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정치인에게 숨겨진 딸이 있었다는 뉴스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도 남을 터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DJ의 숨은 딸'에 관해서 수근거리는 목소리는 예상에 비해 그리 시끌벅적하지 않다. 사람들은 사실일 리가 없다고, SBS가 선정적인 보도를 했을 따름이라고 믿는 걸까. 나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말이 진실인 쪽이 차라리 김대중에게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정작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덕성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은 DJ와 그 모녀는 서로 어떤 짓을 했는가, 그리고 국정원의 공작이 존재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녀가 김대중의 딸이 맞다고 판명되면 소란스럽기야 하겠지만 어찌어찌 넘어갈 방법이야 있다. 그러나 아니라고 판명되면, 다수가 믿지 않는 가운데 결백을 증명하는 희한한 풍경이 연출될 소지가 높았다. 가령 ‘연예인 X파일’로 떠돈 소문들 중에는 사실도 있고 조작도 있었겠지만 어느 누가 그걸 분별하려고 했던가 말이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랴’는 속담은 한국사회 여론의 장을 좌지우지하는 굵직한 법칙이기도 했다(이에 보태어 “신문(언론)에 났는데!”가 있다).
나는 영남 출신이다. 택리지에 나왔다던 ‘조선인재 영남반재, 영남인재 선산반재’라는 구절을 듣고 자라온 구미 사람이다. 이문열씨 같은 이가 내게 “당신 부모는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물어도 소용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포항 분이고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선대 조상부터 친가와 외가 집안이 모두 경북에 살았다. 숙모나 이모부 같은 분들도 죄다 경북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산경남 사람들의 의식과 성향은 몰라도 대구경북 사람들의 속내는 웬만큼 궤뚫고 있다고 자부한다.
글의 초반에 ‘DJ의 숨은 딸’ 이야기를 꺼낸 건 주변의 대구경북 사람들이 이 문제에 별로 무관심한 듯한 것이 신기해서다. 풀이 죽어서 구석 술자리에서나 뇌까리는지, 숨겨진 자녀에 대한 전설로는 대한민국 특등에 해당하는 박통의 명예를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다시 한번 ‘DJ와 TK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97 대선, 게임의 결과
1997년 12월 19일. 예비신입생으로서 진학할 고등학교에 갔다 오면서 레코드 가게에 들른 나는 귀를 의심케하는 주인 아저씨와 종업원 누나의 대화를 들었다. “김대중 선생(이 단어는 진지하게 쓰였다기보다 농담조로 들렸다)이 대통령됐지?” “(빙긋 웃으며) 그럼요.” “이제 대통령도 바뀌었겠다... 장사도 잘 되겠지.” 아니, 여기 경북 구미 아냐?
잠시 후 버스에 오르며 나는 ‘여기가 경북 구미임’을 확인했다. 버스는 패잔병들이 타고 있는 트럭 같았다. 그러면서 분노와 실망보다는 감정을 추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결코 잘못 본 것이 아니다.”:좀 더 시간을 두고 고향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한 뒤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대구경북인들이 권력에서 멀어지고 있다며 우려한 것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유력인사들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인들은 정주영이 아닌 김영삼을 택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것이었다. 90%까지 지지율을 끌어올린 개혁 드라이브, 구체적으로 사정 정국 속에서 박태준과 박철언 등의 TK 민정계 인사들이 ‘문민의 칼’에 제압당하는 광경에 대구경북 여론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무렵 예산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둥 역정을 냈고 자꾸 대형사고가 터지는 건 “영샘이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그 흐름은 95년 지방선거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는데 신한국당은 대구를 무소속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해 연말 노태우와 전두환이 옥살이를 하게 되자 TK는 펄펄 끓는 솥이나 다름 없었다. 사방팔방에서 “인자는 자민련의 세상이 온데이”라는 주술이 정감록의 예언마냥 들려 왔다. 그리고, 정말로, 이듬해 총선에서, 대구는 “자민련의 세상”이 되다시피했다. 하지만 자민련은 ‘전라도당’ 국민회의와 밀월에 들어가며 TK의 신망을 잃었다.
그러다 터진 한보 사건과 IMF 사태는 TK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지역의 무수한 노동자들이 모진 풍파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TK는 박정희의 망령을 되살리는 동시에 김영삼의 목을 베고 민정계에게 신한국당의 주도권을 쥐어줬다. 자민련이 DJ와 손잡은 마당에 TK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꼬장꼬장한 기 맘에 안든다"고 욕을 먹던 이회창이 김윤환의 후원을 받아 'TK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꼴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97년의 승부에서 할 말을 잃은 것은 결국 'TK정서'였다.
상실감도 상실감이었지만 TK가 감내해야 했던 더 큰 문제는 가치관의 혼돈이었다. 빨갱이, 거짓말쟁이, 절름발이 다리 병신, 상고 나온 놈, 김씨라고 사기치는 뿌리 없는 인간, 대통령병 환자. 이런 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니! ‘TK식 권선징악’의 법칙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김대중에게 호의적이겄거나 적대적이지 않았던 소수의 시민이 아주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레코드 가게에서 들은 대화는 그 신호탄이었다. 당연히, 그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았지만.
잠시 조용하나 싶더니 김대중 정부 초기에 TK 사람들은 '카더라 통신'으로 사고를 친다. 대주주인 벨기에측이 결정한 OB 맥주의 이전을 두가지 이상의 근거도 대지 못한 채 '대중이의 작품'으로 몰고간 것이었다. 한가지 근거는 바로 '그럼 괜히 구미에서 전주로 옮겼겠느냐'는 반문이었다.
뭐 하나 물고 늘어질 건덕지가 없나 헤매다가 잘 됐다며 덤벼드는 패거리들의 장단에 맞춰 한나라당이 구미에 와서 김덕룡이 “영남 사람들 ‘니기미’하고 일어서면 무섭다!”며 기염을 토했고(전북 익산 사람들은 대체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가), 집회를 열었던 공단운동장에서는 민주노총의 깃발도 휘날렸다(‘낮에는 노동조합 밤에는 한나라당’, ‘임금인상 때는 파업하고 선거할 때는 기호1번’?).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구경북에서는 "김대중이 빈부격차를 벌리고 있다"는 짐짓 좌파적인 선동부터 "대구의 아무개 회사가 비리로 궁지에 몰린 건 호남정권의 작품이다"는 음모론이 횡행한다.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이로써 ‘김대중 때리기’는 TK의 역사적 사명으로 완벽히 자리매김하나, 덜 떨어진 자들의 말로는 <아Q정전>에서 읽었듯 처참한 법. 박정희 기념관 국고보조나 밀라노 프로젝트 따위에 침묵하던 TK는 ‘남북정상회담’으로 제대로 한방 먹었다. 나는 그즈음 이제는 좀 안 듣나 싶던 헛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전가의 보도이자 회심의 일격이었다. 40대 초반의 여 선생이 풀었던 사설은 이랬다: “남북의 정상이라 카는 기 하나는 배가 산만해서 뒤뚱거리고 있고, 하나는 다리를 절룩거리고. 국제사회에 부끄럽다.” 그런데 이를 어째, “국제사회”의 유력 기구인 노벨위원회는 DJ에게 평화상을 수여한다.
'DJ 다리' 운운하는 자들은 누가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매번 잊는다. 그들이 일심단결로 대통령직에 앉힌 박정희의 작품이었다. 문제의 교통사고가 우연이었다고 해도 그 고문과 납치는 변명할 길이 없다. 나는 가끔 지인들에게 “그놈들은 몇대 쳐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이야기한다. “몇대 쳐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다름아닌 TK 박통진리교도들의 신조를 그들에게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급기야 나는 때려도 정신을 못 차릴 거라는 냉소로 난폭함을 억누른다.
그들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핍박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들은 사실판단의 오류를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들은 가치판단, 즉 “김대중은 뒈졌어야 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유시민 의원이 시사평론가 노릇을 하며 쓴 <‘97대선, 게임의 법칙>에는 “전두환이 다 잘했는데 김대중을 살려준 것 하나는 잘못했다”는 대구 사람들의 풍설을 전하고 있다. 내가 더 첨언하자면, 절대 이것은 과격한 소수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이성을 잃어 한 말이 아니다. 이는 일종의 ‘역사학적 합의’이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지지를 받는 대구경북의 ‘상식’이다. TK의 노동자들이, 자영업자들이, 지식인들이 얼마나 이 상식을 수호할 의무로 받아들이는는 모르겠으나, 나는 십대 중반부터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 ‘상식’에 도전하면서 -십년지기들과의 대화를 빼면- 나나 상대나 단 한 번도 핏대를 세우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김대중이 국가원수에 맞먹는 정치적 무게를 가진 것은 7대 대통령 선거라고 규정하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당시에 초등학생이었던 어머니는 TV에 김대중이 나오면 종종 옛 이야기들을 들려주신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만치 인기가 좋은 건 알 수가 없었지. 어른들은 맨날 김대중 욕하고, 애들도 선거 벽보 찢고 다녔다. 대통령은 박정희 하나였고 박정희가 죽었다는 건 충격이었지. 이북으로 치면 김일성이하고 안 똑같앴나." '87년에 한번 김대중을 찍어 줄라 카니까 주변에서 "대중이가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를 치더라." 이 정도면 가히 TK의 독기를 짐작할 만하다. 그리도 저주했는데 죽기는커녕 대통령까지 해먹고 아직까지 살아 있어! 속죄양이 된 난신적자 고종석 씨의 혜안에 포착된 것처럼 영호남의 지역대결은 문화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이 중첩돼 있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한다. 나는 경상도 사투리에서 간간히 발견되는 고루한 멘탈리티도 거북하지만 전라도 사투리는 아무리 들어도 귀에 편하게 와닿지 않음을. 그리고 표현이 서툴거나 없어도 겉으로 속을 투시하기에 충분한 경상도 사람과는 달리 뭔가 감추는 구석이 있는 듯한 전라도 사람의 언행(전부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런 경향을 감지되기는 했었다)이 석연찮았음을. 다시 말해 전라도 사람에게서 느낀 문화적 이물스러움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그렇다면 외지인을 처음부터 수상쩍게 응시하는 이 나라 이 사회에서 영남인들이 호남인들에게(호남인들이 영남인들에게) 가진 편견이 얼마나 강한지는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겠다. 더구나 대구경북인들은 자기네가 신라의 주인이었으며 고려와 조선의 주축이었고 선비의 후손인 데다가 대도시 대구도 끼고 있으며 박정희를 길러냈다는 자부심에 가득차 있었다. 반면 김대중은 호남에서 자라나 가방끈도 짧은 주제에 전라도 사투리로 뛰어난 연설을 하고 다녔다. 그런 김대중이 사상이 의심스러운 주제에 박정희의 권력에까지 도전했으니 대구경북에서 그는 ‘난신적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영남 출신인 사이버 칼럼니스트 김동렬씨가 ‘서프라이즈’에 게재한 글에서 나는 “안동 양반, 의성 사람, 군위 것들, 영천 상놈”이라는 재밌는 어구를 발견했다. 대구경북인들끼리의 이질감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투리도 지역별로 크게 다르며(내가 사는 구미도 사투리 종류가 두개로 분류된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지역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서로 우월감에서 열등감을 표출하는 데 열정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하물며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의 차이는 어련할까. 그러나 아무리 성마른 인간이라도 싸움에 지치지 않는 자는 드문 법이다. 분열과 대립을 흥정과 담합으로 매듭짓자는 공감대는 마침내 확산되고, 이때 르네 지라르가 표현한 '속죄양'이 창조된다. 한 부락에서 흔히 기묘하고 고독한 인간 하나가 돌팔매를 맞거나 마을의 평화를 위해 처녀가 괴물에게 바쳐지듯 속죄양은 공동체 내부에서 설정될 수도 있지만,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인해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골드스타인처럼 외부자가 속죄양으로 지목받기 쉬워졌다. 소백산맥 너머의 김대중과 호남인은 영남 공동체의 평화와 결속을 위한 속죄양이었다.
김대중이 100 중에 51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것도 영남인들의 공격 욕구를 부추겼을 것이다. 지역구도는 (메틀 밴드인 ‘블랙홀’의 제목을 빌자면) ‘1대4의 갈등’이었다. 서울에서 그가 적이 지지를 얻어도 영남은 “김대중이 찍는 서울내기들은 상경한 전라도놈들이라 카더라”는 마타도어로 방어할 수가 있었다. 강남을 비롯한 수도권 일부지역이나 충청강원의 ‘DJ혐오’도 끈질기진 못했을망정 정도가 크게 덜하진 않았다. 그리하여 김대중은 대한민국 전체의 속죄양이 되었다. 너거는 남이다.
과연 TK는 DJ에게 이겼는가. 개발독재의 추한 진면이 드러나는 정도와 비례해 DJ 햇볕정책의 역사적 의의는 뚜렷해질 것 같다. 반면 논리가 안되어 힘으로 밀어붙이던 TK는 이제 힘마저 상실했고, 말수를 줄이고(이것은 탄핵 직후 20%도 넘지 못한 한나라당 지지율이 개표 결과 35%가 된 비결이다) 귀를 틀어막기나 한다. 이 낙오한 TK를 진보진영이나 개혁세력은 어떻게 대할 것인가. TK의 지역주의는 세가지의 결합물이다. 첫번째는 '우리 사람'을 챙기는 연고주의다. 두번째는 패권주의다("김윤환을 살리다가 대중이 이로운 짓하느니 타향인인 이회창을 돕겠다"). 셋째, 수구이념이다. (* 한나라당의 당내 갈등도 이와 연관지을 수 있다. 영남권과 수도권의 대립은 연고주의의 충돌이다. 무리를 해도 분당은 불가능하니 한나라당의 신주류로 올라서려는 투쟁을 벌이겠다는 심보는 ‘패권주의’에 기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영남을 지키려면 “보수색”을 강화해야 한다는 부류는 ‘수구이념’을 좇은 셈이다.)
열린우리당은 영천에 민정당 출신 인사를 공천하여 두가지를 얻었다. 하나는 승산이고 하나는 개혁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난이다.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전국정당으로서 단기간에 TK에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한다면 개혁의 원칙 따위는 내팽개치는 게 맞다. 반대로 개혁세력으로서의 진정성을 높이려 한다면 지는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열린우리당이든 민주노동당이든 제 정신이라면 TK를 포기하라. 대신에 TK의 '반골'들을 안고 가야 한다. TK가 다른 지방보다 비교적 인구도 많고 땅도 넒다는 점은 호남보다 여론의 분화가 용이하다는 걸 방증한다. 실제로 TK의 최근 투표행태는 '몰표'라고 일축하기는 힘들었다. TK의 반골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기성세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다가 그들의 전근대적 태도와 등지게 된 자생적 반골이 있고, 대학 진학 등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수도권 등지에 살면서 TK정서를 반성하게 된 반골 유학파가 있다(필자는 두 부류 모두에 속한다). 그리고 소수이지만 서민이 먹고 사는 데에는 뭔가 다른 정치적 자세가 요구된다고 깨달은 계층계급적 반골이 있다. 이 반골들에게 지역내 소수자로서 활동할 에너지 그리고 다른 지역과의 연대할 기회를 주는 중장기적 기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고향과 고향 사람을 힐난하는 필자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럼에도 TK의 반골들은 소리쳐야 할 것이다. TK스러운 것들, 너거는 남이다! 추신: 95년 민주당 분당 때 중학생이라 잘은 모르지만 도의에도 어긋나고 역사에도 불행한 사태라며 DJ를 맹비난하고 다녔던 내가, 고등학생이라 자세히는 알 수 없어도 김대중이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것은 확실하다고 큰소리쳤던 내가, 졸지에 김대중을 조금도 비판하지 않는 글을 쓰게 되었다. TK 지역주의에 이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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