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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은 시대적 요청
생명 창조 시대의 자기 경영 22
 
이동연   기사입력  2003/11/22 [11:45]

과학은 고도로 발전하고 있으나 아직 인류의 사상은 기원전 6세기- 기원후 5세기의 틀을 크게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

▲성경
세상에서 제일 많이 팔렸다는 '성경', 마인드 컨트롤의 최고 서적이라는 평을 듣는 불교의 '슛타니파나', 한자(漢字)문화권인 동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 , 월남 등-를 서양은 물론이요, 서남 아시아와도 구별된 사상을 가지게 만든 유가(儒家), 서양 기독교와 문명충돌의 대척점에 서서 지구상에서 제일 많은 인구를 지닌 이슬람인들 을 묶어 놓고 있는 이슬람의 코란 등의 발생 기원이 모두 저 기원전과 기원 후의 사이에 있다.
 
어떻게 기원 전· 후를 통해서 이처럼 거대한 사상의 에너지가 전 문명권에서 일시에  분출될 수 있었을까?  그 까닭을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동시 다발적 사상분출의 첫 번째 이유는  교통의 발달이다. 중앙 아시아와 서 아시아의 유목민들이 말을 타기 시작한 이후 점차 승마(乘馬)가 확산되어 문명들간의 교통이 빈번해지면서 지적 자극이 촉진되었다.
 
다음은  유유자적해야 하는 사상가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생겼다.  무기에만 사용되었던 철을 농기구로 사용하면서 농업 혁명이 일어 났다.  황무지들이 소가 이끄는 쟁기로 개간되었으며, 운하가 건설되고 관개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부가 엄청나게 증식하였다.   
 
또한  전통이 붕괴되어 가면서 인간들은 '인생과 자연의 근원'을 의식적으로 물으며 이 물음과 씨름하게 되었다.  거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시들이 발달하면서 '사회와 조직', '천명(天命)과 계층'의 의미를 통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물음들은 문명 세계들이 동시에 제기였으나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문명마다 각기 달랐다.  
 
지금 서방 문명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수메르, 이집트 문명은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지중해 문명으로 합류하였다.  지중해 문명은 다시 인더스 강 유역에서 탄생해 번져나간 서 아시아 문명과 조우하면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으로 양분되었다.

인더스문명은 지중해 문명에도 영향을 끼쳤으나 동시에 동아시아의 문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21세기의 대안문명으로 동양과 서양에 다 같이 영향을 끼친 인도 문명을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중해 문명, 즉 서양 문명과 동아시의 문명은 그 거리만큼이나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발전해 왔다. 형언할 수 없으리만큼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과 타림 분지, 끝없는 사막이 한자 문명권과 타 문명권의 교류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자 문명권에서는 인간과 사회에 주목하는 문화로 서방 문명권에서는 신과 내세를 강조하는 문화로 발전해 왔다. 
 
21세기의 문턱에서 우리는 또 다시 저 기원의 세기와 같은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그다지도 기원의 세기와 현대의 시대적 조건이 비슷할까? 오히려 그때보다도 더 격렬한 변혁의 몸살을 우리는 앓고 있다.  

기원의 세기에 도보로 다니다가 겨우 말만 타도 크나큰 교통의 진보라 일컬었다면 지금의 교통발전은 과연 무어라 표현해야 되는가? 

농기구의 발달로 농경지가 확대되어 농산물이 늘어난 그때를 경제 혁명이라 불렀다면 농산물 뿐 아니라 모든 공산물이 과잉공급의 시대인 지금은 어느 시대라 규정해야 되는가? 
  
기원 시대에는 아무리 전통이 허물어진다고 해도 기존의 사회질서는 유지된 상태였었다. 지금은 지배 엘리트 자체가 뒤죽 박죽이 되고 엘리트란 말 자체가 무색해 지는 시대이니  전통이 허물어 지는 정도를 넘어서서 전통, 그 단어 자체를 역겨워하는 때가 되었다.
 
아직도 인류가 기운시기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면 단지 관습 때문이지 내심은 새로운 사상, 생명 창조의 단계에 이른 세기적 문명에 어울리는 사상을 갈망하고 있다.

그런 사상이 나오기까지는 과거의 사상들이 일시적 중심담론을 형성하기는 하겠으나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일종의 분파(sect)로만 남을 것이다.    

이미 새로운 사상이 태동될 시기는 무르익고도 무르익었다. 보리수 아래의 부처, 광야의 예수, 동굴 속의 마호메드의 가르침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이 출현될 역사적 분기점에 우리는 살고있다.
   
혹 사상가가 되고 싶은가? 그러면 저 축의 시대에 인류의 문화를 분할 점령하여 지금까지 지배하던 사상가들의 행적을 우선 따라 가라.저들은 기존의 사상을 우선 충분히 습득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는 않았다. 즉 부처는 힌두교와 인도의 재래 신화을 철저히 이해했고, 예수는 유대교와 중동신화를 충분히 섭렵했다. 마호메트도 유대교와 고대 아랍 신화들을 다 알았다.

그후에 그들은 과거의 사상들을 넘어서서 변화해 가는 세계를 예측하면서 한 발 앞선 새로운 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즉 과거 유산의 상속자나 과거 인물의 추종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나름의 독창적 사상을 설파해 나갔다. 당연히 반대자도 많았으나 그 반대자와의 논쟁을 통해서 더욱 자신들의 사상을 확립하고 정립해 나갔다. 그들의 제자들은 스승이 죽고 난 후 스승들을 인류의 구세주로 격상시켜 민중들에게 전파해가며 자기 교단을 넓혀 갔다. 그 바람에 오늘까지 기원시대의 사상가들이 동서양을 쥐락 펴락하고 있다.  

일단 존경하는 추종자 그룹이 생기면 그 사상가는 점점 신비한 인물로 승화되어 간다. 추종자들은 스승이 죽고 난 후에는 더 더욱 스승의 좋은점과 기이한 면만을 확대 재 생산해서 거의 신적 수준까지 높인다.

실체는  없고 이미지만 남은 스승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수록 그 스승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반사이익을 더 챙기데 된다.  

그러나 오늘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포퓰리즘적 세상에서는 아무리 탁월한 사상가라고 구세주의 자격을 획득하기는 어렵다. 구주(救主)와 사상가는 다르다.  구주는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보통사람들의 삶에 지침을 줄 수 있으면 구주다. 구주는 일종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원로와 같은 수준이다. 따라서 구주는 사상가의 차원을 넘어서서 완벽한 인품과 박애 정신, 희생과 청빈으로 충일 해야 하며 자신의 사상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

이 사회에 원로가 없다고 한다. 자칭, 또는 언론과 지도층들이 옹립하며 원로 운운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원로들의 언론용 멘트와 개인의 소유, 개인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온 국민적 지지를 받는 원로가 없다.
  
특히 포퓰리즘의 시대에 와서는 일부가 원로라고 추천한다고 원로가 되는 게 아니다. 전체모두의 지지는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정감과 공감을 얻는 사람이  포퓰리즘 시대의 원로 가 될 수 있다. 21세기는 포퓰리스트들의 시대이다.   그러면 건전한 포퓰리즘과 바람직한 포퓰리즘의 모습은 어떤 모양일까? 다음에 계속한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강화도 : 미래신화의 원형]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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