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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스크린 위에 펼쳐진 감각의 향연
빛과 소리의 예술, 영화적 아름다움을 구현한 이명세 감독을 옹호함
 
이태경   기사입력  2005/09/27 [16:34]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리는 이명세 감독의 신작 『형사 : Duelist』가 기대와는 달리 흥행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명세 감독이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인데다 하지원과 강동원이라는 인기절정의 스타들을 주역으로 기용했는데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영화 <형사 : Duelist> 포스터     © 코리아 픽쳐스 제공
그렇다면 도대체 관객들은 무슨 이유로 『형사』를 외면하는 것일까? 아마도 관객들이 『형사』를 외면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형사』와 곧잘 비견되곤 하는 『다모(茶母)』가 지니고 있었던 드라마의 부재 탓일 것이다.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들이 펼치는 애증과 결투를 기대했을 관객들에게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곤혹스러움으로 다가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형사』를 보고 토해 낸 "2시간 짜리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 했다"는 감상은 이를 방증한다.
 
영화를 '빛과 소리의 예술'이라 정의할 때, 대한민국에서 이명세 감독만큼 이 규정에 충실한 감독은 달리 찾기 어렵다. 『형사』는 이명세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본질적 요소들을 끝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대사와 드라마에 의지하지 않고 빛과 소리, 색채와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이명세 식 영화문법은 여전히 한국관객들에게 낯선 것이 사실이고, 이는 영화의 흥행 면에서 치명적인 불리함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흥행실패에 대한 이런 우려는 불행히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형사』는 흥행실패만으로 비난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영화이다. 
 
이명세 감독, 빛과 소리의 왕국을 건설하다
 
『형사』를 처음 만들 때부터 이명세 감독은 드라마에 관심이 없었다. 하긴 그의 전작(前作)들도 한결 같이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혹자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가 지나치게 시각적 효과와 음향에 기댄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감독 고유의 이해를 존중하지 않는 발언이다. 모든 감독들이 드라마에 충실한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명세 감독이 그려내는 영화적 상상력의 세계가 단지 황홀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범람에만 머무른다면 그러한 비판이 적실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세 감독은 자칫 무질서와 부조화로 귀결될 수 있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남발(?)을 놀라운 장인의 솜씨로 가다듬어 균형 잡힌 질서의 소우주를 창조해 내곤 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형사』가 있다. 『형사』는 이명세 감독이 영화라는 기계복제 매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변이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들이 항용 그렇듯 『형사』에는 이렇다할 극적 긴장이나 반전이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이미지와 상황에 딱 들어맞는  사운드이다.
 
특히 『형사』에 간단(間斷)없이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한국영화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이 긴 담장을 끼고 남순(하지원 분)과 슬픈 눈(강동원 분)이 벌이는 결투 씬은 빛과 어두움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데, 이는 마치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의 회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할 지경이다.
 
또한 영화의 도입부에 펼쳐지는 장터에서의 일대 활극은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절묘한 사운드를 머무려 흥겨운 마당극에 참여한 듯한 신명을 안겨주며, 영화의 마지막에 병조판서의 집에서 벌어지는 포졸들과 가병(家兵)들의 격돌은 일종의 군무(群舞)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 영화 <형사 : Duelist>의 한장면                          © 코리아 픽쳐스 제공

색채의 대비가 주는 효과도 만만치 않다. 일례로 대결에 임한 병조판서(송영창 분)가 입은 창백하리만큼 흰옷과 안 포교(안성기 분)가 입은 칠흑 같이 검은 옷이 보이는 흑백의 대비는 흩날리는 눈과 붉은 색 장막과 어울려 강렬한 회화적 인상을 심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한 마디로 『형사』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이미지와 현란한 색채, 절묘한 사운드가 사이좋게 어울려 현기증 나도록 매혹적인 감각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가장 우월한 영화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지 모르지만, 다른 예술 장르와는 구별되는 영화적 아름다움의 구현에 서툴렀던 한국영화의 전통을 생각해 볼 때 『형사』가 거두고 있는 미적 성취는 매우 값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영화가 그렇듯 『형사』에도 약점은 있다. 예컨대 남순(하지원 분)과 안 포교(안성기 분)가 구사하는 전라도 사투리는 무척 어색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맥락상 불필요하게까지 여겨진다. 또한 남순으로 분한 하지원은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쑤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여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형사』가 이룬 미적 성취에 비하면 위에서 열거한 흠들은 너그럽게 보아 넘겨도 좋을 정도로 경미하다.
 
『형사』는 위대한 영화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영화가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미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명세 감독은 『형사』를 통해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요소가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명세라는 장인의 손길을 통해 사운드와 이미지들은 생기를 부여받고 충돌하며 조화를 이루었다.
 
이명세 감독은 한국영화사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방점을 찍은 것이다.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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