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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비운의 주인공에서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임진수   기사입력  2012/12/20 [04:24]
1952년 대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이에 첫 딸로 태어난 박근혜 당선인은 11살 때인 1963년 아버지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성심여고를 졸업한 뒤 산업역군이 돼야겠다는 각오로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1974년 어머지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숨지면서 반년 만에 귀국해 이때부터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을 산다.

박 당선인은 “어머니가 흉탄에 돌아가신 후,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빈자리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 때문”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1979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마저 암살되면서 그는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흉탄에 숨지는 비련의 주인공이 된다.

이후 18년의 기간은 박 당선인에게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자 지금의 대통령 당선인 박근혜를 있게 한 단련의 시간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는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권으로 들어온 것은 IMF로 인한 경제위기가 계기가 됐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를 잃는 또 다른 고통과 아픔을 겪고, 저는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땀과 눈물로 이룩해 온 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무너지고, 국민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지켜볼 수만 없어 정치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 당선을 시작으로 차곡차곡 정치경력을 쌓기 시작한 박 당선인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일명 차떼기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한 당의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50석도 채 건지기 힘들다는 총선에서 121석을 얻은 박근혜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로 떠오른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그였지만 지난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 괴한이 휘두른 커터칼에 얼굴에 상처를 입는 테러를 당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테러로 잃고 자신도 같은 일로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긴 수술 뒤 깨어나자마자 꺼낸 한 마디 ‘대전은요’는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박근혜에게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당내 경선이 곧 당선이라는 지난 2007년 대선 경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하며 첫 대선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경선 패배를 인정한다.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 오늘부터 저는 당원의 신분으로 돌아가서 백의종군 하겠다”는 박 당선인의 당시 연설은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경선 승복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총선에서 소위 친박계에 대한 공천학살에 이어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거듭되면서 조용히 칩거생활에 들어갔던 박 당선인은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씩 키우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과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이 불거지면서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맞서는 여당내 야당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명확히 한다.

정권말기에 접어들면서 정권교체 요구가 거세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관위 디도스 공격 등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은 다시 한번 박 당선인에게 손을 내민다.

재등장한 그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경제민주화를 도입하는 등 당의 체질을 바꾸면서 다시 한번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총선 승리를 당에 안겨줬다.

박 당선인은 총선 승리 감사 기자회견에서 “여기서 또 다시 과거의 구태로 돌아간다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는 각오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겠다”고 당 개혁 의지를 불태웠다.

이렇게 당을 또 한번 위기에서 구한 그는 지난 8월 치러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8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된다. 하지만 상쾌한 출발만큼 대선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박근혜는 인혁당 두개의 판결 발언을 비롯한 과거사 논란, 정수장학회 처리 문제, 그리고 당 쇄신파의 인적쇄신 요구 등으로 대선 후보로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특히 과거사 논란과 관련해서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들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수 없음은 과거도 그렇고 앞으로 그렇다. 이로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과 그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고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여기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바람으로 지난 몇년 간 이어져오던 박근혜 대세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꺽이면서 최대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정치공학적 해법을 배제하고 정공법을 택한 박 당선인은 100% 국민대통합, 준비된 여성대통령, 민생대통령 등 박근혜이기에 가능한 캐치플레이즈를 내걸고 승부수를 띄웠고 그 결과 과반수 지지라는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사상 첫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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