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천만 명이 내려받아 듣는다는 ‘나는 꼼수다’를 일부러 찾아서 들어본 적은 없다. bbk, 나경원 1억 피부클리닉 정보 등이 죄다 거기서 나왔다는데도 말이다. 정치사회적인 감각을 키우기 위해 들어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한창 좋아하는 가수 노래를 찾아 듣는 깨알 같은 재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인터넷 서핑질에 코를 박고 있다가 한 번은 얻어 걸려 건성으로 들은 적은 있다. 그때 들은 내용이 뭐였는지 가물가물하다. 남자 여러 명의 왁자지끌한 웃음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담배와 술에 찌들어 있을 중년 남자 네 명에게서 퀴퀴한 냄새가 날 줄만 알았더니 점잖은 여성 나레이터의 보조 설명도 있어서 중화된 분위기도 풍겼다. 그때 정봉주 전 의원이 영어 발음을 굴리며 자신도 유식한 발언을 할 때도 있다고 허세를 부렸던가 어쨌던가.
‘나꼼수’가 진주에 공개방송 하러 온다고 몇 시간을 길바닥에 뿌리며 방송을 보러 가는 이들을 보며 나는 약간 비웃기까지 했다. 선견지명이 있는 나는 작금의 쪼그라진 ‘나꼼수’를 예감했는지 모른다. 맥락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눈 찢어진 아이’ 논란을 주워들었을 때는 사람의 용모 가지고 장난을 치는구나 싶었으며,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을 잘했다며 자부심이 솟구치기까지 했다.
근본적으로 ‘나꼼수’에 대한 나의 거리감은 핵심 멤버인 김어준에 대한 평가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른 멤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는 나꼼수 출연진들은 그냥 김어준들로 보인다. 나는 김어준이 재기가 충만한 사람이라는 데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을 온 클린턴 전 대통령의 수행원들 인적사항을 일일이 알아내는 것을 보고 그의 정보 실력에 감탄한 적도 있다. 또 힘센 정치인을 불러내는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할 때는 입에 욕만 달고 사는 줄 알았더니 사람을 한쪽으로만 평가하지 않고 장단점을 균형 있게 이끌어내는 것도 좋았다. 팬티를 뭐 입느냐는 ‘천박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터뷰는 대상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딴지일보를 위시한 김어준의 글은 잘 읽히다가도 불편한 부분이 꼭 있었다. 그의 발랄한 감성과 촌철살인의 글솜씨는 존중하지만 여성관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일간지에 연재하던 상담 코너에서 한 여성이 남친이 성관계를 자꾸 요구해서 죽겠다는 고민을 토로하자, 남자의 본성이 그런 것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말을 조언이라고 내놓았을 때 어쩔 수 없는 마초의 고백을 읽었다. 그의 보증수표가 돼버린 거침없는 욕설의 사용도 나는 어색함을 넘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나도 고상이니 천박이니 하는 잣대로 사물을 재단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가령 클래식 음악은 고상하고 락 음악은 저속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경멸한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 특히 남자 성기와 관련된 욕설이 나는 꽤나 불편했다. 그는 욕설을 쓰는 것을 당당함이나 금기 깨기의 일종으로 자부하는 듯하고 그런 점이 인기를 끄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내게 그런 욕은 남성다움의 당당한 과시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거친 욕설은 성을 조롱하고 깔아뭉개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을 쓰는 맥락이나 환경에 따라 실상은 그렇지 않거나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때도 있다.
여성의 입에 재갈이 물린 이 척박한 한국 땅에서 남성이 남성성과 관련한 욕을 거침없이 한다는 것은 그의 의도야 어찌 됐든 여성에게 남성성의 당당함과 자부심을 과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자신의 성기를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성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해 있다는 증거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의 수위가 높아질 때마다 남성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여성을 마구 공격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고 싶지만 나부터도 그 적나라한 용례를 들기가 꺼려진다.)
작금의 비키니 수영복 사건도 김어준들의 마초주의가 낳은 삑사리일 것이다. 김어준들은 수영복 시위를 선동한 것이 결코 성희롱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를 냉정하게 인식했으면 좋겠다. 자신들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호응한 여성들이 있음을 알리바이로 삼는 것은 ‘마초답지 않게’ 비겁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을 성적 위안의 수단으로 깔아내렸다는 사실은 왜 죽어도 인정하지 못하는가. 감옥에 갇힌 정봉주의 성적 불만을 해소하는 데 왜 엉뚱한 여자들이 동원되어야 하는가.
그건 잘 나가다 성공에 취해 조심성을 잃은 것도 아니요,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데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여성들이 있다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실수도 아니다.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일어나도 일어날 일이었다. 엎어진 사람 밟아주는 야비한 짓은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 핵심 멤버인 김어준의 성향으로 보아 ‘나꼼수’는 언젠가는 터질 화약고를 내장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혹자는 이 문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웃자고 하는 소리에 죽자고 달려든다고 정색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모든 농담은 그 속에 진지함이나 진실성의 맥락을 안고 있다. 성희롱을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 있는 사고야말로 뿌리 깊은 성차별주의를 실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이 사회가 마초주의로 골병이 단단히 들었다는 증거다.
당연히 논란이 되고 욕을 먹어야 할 일인데 왜 논란이 되느냐는 반발이 나오는 것이 나는 더 어리둥절하다. 쉬운 문제를 어렵게 생각하여 괜한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 비키니 수영복 시위 논란은 별스러운 게 아니다. 진보와 마초스러움을 분별하지 못하는 지식인 남성들이 가진 구조적인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그들은 왜 꼼수를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순진하게스리 밑천을 쉽게 드러내 보이는 걸까. 난데없이 여성인권 옹호자인 척하는 부자언론에 기다렸다는 듯이 뜯어먹히는 꼴은 나도 유쾌하지 않다.
김어준들은 자신들이 본바탕과 다른 모습으로 매도되어 힘들다고 했다. 야박한 말이긴 하지만, 왜 욕을 먹는지 여전히 모른다면 조금은 힘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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