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영화의 흥행을 점치는 것이다. 평론가가 흥행을 점칠 필요는 없지만, 일반 관객들보다 영화를 미리 보기 때문에 습관처럼 어느 정도의 관객을 동원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추측이 정확하게 맞은 적은 별로 없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겸비했다고 생각한 영화도 처참하게 흥행에 참패하는가 하면, 전혀 의외의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하기도 한다.
가령 <집으로...>를 보고 나오면서 선배 평론가가 이 영화의 흥행을 점쳤지만, 나는 그렇게 촌스럽게, 노골적으로 할머니의 사랑을 강조하는 영화는 요즘 관객들의 기호와 전혀 맞지 않다고, 관객의 기호보다 뒤져도 한참을 뒤진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가 망신을 당해야 했다. 권상우와 유지태라는 당대의 스타 파워와 느와르 풍의 힘 있는 내용이 결합된 <야수>를 보면서 꽤 흥행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물론 비슷하게 맞춘 경우도 꽤 있다. <사랑해 말순씨>를 본 후 후배가 관객이 꽤 들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50만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결국 내 말이 맞았다.
|
▲ 블록버스터들 틈에서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왕의 남자' © 이준익 필름 제공 |
눈치 빠른 독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흥행 이야기를 늘여놓는지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 <왕의 남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평론가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이 영화가 10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객을 동원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하겠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1,000만 관객의 의미
이제까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친구> <웰컴 투 동막골>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었다. 이들 영화들의 공통점은 남북 분단 체제를 통해 한반도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다(물론 <친구>는 예외이다). 그것이 냉전 체제의 산물이든 화해 시대의 결과물이든, 또는 그것이 액션과 멜로의 결합이든 미스터리와 코미디의 결합이든 간에 분단 체제를 다루었다는 공통점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분단 체제를 다룬 영화가 엄청나게 흥행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다루기 때문이다. 분단과 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영화를 통해 재확인할 것이고,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은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하면서 분단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런 상황을 ‘민족적 알레고리(national allegory)'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즉, 한 민족이 집단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적 경험이 문화적 텍스트를 통해 알레고리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 한 영화가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4,800만 명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한 영화가 1,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려면 영화의 주 관객층인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여성 관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갓 태어난 아이부터 죽기 직전의 노인까지 모두 합쳐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그것도 불법다운의 천국인 한국에서 비디오가 아니라 ‘극장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봤다는 사실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무작위로 길가는 사람을 잡으면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것이다. 이런 관객 동원이 가능하려면 40대 이상, 아니 1년에 극장에 한 번 올까 말까 한다는, 그 ‘무서운’ 50대 이상의 중․장년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야 한다. <친구>가 8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40대 관객들이 극장을 열심히 찾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왕의 남자>에서 바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11일 대망의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른 바 ‘왕남폐인’이 속출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30번 이상 보았다고 한다. 극장에는 중년들이 관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이준기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설득력 없는 분석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관객들이 이 영화를 그토록 열광적으로 찾는 것일까? 뚜렷한 스타도 없고, 전통적으로 흥행이 잘 되지 않았던 사극이며(전통의상과 세트 재현 때문에 유난히 제작비가 많이 드는 사극임에도 이 영화의 순제작비는 41억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매우 싫어하는 동성애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쟁쟁한 스타가 등장하고 엄청난 제작비가 동원된 <태풍>, <청연>, <야수>를 모두 따돌린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평론가들은 대개 이미 연극에서 검증된 탄탄한 드라마 구조, 볼거리로서의 광대극과 사극, 절대 권력에 대한 비판 등을 그 이유로 든다. 물론 여기서 더 나아가 꽃미남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준기의 매력이나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적 장치를 든다. 즉, 젊은 세대인 20대가 보는 <왕의 남자>는 이준기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30대 남성은 감우성을 중심으로 보는 데 반해 장년층은 사극과 마당놀이, 풍자에 중심을 두고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세대의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하면서 하나의 신드롬으로 작용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흥행 요인이다. 남들 다 보았는데 자신만 보지 않으면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왕의 남자>의 엄청난 흥행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남성 관객을 끌어들일 만한 흡입력이 약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친구>, <웰컴 투 동막골> 같은 화끈한 액션이 없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볼거리로서의 광대극도 다른 영화의 볼거리와 비교하면 그리 ‘볼만한’ 것이 아니다. 그 정도의 볼거리는 다른 영화에도 얼마든지 있다. 세대를 넘어 모두가 교감할 수 있는 민족적 알레고리가 이 영화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동성애적 요소도 불리하게 작용하고 권력에 대한 풍자도 약하다. 게다가 한국영화와 드라마에서 지겹도록 다루었던 연산군의 이야기를, 그 뻔한 폐비 윤씨와의 문제를 다시 그리고 있지 않은가.
<왕의 남자>가 각 세대가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영화라는 분석도 흡입력이 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관객들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영화를 바라보기 때문에 한 영화를 봐도 모두 다르게 보기 마련이다. 때문에 이 영화만 다양한 읽기가 가능한 영화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분석은 사후처방에 머문다.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뒤에 그 요인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라는 혐의가 짙다. 이준기 신드롬이 이 영화의 흥행 비결을 말해주지도 못한다. <왕의 남자>가 흥행했기 때문에 이준기가 하루아침에 ‘뜬’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흥행 비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왕의 남자>는 그토록 많은 관객을 동원한 것일까? 지금으로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정말 모른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 영화는 기존의 대박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영화라는 말이다. 기존 대박의 공식을 따랐던, 즉 분단이라는 소재, 엄청난 제작비, 최고의 스타, 와이드 릴리스 개봉을 했던 <태풍>의 흥행을 두 배 이상 돌파한 이 영화의 흥행 비결은 아무도 모른다.
과문해서인지 무식해서인지 나는 <왕의 남자>의 흥행 요인을 분석한 글을 아무리 읽어봐도 설득력이 있는 분석을 찾지 못했다. 이것은 관객의 성향이 바뀐 것인가, 비평가의 눈이 무딘 것인가. 중요한 것은 <왕의 남자>는 한국영화 흥행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다. <왕의 남자>는 여전히 미스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