▲생활 느와르?     ©한재림 필름
셋. 이와 관련해서 다른 장면을 보자. 노상무가 죽는 장면. 인구는 회장과 단 둘이다. 회장이 사냥을 하는 곳. 인구는 회장의 동생인 노상무를 방치해서 죽였다. 회장에게 애걸복걸 변명을 하지만, 회장은 사냥총을 꺼낸다. 총성 한 발. 인구의 오른쪽 허벅지를 관통한다. 격투극. 회장의 총을 뺏어들고 인구가 말한다. “이거 누가 책임질 거야! 어? 누가 책임질 거야!” 물론 회장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구는 회장을 죽인다. 평생을 모셔온 보스다. 이때 관객들은 인구가 ‘가족’과 ‘의리’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가족’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특하다고? 그렇다면 앞서 인구의 질문은 의미 없다. 결국 ‘가족’은 결백한 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책임’은 가족에게 있다. 아들의 유학비 때문에 조폭 생활을 접지 못했고, 건축업에 손댔으며, 조직 내에 분란이 일어났고, 감방에 가며, 그래서 다시 조폭 생활을 한다. 누가 책임이 있을까? 그건 가족이고, 그 가족의 경제며, 그 가족의 천박한 자본주의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가족주의가 무엇을 은폐하고 (가당찮게도) 무엇을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가족을 잃게 되면 모든 걸 잃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라면, 그건 너무 유치하다. 가족과 상실의 모티브는 인과관계가 매우 불확실하다는 게 차라리 맞다. 가족은 이데올로기다. 그건 가면이며, 본질이 아니다.
 
넷. 그러므로 이 영화의 리얼리즘이란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이 질문이 매우 식상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폐기나 복권의 문제가 아니라 ‘진단’의 문제다. 그건 일종의 ‘시료’가 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우아한 세계>는 잘못 끼운 단추다.
 
물론 이 영화는 재미있다. 동시에, 씁쓸하며, 또한 미적지근하다. ‘조폭’과 ‘가족’(그리고 인상 깊은 오달수의 연기)이 잘 끼워진 단추라면, ‘가족주의’는 결정적으로 잘못 끼운 단추가 된다. 카메라의 시선이 자못 냉정함에도 불구하고, 이 틀 너머로 가지 못한다. 그 너머에 뭐가 있느냐고? 거기 실재가 있다. 그건 사막이거나 지옥일 것이다. - 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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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4/19 [09:1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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