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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체제' 껴안고 산화한 盧 전 대통령
[정문순 칼럼] 인간 노무현의 결기 앞에 우리네 삶이 구차하고 부끄럽다
 
정문순   기사입력  2009/05/28 [14:12]
고인이 떠난 뒤에 가까운 발치에서 그의 언행을 접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 풀어놓는 일화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생전에 고인을 지척에서 접한 적도 없는 나는 그런 추억거리를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부산에서 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옷깃을 스쳐가는 인연이 없을지라도 먼 발치에서라도 고인을 접할 수 있는 일은 흔했다. 최루탄이 터지는 현장에서 띠를 두르고 맨 앞줄에서 전경들과 대치해 있거나, 시민단체 행사에서 재간 있는 연사로 등장한 그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운동권 사람들은 제도 정치권 인사에게라면 여야를 막론하고 거부감을 느꼈지만 고인한테 만큼은 드물게 친근감을 느꼈다.  

내가 고인과 생전에 알고 지냈다면 아마 그를 싫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인의 정치적 태도가 내가 추구하는 것과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큰 틀에서 삶의 지향점이 일치하는 사람이라도 각론에서 공감할 수 없는 경우, 이를 테면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차원에서 인간 됨됨이에 실망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 2006년 8월 27일 비공식 면담 중 눈물 흘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     ©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흔히 개인의 본질적 부분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기 쉬운, 내용으로 담아낼 수 없는 고인의 몸에 배인 스타일과 개성에 이끌림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보수언론이 시정잡배의 말버릇이라고 욕질을 했던, 진보 진영에서조차 점잖지 못하다며 경계했던 고인의 거침없는 말투만큼은 나는 역겹지 않았다. 자신을 평범한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려 놓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격이 서민으로 떨어질까봐 남들의 눈과 귀가 있을 때는 고상한 표현을 즐긴다. 그에 비하면 “조중동이 나를 조진다.”, “대통령 못 해먹겠다.”, “군대 가서 몇 년씩 썩는다.” 등의 ‘잡배’다운 표현이 청와대에서 흘러나올 수 있을 때 대통령은 더 이상 높은 자리에서 허세와 권위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최루탄이 시위대를 겨눈 시대에 사망한 노동자를 돕다 영어의 몸이 되기까지 했던 고인은, 자신이 집권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탈바꿈한 것이 사실이다. 고인은 약자가 죽음을 통해 세상에 보낸 절규에 대해 냉소적인 언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가 즐겨 말하는 개혁 안에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은 없었으며, 나의 눈에는 악마와 다름없이 보이는 시장에 그는 머리를 조아리고 최고 권력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망각하고 숭배를 바쳤다. 약자의 생존권을 시장과 자본에 넘겨주기 위해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를 방패로 때려죽일 수 있는 노무현 체제를 나는 미워했지만, 허위와 가식이 없는 인간 노무현한테만큼은 끝내 애틋함을 거두지 않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기득권 세력의 견고한 아성에 도전하다 끝내 그 자신이 기득권에 녹아들어가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필리핀의 에스트라다, 대만의 천수이벤 정권의 말로가 생각 난다. 모두 부패 척결과 개혁을 내걸었고 서민의 열광적 지지를 업고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빈민의 우상이었던 에스트라다는 부패 혐의로 쫓겨났고, 천수이벤은 퇴임 후에 친인척과 자신의 비리가 뭉텅이로 드러나 정치적 파산 선고를 맞았다. 범을 잡겠다고 범 소굴에 들어갔다가 범의 무리에 물들고 마는 것이 정치의 공학이요 생리라면 노무현 체제도 변명할 수 있는 말이 없지 않을 터이다. 주류 세력의 벽은 워낙에 난공불락으로 견고했고, 수구 언론은 노무현 정권을 얼마나 물어뜯었던가. 반 세기가 넘게 다져온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을 5년 만에 뒤집는 것은 애초에 불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낡은 체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자부했고 그것을 자산으로 삼아온 인물이었다. 정권을 넘겨주었을망정 범 소굴에 들어간 당당함이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퇴임 후의 당당함과 여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 자신의 도덕성이 부인되는 상황은 자신의 근거를 뿌리채 부정당하는 것이기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세운 기치가 허위라는 오명에 휩싸일 때 선택할 길은 달리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적당한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는 길을 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임 중 독직과 부패 혐의가 낱낱이 드러나자 정적을 터무니없이 모함함으로써 궁지를 모면해보려고 발버둥쳤던 천수이벤 같은 사람과도 달랐다.  
 
▲ 지난 27일 시민사회단체 주최로 서울 덕수궁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진행된 '시민추모제' 모습.     © 대자보

서거 소식을 접했을 때 충격을 가다듬기 위해 그것과 비슷하게 충격을 받은 일을 떠올린다. 꼬박 30년 전에는 한국 정치사에서 최대의 사건으로 꼽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이 있었다. 30년을 사이에 두고 최고 권력자와 한때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의 비극적 최후가 반복되는 것은 3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있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전직 대통령의 비극은 그 자신이 몽땅 떠안아야 하는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제 와서 그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노무현 체제의 고통과 어려움을 자신의 한 몸을 던져 혼자 짊어지려고 했던 고인의 넋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기득권과의 싸움이 불철저했고 경제적 약자를 배제한다는 측면에서는 주류 질서를 크게 거스르지 않았던 노무현 체제를 실패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어서라도 그 체제에 대한 도덕적 파탄 선고를 막아내고자 했던 인간 노무현의 결기 앞에 무너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표변과 변절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시대, 그의 숨이 다한 자리와 비교하면 죽고 나면 한 줌 재로도 남지 않을 헛된 이익과 욕심에 집착하는 우리네 필부필녀들의 삶이 구차하고 부끄럽다.

덧붙임) 한 사람의 목숨이 사멸함은 우주의 소멸과도 같은 것. 사람의 죽음에 누가 더 중하고 덜 중한지 중량을 잴 수는 없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와 비슷한 시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산화한 화물 노동자 고(故) 박종태 열사를 추모한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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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28 [14:1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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