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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사만 난무? 신상옥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영화칼럼] 권력에 밀착한 작품세계, 이제는 치열한 평가가 따라야 한다
 
강성률   기사입력  2006/04/27 [19:10]
지난 11일 신상옥 감독이 영면했다. 그는 해방 이후 한국영화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추모의 물결이 이어진 것은 당연하다. 현직 장관부터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그의 빈소를 찾았다. "한국영화사의 거목",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삶을 살았던 감독", "한국영화계의 선구자", "영화를 위해 태어나신 분", "영화처럼 살다 간 한국영화 큰 별"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신상옥 감독의 영면을 추모했다.

▲ 신상옥 감독의 영화 작업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평가가 뒤따라야 한국영화사를 발전시킬 수 있다.     ©
문화관광부에서는 신상옥 감독의 영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영화인들은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신상옥기념관을 세우고 흉상도 제막한다고 한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세계를 분석한 『위대한 영화인 신상옥』이 조만간 발간될 예정이고, 몇 방송사에서는 예정된 프로그램을 취소하거나 미루면서까지 신상옥 감독의 영화를 상영했으며, 영상자료원에서도 신상옥 감독 특별전을 개최한다. 그뿐인가. 신상옥 감독의 삶을 그린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다고도 한다.

지난 2주 동안 한국의 문화계는 신상옥이라는 키워드로 떠들썩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일부 신문과 인터넷 카페에서는 신상옥 감독의 영결식에 현역 스타가 별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꼬집으면서,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애꿎은 스크린쿼터 투쟁을 비판하기도 했다. 기회를 놓칠 세라 조선일보에서는 <신상옥 감독의 수용소 추억>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그 순간에도 이념공세를 펼치기도 했다.(그 기사를 보는 순간, 정말 대단한 조선일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은 죽은 이에게는 유난히 관대한 편이다. 살아생전 흠이 있더라도 마지막 가는 길은 다 함께 위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분명 좋은 풍습이다. 영화계로 한정해 보더라도, 나운규가 작고했을 때 그를 누구보다도 맹렬하게 비판했던 평론가 서광제가 쓴 너무나 따뜻한 조사를 나는 흐뭇해하며 읽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 글을 읽으면 마음의 평안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고인을 떠나 보낼 때이다. 이제부터는 신상옥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한 시간이다. 살아 생전에는 너무나 막강한 파워를 지닌 감독이었기에, 또는 이데올로기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평가하기가 쉽지 않았다면, 죽은 직후에는 고인에 대한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 했다면, 이제부터는 그의 영화 작업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영화사를 조금이라도 발전시킬 수 있다. 그에게서 긍정적인 점은 배우고 부정적인 것은 반면교사로 삼을 때 한국영화는 발전할 수 있다. 이제는 그런 작업을 해야 할 때이다.

신상옥 감독에 대한 평가는 아마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한 인간을 전면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칫 세심한 부분을 놓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세분화시켜 업적을 살펴본 뒤 종합하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때문에 신상옥을 평가할 때는 한국영화사라는 시각에서 제작자 신상옥, 감독 신상옥과, 한국현대사라는 관점에서 인간 신상옥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신상옥이 지니고 있는 위상과 업적을 골고루 보는 잣대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먼저 제작자로서의 신상옥을 보자. 신상옥은 1952년 <악야>로 데뷔했다. 이때부터 그는 신 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를 꾸리고 있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힘을 지닌 제작자가 된 것은 1961년의, 너무도 잘 알려진 부부 대결인, 홍성기 감독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면서이다. 이후 그는 엄청나게 몸집을 키웠다. 1966년 9월, 수도영화사의 사장 홍찬이 보유했었던, 2만 5천 평의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안양예고를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이때가 흔히 신필름의 전성기라고 한다.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정식 직원만 2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전속 감독, 전속 배우를 두고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때였다. 당시 8개 정도밖에 없던 개봉극장도 신필름의 위세에 눌러 개봉일정을 미룰 정도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신필름은 부도 위기에 시달렸다. 전속 감독이 자살하는 악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영화업이라는 게 부도율이 높은 사업인 것이다.

▲ 1975년 의 예고편 가운데 검열미필 장면이 있다는 이유로 신필름 영화사는 허가가 취소됐다.     ©
1970년대에는 이런 위기가 본격화되었다. 그러던 중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가운데 검열 미필 장면이 있다는 이유로 1975년에는 신필름 영화사 허가가 취소되는 처지에 이른다. 공교롭게도 신상옥과 최은희는 1978년 따로따로 납북되어 다시 북한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신필름을 복원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신상옥은 남한과 북한에서 최대 규모의 영화사를 운영한 제작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막강한 힘을 지녔던 제작자이기에 그는 많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성춘향>의 어마어마한 성공을 통해 칼라 시네마스코프를 일반화할 수 있었고, 거대 촬영소를 통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시 녹음을 시도하기도 했다. 배우 학원을 두어 신필름 배우를 충원했다. 북한에서는 최초로 키스 장면을 넣기도 했고, (자신의 말로는) 영화 시작 전에 자막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자 신상옥이 긍정적인 측면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영화계를 통제할 때 신상옥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달콤한 열매'를 따먹었다. 김수용 감독의 증언을 보자. "결국 67년에 정부는 12개 제작사로의 통폐합을 강행했다. 이때 영화법을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S씨가 끝내 스스로 영화법을 위반해 제작 허가를 취소 당한 사실을 나는 기억한다. 단두대를 도안한 기요틴의 목이 결국 단두대에서 날아간 것처럼." 군부의 통폐합 정책 때문에 군소영화사는 생사의 길에서 헤매게 되는 고통의 나날을 감내해야 했다. 안양촬영소를 싼값에 인수한 것도 정권과의 결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상옥은 정권과 가까웠다. 신상옥이 있는 곳에 권력이 있었다. 전쟁통이라 모두들 군대의 정훈국이나 보도국에서 기록영화나 정훈영화를 만들 때, 필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청년 신상옥은 어떻게 그 귀한 필름을 구해서 <악야>라는 개인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1960년대 내내 박 정권과의 결탁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에서의 김정일의 절대적 지원 역시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을 영화만 할 수 있으면 무엇이든 다한다는 영화적 열정으로만 봐야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일제 말기의 친일영화인을 비판할 수 없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의 심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감독으로서의 신상옥이다. 신상옥이 감독으로서 평가받을 수 있는 시기는 1950년대 중·후반과 1960년대의 작품 때문이다. 1970년대 신상옥이 연출한 영화는 그리 평가받을 만한 것이 못 되고, 북한에서 만든 영화는 다른 잣대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며, 탈북 이후 만든 영화는 작품적으로는 거론할 것이 없다.

1950년대 신상옥은 사극과 리얼리즘 경향의 영화를 만들었다. <지옥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 같은 영화를 보면 전쟁으로 피폐된 1950년대 남한의 스산한 풍경이 미려하면서도 수려한 신상옥의 미장센으로 펼쳐진다. <젊은 그들> <무영탑> 같은 사극에서는 매끄러운 이야기가 단아한 사극의 형식 속에 녹아있다. 미술부 출신답게 화면을 구성하는 것에 많은 중점을 둔 영상이 펼쳐지지만, 네러티브 역시 매끈하게 연결된다. 이것이 감독 신상옥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1960년대 신상옥은 숱한 장르에 손은 댄다. 문예영화, 멜로드라마, 사극, 코미디, 공포영화, 심지어 만주활극까지 다루었다. 그러나 신상옥이 역점을 둔 것은 사극이었다. 1960년대 사극붐을 형성한 것은 바로 신상옥이었으며, 거대한 제작비의 스펙터클을 사극으로 표현했다.  문예영화, 공포영화, 액션영화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기의 신상옥의 영화는 그렇고 그런 감독의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완성도 있는 영화가 많다. 흥행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도 이런 완성도와 관련이 있다.

▲ <빨간 마후라>와 같은 영화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영합한 영화 제작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 신상옥 필름
그러나 이 시기에도 비판할 것은 있다.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국가 이데올로기에 영합한 영화의 제작이라는 점이다. <코리아>(1954)는 정부를 홍보하는 문화였고,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은 이승만의 애국충절을 그린 영화이며, <쌀>(1963)은 군부 정권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영화이다. <빨간 마후라>(1964) 같은 영화도 국가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북한 정권의 입장을 옹호하는 영화를 만들다가 탈북 뒤 만든 영화가 북한정권의 테러를 비판한 <마유미>(1990)였다는 것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또 다른 것을 보자. 역시 김수용 감독의 증언이다. "신상옥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크랭크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 각본을 신 감독에게 들고 갔을 때는 흥행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는데, 그 사이 임희재가 새로 각본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힘없는 신인감독이 어떻게 큰 회사를 운영하는 대감독에게 항의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대제작자이자 감독의 태도인가. 또한, 1960년대 내내 문제였던 일본영화 표절로부터 신상옥과 신필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냉철한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 신상옥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길게 거론하고 싶지 않다. 여배우 오수미와의 염문이나, 월북·납북 문제 등에 대해서는 내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거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그가 북한에서 탈출한 후의 행동 가운데 하나만 거론하고자 한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빛 정책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타기 위해 김정일의 권력을 연장해 준 것이라고 일축했다. 심지어 김대중의 일본에서의 도피 시절도 북한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심지어 이것을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단지 북한에 얼마 동안 살았다는 것 때문에 아무런 대안 없이 냉전체제를 조장해서는 안 된다. 김정일의 지배력을 누구보다 일찍 간파할 만큼 냉철한 시각을 지닌 이가 어떻게 이토록 단순한 판단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인식은 평화조성과 통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이 사실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그의 생존전략이었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상옥 감독은 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그에 대한 치열한 평가가 뒤따라야할 것이다.

* 본 기사는 민예총 컬처뉴스 (www.culturenews.net) 에서 제공했으며, 본문의 제목은 원제와 조금 다르게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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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4/27 [19: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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