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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되지 못한 연극 '지하철 결혼식'
[컬처뉴스의 눈] 언론의 선정주의와 감동에 목마른 대중들의 합작품
 
김소연   기사입력  2006/02/18 [10:05]
감동의 미담으로 관심을 모았던 가난한 연인들의 지하철 결혼식이 젊은 연극학도들의 실험극으로 알려지면서 또 다시 파장이 일고 있다.

“가짜 결혼식에 전 국민이 감동했다니...”, “감쪽같이 속은 당신 ... 낚였습니다”, “눈물의 지하철 결혼식은 연극” 등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젊은 연극학도들의 결혼식이 ‘사실’이 아니라 '연극'이었다는 점이 지난 몇 일간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감동을 모두 증발시켜버린 것 같다.

눈물겨운 미담이 되어 인터넷을 통해 관심이 증폭되고 언론이 가세한 데다가 신혼여행 경비를 모아주자는 여론이 이는가 하면 무료로 결혼식을 치러주겠다는 결혼업체가 나서는 등 자신들의 연극이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을 때 이 연극을 준비했던 젊은 연극학도들은 “수배자의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젊은이들이 ‘연극’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 '지하철 결혼식'이 몰고온 혼란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연극'이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극'이 연극으로 완성되지 못한 데에 있다.    

지하철 결혼식이 몰고 온 파장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는 점은 우리 사회에서 ‘사실’과 '연극', 곧 '사실'과 '예술'의 가치가 진실과 거짓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위계 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이란 삶과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통념이다. 한편으로는 만들어진 것, 꾸며진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만들어진 것, 꾸며진 것이라는 경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만을 가치 있는 예술로 인정하는 부조리한 통념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끊임없이 예술이라는 경계에 도전하면서 전개되어 왔고 이를 통해 삶과 진실에 육박하고자 했다. 브라질에서 민중연극운동을 전개한 아우구스또 보알은 무대 위에 차려진 가상의 현실을 진실이라 말하는 연극들을 비판하면서 거리든 식당이든 군중들이 모여있는 삶의 현장에서 연극과 삶의 경계를 지우고 ‘보이지 않는 연극’을 실천했다. 연극은 ‘혁명의 예행연습’이라고 강조했던 보알이 브레히트의 연극에 대해 비판했던 것도,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부르조아 연극과 달리 이성적 비판을 중시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성적 깨달음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보알의 '보이지 않는 연극'에서 '가상의 상황'은 그것이 꾸며낸 것이기에 거짓인 것이 아니라 바로 진실에 이르는 통로인 것이다.

비단 ‘지하철 결혼식’만이 아니라 이미 십 수년 전에도 채 관중들이 연극임을 알지 못한 연극들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공안정국 시절 젊은 연극인들, 대학생 연극동아리 회원들은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연극’을 벌였다. 빈자에게 악하기만 한 세상을 향해 소리지르는 취객이 되기도 하고 또 공권력에 의해 젊은 목숨들이 죽어 가는 현실을 놓고 '꾸며진' 격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지하철 결혼식’의 관중들이 배우들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냈던 것처럼 그때 관중들도 때로는 취객에게 동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끼여들어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시끄럽다며 눈총을 주기도 했다.

보알의 ‘보이지 않는 연극’이나 ‘지하철 결혼식’이나 90년대 초반 공안정국에서 벌어졌던 거리의 연극들이나 이들이 굳이 삶 속으로 들어가 연극과 삶의 경계를 지우고 연극을 벌이는 것은 연극이 꾸며낸 상황에 관중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세상에 무관심한 닫힌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하철 결혼식’이 몰고 온 혼란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연극’이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극’이 연극으로 완성되지 못한 데에 있다. 젊은 연극학도들이 하고자 했던 연극은 흔치 않은 이야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겠다는 것이 아니라 관중들의 삶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비록 가상의 상황일지라도, 아니 바로 가상의 상황을 통해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관중들이 직접 몸으로 경험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하면서 온 존재로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연극이라 했던 배움을 실천하고자 했을 것이다.

연극을 준비했던 학생들은 “비록 연기이지만 공연 도중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는 분도 계셨다”며 “커튼 콜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뻤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배움을 그들은 공연의 현장에서 감격하며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수배자의 심정으로 “속여서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시작은 이들의 의도와 달리 한편의 연극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빨려 들어가면서 흔치않은 이야깃거리가 되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몸이라는 현실적 물질적 조건이 제거된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의 속성상 관중과 배우가 함께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자 했던 이들의 기획은 전달될 수 없었고 이들의 연극은 연극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떠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젊은이들의 연극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이번 파장에서도 역시 언론은 본연의 의무라 할 확인이라는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이 젊은이들의 연극을 ‘사실’이라 보도했다가 이제는 ‘낚였다’ ‘가짜’라며 폄하하고 있다. 수도 없이 맞닥뜨리는 언론의 선정주의는 정말 고칠 수 없는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인가 보다.

거기에 더하여 또 하나의 안타까움은 이들의 연극이 미담으로 전해졌을 때, 결혼식을 치러주겠다던가 성금을 모으겠다는 반응들이다. 가난하지만, 가난이 사랑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 없다는 이 연극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세상 사람들은 읽지 못했다.
 
비록 이야깃거리가 되어 인터넷 공간에 빨려들어 갔더라도 이 연극의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면 굳이 미담의 주인공을 찾아 이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겠다는 호들갑은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인터넷에서는 흔치않은 이야깃거리가 되어 떠돈다 하더라도 이들의 연극은 성공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고개 숙인 그들이 안타깝다.

* 본 기사는 민예총 컬처뉴스 (www.culturenews.net) 에서 제공했으며, 본문의 제목은 원제와 조금 다르게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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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2/18 [10:0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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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탱이 2006/02/18 [11:12] 수정 | 삭제
  • 그것이 연극이었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연극을 보았습니다.

    젊은 연극학도들,
    힘 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