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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노벨평화상과 노동자의 평화
수구세력은 남북화해 정책의 기조를 흔들면 안돼
 
이장춘   기사입력  2003/02/06 [16:32]
카톨릭의 오랜 전통인 미사예절 중에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사제가 "주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면 신자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하며 이에 사제가 다시 신자들에게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라고 하면 신자들은 가까이 있는 주변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축복합니다"라며 서로 평화의 축복을 나눈다.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 할만큼 역사상 끊임없었던 전쟁의 상흔에 신음하고 있는 인류에게 평화는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무엇일까?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발생하게 된 것은 인간의 경제적 욕망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비옥한 땅의 거주자들이 선량하고 방어적인 반면 척박한 땅의 거주자들은 호전적이고 공격적이 된다. 인류가 문명의 이기를 통해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게 된 청동기, 철기시대의 전쟁은 보다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한 생존경쟁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란 말은 빵의 필요성을 부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최소한 빵 걱정은 해소되어야 인간이 살 수 있다"로 해석되어야 옳을 것이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기본적 생존의 욕구는 보다 큰 탐욕으로 확대재생산 된다. 지금 미국이 '정의'란 이름아래 이라크를 대상으로 벌리고 있는 전쟁의 이면에는 바로 군수, 에너지 자본의 추악한 탐욕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쨌거나 평화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역시 생존이다. 날마다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이며 고통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즉 먹고 살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될 때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자본의 시대에 노동자가 평화롭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또한 다르지 않다. 사적소유물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의 몸뚱아리가 전부인 임금노동자에게 평생을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사회 전체로 보아 일자리가 꼭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평생을 한 두가지 정도의 일에 투신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가 단지 인력이 부족한 분야가 있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전혀 생소한 일을 맡게 되는 것은 단순셈법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10년 넘게 책상 앞에서 워드프로세스만 토닥이던 화이트칼라에게 하루아침에 선반작업을 요구한다면 그게 가능할 일인가 말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현재 자신의 직장을 나가라고 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위협은 없다. 그것은 노동자와 가족들의 평화를 빼앗는 행위이다. 이럴 때 노동자들은 방어 본능적으로 파업이라는 전쟁을 택한다. 현정부는 IMF 구제금융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경제회생을 위한 수단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택했다. 재벌개혁이니 고통분담이니 하는 요란한 구호는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호도하기 위한 기만에 불과했다.

현 정부가 집권한 5년 내내 노동자들의 평화는 짓밟히고 파업의 전쟁으로 내몰렸다. 전쟁의 승자는 당연히 노동자는 아니었다. 50%를 넘어선 비정규직, 1,000명이나 되는 구속노동자라는 계량적 수치가 이를 대변해 준다. 롯데호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진압,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 폭력진압, 발전노조 파업에 대한 강경대처, 병원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진압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평화가 짓밟힌 상황에서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의 결과였다. 비록 노동자들의 평화가 짓밟히긴 했지만 남북평화를 진전시키고 그 결과로 노벨평화상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에 필자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아니 속절없이 마음 설레도록 기분이 좋았다. 우리들의 임금노동자 대부분도 그러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제 남북공동선언이 비밀 대북자금 지원의 대가라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노벨평화상이라는 개인의 영예를 위한 일련의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는 가설도 등장하고 있다. 속았다, 분하다는 감정은 비단 나만의 편협함은 아닐 것이다.



수백만 노동자들과 그 가정의 평화를 희생한 토대 위에서 현 정부가 추진한 각종 정책 중에서 그래도 긍정적으로 옹호했던 것이 남북화해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의 과시욕을 위해 각종 편법을 동원한 결과였다면 그 의미는 퇴색할 수 밖에 없다. 국민과 야당을 철저히 속인 행위는 민주주의 정신에 정면으로 반하는 독재자적 발상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목적이 옳았다고 상황논리를 들어 그것을 합리화하려 한다면 역사상 합리화되지 못할 독재자는 없을 것이다. 진보세력은 현정부에 대한 최소한의 호의조차도 이젠 버려야 할 모양이다. 노동자들의 평화가 짓밟히는 유감을 딛고서라도 옹호했던 노벨평화상의 상징성에 이젠 쓸쓸한 조소라도 보낼까?

덧붙여 현정부가 국민과 야당을 속이고 비밀협상과 자금지원을 통해 남북협상을 이끈 것은 분명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북화해 정책이 후퇴되어서는 안 된다. 수단의 잘못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하지만 추구한 목표의 긍정성 또한 당연히 지지되고 옹호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목표의 올바름을 이유로 수단까지 합리화시켜 옹호하려는 사람들의 철없음은 비판되어야겠다. 한때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가 이런 의혹을 제기했을 때 현정부 옹호세력들은 그것을 수구언론과 정치세력의 무책임하고도 근거없는 매도라고 비판하곤 했다. 물론 필자도 이런 입장을 옹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비판이 잘못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자를 비판할 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수구세력은 아무리 올바른 소리를 해도 수구세력이기 때문에 틀렸다는 극단적 흑백논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흑백논리야말로 수구세력을 비판하던 중요한 이유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이 이 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행동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금 남북화해 정책은 우리 민족 생존이 달린 문제이다. 사태를 무조건 확대하려고 하기 보다는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 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태에도 불구하고 남북화해 정책 기조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나라당의 정치적 공세는 국민적 호응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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