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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꼬뮨의 지평, 혁명의 스티그마타(聖痕)
[책동네] 바쿠닌에서 반세계화시위까지 열정 그려낸 ‘아나키스트의 초상’
 
벼리   기사입력  2004/10/26 [06:28]
우리가 아나키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것일까? 
 
▲아나키스트들의 삶과 투쟁의 모습을 적나라하고 감동적으로 스케치한 '아나키스트의 초상'(폴 애브리치 저, 하승우 역)     © 갈무리출판사, 2004
맑스가 『바쿠닌주의자들의 활약상』이라는 짧고도 다소 경멸적인 문체로 씌여진 논문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그것은 무모함과 열정의 묘한 결합이며, 그래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음모적 사상이다. 그렇다면, 맑스가 또한 초기 아나키스트인 블랑키의 사면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또 무엇이며, 인터네셔널 본부에서 아나키스트와 바쿠닌을 제명시키기 위해 중앙위원회의 권력을 절망적으로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무엇인가?

 
좌파의 시각에 이러한 의문은 항상 미결인 채로 남겨져 왔다. 때로는 고의로, 때로는 교조적이라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에게 있어서 대결해야 할 상대는 맑시스트들이었다기 보다, 맑시즘이 단일한 권력중심체의 이데올로그들을 양성하고, 그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와 반역적 민중들의 해방 역량을 도구화하는 바로 그 행태와 조직적 시도였다. 따라서, 맑스가 정당하게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듯이 크로포트킨은 스스로 우상(idol)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국가도 없고, 황제도 없다" 
 
▲지금까지 모든 혁명에서는 아나키의 깃발이 펄럭였었다     ©벼리

폴 애브리치는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삶과 투쟁의 모습을 적나라하고 감동적으로 스케치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실행에 의한 선전' 그리고, '직접행동(direct action)'이라는 이들의 전략은 아나키스트의 삶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어째서 '폭풍'이라는 비유가 적절한지를 말해 준다. 그들 대부분은 한 권의 완성된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항상 당대 반란의 중심으로 달려 들어갔다. 실행과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혁명과 반역이라는 신성한 땅에 단 한 뼘도 다가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바쿠닌은 맑스의 적대자라기 보다 그를 항상 전면으로 밀어 부치거나, 스스로의 지적 역량을 혁명적인 당대성으로 벼루어낼 수 있게 해준 시니컬한 동지에 가까워 보인다. 『프랑스에서의 내전』은 바쿠닌이 철의 신념으로 피의 한 가운데에서 활동하면서 일러준 그 직접행동의 고귀함이 없었다면, 쓰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맑스가 초기의 부정적 판단을 수정하고 빠리꼬뮨을 긍정했을 때, 바쿠닌은 아마 맑스의 이 뛰어난 저작 이후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을 터이다.

 
네차예프와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부분은 흥미롭다. 네차예프라는 이 인물을 기화로 바쿠닌이 인터네셔널에서 제명될 때까지, 애브리치는 그 둘의 애증을 서간과 주위의 증언들을 토대로 실증적으로 엮어 낸다. 결과적으로 바쿠닌은 그 자신의 신념을 무엇보다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네차예프라는 인격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바쿠닌 자신의 화신이었고, 폭력과 아방가르드적 기질에 있어서 그를 앞섰으며, 혁명운동을 음모적인 범죄로 이끌어 가는 과감함에 있어서는 그 자신의 기대를 초월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음모가 아니라 범죄다. 애브리치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부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바쿠닌이 순수한 희생자인 것만이 아닌 것과 같이, 네차예프가 혁명운동에 얼마만한 해악을 끼쳤는가 하는 것은, 그의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인정함과 아울러 가차없이 비판되어야 한다. 그는 동지를 모함하여 죽인 범죄자이며, 거짓선전으로 운동의 도덕성을 훼손한 사기꾼이었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할, 오직 유일해야만 하는 인격이었다.   
 
▲아나키스트의 문장     ©벼리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혁명에 있어서 현명한 의사의 처방과 같다. 전쟁에서 연합국의 손을 들어 주었던 순진함을 제외하고서, 크로포트킨의 인격과 주장은 아나키즘에 대한 어리석은 오해를 불식시킬만 한 것이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폭력은 '정당하게' 긍정되어야 한다. 누구에게? 황제의 군대와 부르주아의 사병들은 여기서 완전히 그 권리를 상실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빈자들에게 폭력이다.
 
빈곤, 기아, 도덕적 황폐, 알콜중독, 금전으로 인한 모든 범죄는 자본주의라는 악마의 쟁기질로부터 싹터온다. 아나키즘의 폭력은 이 폭력들에 비한다면 참으로 절망적이며 사소하다. 크로포트킨이 개인적인 암살과 폭력의 절망적 특성에 연민을 느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절대화하지는 말자. 그 길은 아나키즘의 협동공동체로 나 있지 않으며, 무자비한 테러리즘의 벼랑과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나키스트들의 초상 외에도 애브리치는 진지한 시선으로 다른 아나키스트들을 다룬다. 엠마 골드만과 베르크만 그리고, 플래신, 슈타이머와 플래밍을 비롯해서, 이들의 삶은 마치 감옥을 전전하는 성자와 같다. 깊은 도덕성과 혁명운동에의 헌신을 묘사함으로써 각각의 장들은 이 인격들 각자의 북소리로 공명을 만들어 내고 있다. 거대한 북소리. 그 북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애브리치가 그려 놓은 아나키스트들의 초상은 역자가 강조하고 있다시피, 죽은 자들의 초상이 아니다. 우리는 68년 낭떼르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전세계를 순환했던 투쟁의 열렬한 주기 또한 간직하고 있다. 빠리꼬뮨에서 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을 거쳐 최근의 반세계화 시위에 이르기까지, 투쟁이 드러내는 열정의 핵심은 언제나 아나키의 심장에 맞닿아 있다.
 
직접행동과 실행에 의한 선전, 그리고 모든 중앙화된 권위와 권력을 부정하는 꼬뮤니즘. 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반역의 고귀함이 그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아나키의 심성을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드러난 아나키스트들의 초상은 투쟁의 순환 주기 속에 수백, 수천만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얼굴에 반복해서 나타날 것이다. 다름 아닌 그들이 바로 '여기/지금' 아나키스트들이며, 바로 그들이 지난 혁명의 성흔(聖痕, Stigmata)을 '여기/지금' 일구어내는 아나키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꼬뮨의 지평 안에 아나키는 영원하다. - NomadIa


[추천사이트] 갈무리 출판사 http://galmuri.co.kr/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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