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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쟁력, 한국적 사회진화론 다시보기
[강준만의 세상이야기] 약육강식·우승열패·적자생존이 판치는 한국사회
 
강준만   기사입력  2009/12/29 [03:37]
허버트 스펜서의 ‘부자 옹호론’

1883년 미국 뉴잉글랜드 공장 직원의 5분의 2가 7~16세의 어린이였으며, 이들의 노동시간은 아침부터 저녁 8시까지였다. 그러나 이런 어린이 노동 문제는 별로 부각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시기엔 ‘부자 예찬론’이 미국 사회를 휩쓸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조성에 기여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1882년 가을 미국을 방문한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다. 그는 영국에선 점차 외면당하고 있었지만, 미국에선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왜 그랬을까?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영국을 거쳐 이젠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스펜서는 1851년 『사회정학(社會靜學: Social Statics)』, 1855년 『심리학 원리』, 1862년 『제1원리』, 1864~1867년 『생물학 원리』, 1873년 『사회학 연구』, 187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여러 권으로 된 『윤리학 원리』, 『사회학 원리』, 1884년 『인간 대 국가』, 1904년 『자서전』 등을 출간했다. 그는 이미 1850년대부터 『사회정학』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생물학의 원칙을 통해 자유방임주의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명성을 누렸다.

일련의 저서를 통해 스펜서는 빈부격차의 심화는 사회 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며, 기업의 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종(種)의 자연적 진화를 막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도움을 주는 것은 인류의 진보를 심하게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발전 정도가 가장 뒤떨어진 자를 배제하는 동시에 살아남은 자에게 끊임없이 시련을 가함으로써 생존의 조건을 이해하고 또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진보를 확실하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거야말로 부자들이 반겨 마지않을 복음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라지 않은가.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편했겠는가.

▲ Spencer Herbert (1820.4.27~1903.12.8)     ©<네이버> 인물검색
코저(Coser 1978)는 “지금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욱 적합한 존재라고 보는 그의 학설은 이 시대의 탐욕적 개인주의를 정당화시켜 주었고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교육받은 대중들의 마음속에 호소력을 상실해버렸던 이 시대에 성공을 향한 정력적 추구를 합리화시켜 주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펜서주의는 벤담주의보다 훨씬 더 탐욕적 개인주의의 정당화에 봉사하였던 것 같다. 벤담의 사상도 개인주의를 주장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회계약에 있어서 법률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펜서주의는 어떤 형태의 법률적 간섭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전체 복지와 환경에 대한 최적의 적응을 손상시킨다 하며 거부하였다. 그는 열심히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그의 그러한 행위로 인해 의식적이지는 않더라도 인류 전체의 최대 행복과 그 진화적 발전에 공헌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변명을 제공해주었다.”

이어 코저(Coser 1978)는 “스펜서의 가르침에는 빅토리아 시대 중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사고 분위기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이 드러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반적으로 유익한 사회법칙의 작용을 나타내주는 그의 진화론은 최근의 또는 좀 더 먼 사회변동을 설명하고자 하는 갈망을 채워주었다. 이와 동시에 이 이론은 인류의 미래는 영원히 상승하는 것이며 지속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1870년대의 경제적 위기와 노동자의 동요가 시작되자 빅토리아 중기의 낙관주의는 사라지게 되었고 스펜서의 학설도 내리막길에 서게 되었다. …… 그러나 영국인이 그에게 등을 돌림과 때를 같이하여 열심히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대중인 미국인들을 얻게 되었다.”

윌리엄 섬너의 ‘부자 옹호론’

미국은 영국과는 달리 여전히 급성장하는 사회였기에 사회진화론은 적어도 부자들이나 부자 지망생들에겐 큰 매력이 있었다. 스펜서의 저서는 1860년부터 1900년까지 미국 내에서 약 50만 권이 팔렸는데, 이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수백만 권에 해당한다. 존 D. 록펠러나 J. P. 모건 등과 같은 거대 부자들이 ‘가난에서 부유함으로(from rags to riches)’의 본보기로 부각되면서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결함 때문이라는 사상이 풍미했다.

‘미국의 스펜서’라 할 미국의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자는 예일대 교수 윌리엄 섬너(William Graham Sumner, 1840~1910)다. 엄격한 청교도인 섬너는 2년간 목회를 한 뒤 1872년 예일대 정치학 및 사회과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대표작으로는 『사회계급들이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것(What Social Classes Owe to Each Other)』(1883), 『사회적 관행(Folkways)』(1906) 등이 있다.

특별한 창조라고 하는 종교적 교리를 포기하면서 확신에 찬 진화론자가 된 섬너는 노골적인 ‘부자 옹호론’을 폈다. 그는 “백만장자는 자연도태의 산물”이며,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선정된 사회의 대행자로 보는 것이 마땅하며, 그들의 존재는 사회적으로도 이로운 것이라고 단언했다. 당면한 사회문제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거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진보를 이룩할 수는 없다고 믿은 섬너는 “석판과 펜을 들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청사진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오류이다”라고 주장했다.

섬너는 『사회계급들이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것』에서 “평등을 향한 열망은 질투와 선망의 소산이다. B에게 주려고 A에게서 강탈하는 것 빼고는 그 열망을 만족시킬 방안은 없다. 따라서 그러한 모든 안은 인간 본성의 지극히 비열한 악덕을 조장하고, 자본을 쇠퇴시키며, 문명을 전복시킨다”며 개혁가들을 공격하고 나섰다.

“기존 계층들 간에 이미 배분된 재산들을 재분배하려고 애쓰는 대신, 기회를 늘리고 다양화하여 확대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문명화의 과제이기도 하다. 지나간 모든 잘못이나 폐해를 없앰으로써, 사회의 완전히 새로운 동력에 새로운 발전 기회를 터줄 수 있다. 교육이나 학문, 예술, 정부 분야의 모든 향상은 세상 사람들의 기회를 확대시킨다. 이러한 확대는 평등의 보장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가 있으면 어떤 사람은 그 기회를 열심히 활용하여 득을 볼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기회를 소홀히 하여 전부 날려버릴 것이다. 따라서 기회가 많을수록, 이 두 부류의 자산은 더욱 불평등해지게 된다. 모든 정의와 올바른 이성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외면해도 좋다는 것인가? 섬너의 답은 이렇다. “인간의 삶에 따르는 고통은 자연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을 통해서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고통을 받는다 해서 그것을 이웃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누구도 남에게 도움을 청할 권리가 없고 또 어느 누구도 타인을 도와야 할 부담을 지지 않는다.”

사회진화론과 캘빈주의의 결합

이른바 ‘개인 책임주의’ 사상이다. 섬너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에 의한 ‘자연적 독점(natural monopolies)’에는 찬성하지만 보호관세나 제국주의 정책에 의한 ‘인위적 독점(artificial monopolies)’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그 경계가 명확한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아니 섬너는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존 D. 록펠러는 “내 돈은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섬너는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는 예일대 학생들에게 “워싱턴이 나라 전체에 정치적 섭리를 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몫을 정치경제학적 법칙에 따라 훨씬 더 잘 수행해왔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어찌 부자들이 섬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섬너의 이론 자체는 꼭 부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브링클리(Brinkley 1998)는 “사회적 진화론은 주식회사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들의 성공을 정당화해주고 그들의 덕목을 강화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적 진화론은 자유와 개인주의라는 미국의 전통적인 사상의 맥락에서 그들의 활동을 자리매김하였고 또한 그들의 전략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사회적 진화론은 대기업 중심 경제 현실과 많은 관련이 있는 이념은 아니었다. 동시에 기업가들은 경쟁과 자유시장의 덕목을 찬양하면서, 자신들을 경쟁에서 보호하고 시장의 자연적 기능을 자신들의 거대한 기업 연합의 통제로 대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스펜서와 섬너가 찬양하고 건전한 진보의 근원이라 불렸던 사악할 정도로 투쟁적인 경쟁은 사실 미국 기업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또 권용립(2003)은 “사회진화론이 당시 미국의 사회사상으로 자리 잡은 까닭을 자본주의 팽창기에 수반되는 자유경쟁과 약육강식의 현실을 정당화시키고 개인주의 정서를 강화시키는 데 적당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설명해서는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진화론이란 것은 다윈이 말한 생물 세계 내에서의 적자생존, 자연도태, 약육강식, 그리고 변화의 점진성을 인간사회까지 지배하는 보편법칙이라고 연역해낸 것인데, 이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냉혹한 관계로 보는 캘빈주의 정서에 직결된다. …… 구체적으로 캘빈주의가 현세적 삶의 전형으로 보는 근면, 검소, 절약의 윤리는 나태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류의 도태를 자연법칙으로 보는 사회진화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고, 또 캘빈주의의 근면 관념은 자연히 ‘개인주의적’ 성공에 대한 신념을 동반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진화론은 19세기 말에 유행했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쇠퇴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이 쇠퇴하였다면 신자유주의의 득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갤브레이스(Galbraith 1995)는 “아무도 스펜서나 섬너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아직도 부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거지에게 자선을 베푸는 행위를 억제시키고 있다”고 경고한다.

▲ 유길준     © ©<네이버> 인물검색
김병곤(1996)은 “만약에 이러한 이론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사회의 진화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능력의 유무라는 하나의 명제 속으로 갇혀 그 방향성이 고착되고 만다”며 “이 이념 속에서 자유주의의 고유한 가치는 유산자의 재산 축적의 자유가 되고, 부의 불균등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결론이 도출된다”고 비판한다.

유길준의 사회진화론

사회진화론의 주창자인 스펜서 자신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로서 제국주의에 단호히 반대한 인물이었지만, 1870년대 이후 사회진화론은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는 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주장함으로써 제국주의의 정당화에 기여하였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조차 식민주의를 문명화의 사명으로서 정당화하는 관점에서 “잉글랜드의 죄악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은 아시아에 근본적인 혁명을 가져오는 데 역사의 무의식적인 도구가 되었다”며 제국주의에 지지를 보냈다. 이와 관련, 염운옥(2004)은 “다윈의 생물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사상가들에게서는 자유방임주의, 제국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나타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진화론의 중심 개념은 맬더스의 인구론에서 나온 ‘생존투쟁’과 스펜서가 처음으로 사용한 ‘적자생존’인데, 이 두 개념의 적용범위가 개인인가 집단인가에 따라 자유방임주의와 결합하기도 하고 민족주의․제국주의와 결합하기도 하는 것이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개체․개인 간의 경쟁에 주목한 자유방임주의적 이론이었고, 키드(Benjamin Kidd)와 피어슨(Karl Pearson)의 경우는 집단․민족을 단위로 두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제국주의 이론을 뒷받침했다.”

사회진화론은 다양한 경로를 거쳐 조선에도 수입되었다.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1875)은 사회진화론을 국가 간의 생존경쟁에 적용시켰으며, 이는 유길준을 비롯한 조선 개화기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섬너의 주도하에 사회진화론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시기에 윤치호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윤치호의 일기에 스펜서가 등장하는 걸로 보아 윤치호도 사회진화론에 심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개화기에 발행되던 『한성순보』에도 사회진화론이 침투하여, 이 신문은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약육강식이 팽배한 세계대세를 긍정하는 차원에서 그 책임을 피침략국의 잘못으로 돌렸다. 물론 이는 당시 세계 사상계를 풍미하던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한성순보』 1883년 11월 30일자가 아프리카의 야만성을 장황하게 거론하면서 ‘침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교화’로 본 것도 바로 그런 시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사회진화론을 역설한 대표적 문헌은 유길준이 1883년에 쓴 「경쟁론」이다. 유길준이 1881년부터 1882년까지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을 당시 동경제국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강의한 미국인 교수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 1838~1925)의 진화론은 일본 학계에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1883년 한국 최초의 도미 사절인 보빙사의 일행으로 미국에 가게 되자 모스를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삼아 1885년까지 공부했다. 유길준(2004)은 훗날 『서유견문』의 서문에서 모스를 가리켜 “뛰어난 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미국 전체를 통하여 학문의 지도자 위치에 있으며, 그의 명성을 온 세계에 떨치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후에 막내아들에게 남긴 글에서도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모스를 꼽았다.

사회진화론의 두 얼굴

구선희(1998)는 유길준이 경쟁심을 일국의 문명부국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신이라 보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칭송했다고 말한다. 당시의 약육강식의 논리가 관철되던 세계적 상황에서 조선은 경쟁에서 반드시 승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정의가 되는 시대상황을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용화(2004)는 유길준의 경쟁이 ‘자연도태’ ‘우승열패’를 다투는 경쟁이 아니며, 유길준의 ‘경쟁’과 ‘진보’ 관념은 사회진화론적 관점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는 “경쟁을 발전과 진보의 요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Liberalism)적 관점이다. 그런데 ‘경쟁’과 ‘진보’라는 용어에만 주목하여 이를 사회진화론의 수용--그것도 최초의 사례--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경쟁’ 및 ‘진보’와 적어도 동양에 수용된 사회진화론에서 말하는 그 개념들과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양자가 모두 경쟁과 진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자유주의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궁극적으로 ‘조화’를 상정하고 있는 데 반해, 사회진화론에서는 ‘자연도태’를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의 경쟁은 ‘적자생존’ ‘우승열패’를 향한 경쟁으로서, 끊임없는 세력의 강화만 요구하는 영원하고도 잔악한 경쟁을 말하며, 강자의 권리와 약자의 복종만이 정당화되는 경쟁이다.”

반면 전복희(1996)는 ‘자유주의와 사회진화론의 부분적 공통성’에 주목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이므로 사회진화론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 같은 측면에 19세기라는 급격한 변화와 도전의 시대를 맞으면서 보다 확연하게 증폭되어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의 구체적인 정치적 표현이 사회진화론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명화(2002)는 ‘한국 사회에서 전개된 사회진화론의 특수성’에 주목하면서 “한국 근대사에서 사회진화론은 강자에 대한 패배를 불가피한 숙명으로 보고 그 저항의욕을 약화시키는 패배주의를 낳기도 했지만, 반면 한국 민족주의의 자강론(自强論)을 형성시키고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실력양성운동을 촉발하는 계기를 이루기도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회진화론을 ‘공격적 사회진화론’과 ‘방어적 사회진화론’으로 나누어 보는 건 어떨까? 마루야마 마사오는 “중국에서는 같은 적자생존이라도 약자 편에 선 입장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강자·적자(適者)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라 제국주의의 입장이 되고 말죠”라고 말한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국으로부터도 당해야 했던 한국의 경우엔 방어적 사회진화론이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국가별 차이를 무시한 채 사회진화론을 한꺼번에 싸잡아 평가해야만 하는가? 이 또한 주요 논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 지식인의 사회진화론 수용을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을사늑약 이후 약한 국력으로 인해 국권을 사실상 빼앗긴 것에 대해 당시의 애국적인 지식인들이 느꼈을 한(恨)에 공감하긴 쉽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이 약하다는 걸 죄악으로 보았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의도되지 않은 결과의 이론’

그런데 오늘날 사회진화론은 이 용어를 쓰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미로 쓰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사회진화론에 우생학·파시즘까지 포함시켜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존경쟁·약육강식·우승열패·적자생존 정도의 의미로만 쓰는 사람도 있고, 경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낮은 수준에서 쓰는 사람도 있다. 중국에서 사회진화론에 비판적이었던 루쉰(魯迅)의 경우 중국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걸 인정했는데, 부국강병을 주장했다고 해서 곧장 사회진화론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사회진화론을 둘러싼 논란은 오늘날 지구촌을 풍미하고 있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때문에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이근식(2000)은 사회진화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반동적인 이념적 측면이라고 말한다. 사회진화론은 자유방임주의와 상통하는 것으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연의 선택에 의해 항상 현실에서 저절로 최선의 결과가 실현된다고 보기 때문에, 이 이론에 의하면 현존하는 모든 것은 주어진 조건에서 가장 적합한 것이므로 모두 최선의 것이며, 바뀔 필요가 있을 때는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서 저절로 바뀌게 되고, 따라서 현실의 모든 존재는 고칠 필요가 없다는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근식은 이러한 입장에 서면 사회의 모든 제도나 관행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보수적 내지 반동적 입장에 서게 되는 바, 사회진화론은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사회진화론은 100% 전면 부정해야 할 그런 것인가? 그렇진 않다. 이근식은 신자유주의의 원조라 할 경제학자 하이에크에 대해 언급하면서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사회진화론과 관련된 하이에크의 주장은 두 가지 유익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유세계의 본질적인 가치를 국가가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솔한 사회개혁에 대한 경고라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관점은 많은 개혁이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악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이에크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이론과 정보는 불완전하므로 개혁은 신중히 조심스럽게 추진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이근식은 하이에크의 사회진화론의 핵심은 인간의 의도적인 노력이 인간사회를 개선하기보다는 퇴보시킨 경우가 많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검증하기 힘든 주장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검증하기 힘든 주장이긴 하지만 분명히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는 있다. 하이에크는 스미스가 역설했던 ‘의도되지 않은 결과’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이른바 ‘의도되지 않은 결과의 이론’을 내놓았다. 하이에크의 주장에 따르면, 중대한 결과들은 종종 의도되지 않은 것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면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결과는 달리 나올 수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권력과 권한이 없어 책임질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이나 세력은 ‘의도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원칙을 신봉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권력과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다르며 달라야만 한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선의(善意)’ 하나만으로 밀어붙이는 건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한 일일 수도 있다. 사회진화론을 역사의 유물로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사회진화론이 우리에게 주는 그 한 가지 교훈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약육강식·우승열패·적자생존의 신봉자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사회진화론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점은 ‘평등’을 혐오하는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사실상 사회진화론에 중독돼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진화론의 3대 지주라 할 약육강식·우승열패·적자생존이 한국 내부에서 지금도 기승을 부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원리를 예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여기서 그걸 놓고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그걸 예찬하는 사람조차 인정할 수준의 과도함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한국 사회는 그 과도함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없다!

왜 없는가? 사회적 보호막 장치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엘리트 계급이 가문 보호막에 안주해 있어서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문 보호막이 없는 사람들은 종교와 더불어 학벌 보호막을 갖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한국인은 공개적으론 ‘편승’을 혐오하지만, 실제론 대세에 편승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이 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거의 본능적으로 보호막을 찾기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각종 ‘신드롬’이 양산되는 이유와 무관치 않다. 이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편승이 잘 이루어지면 우리가 가진 역량 이상의 성취를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불안정과 피곤함은 피할 길이 없다.

좋은 가문․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 고수를 위해 일로매진할 경우 보호막 쟁취를 위한 대중의 투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지금 가장 현저한 투쟁은 ‘기업 보호막’ 쟁취 투쟁이다. 정규직․비정규직 갈등의 본질도 바로 그것이다. 비슷한 조건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누구는 과도한 보호를 해주고 누구는 보호를 해주지 않는 방식으론 사회적 안정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이를 평등주의 논리로 비판하려면 비판자 자신의 보호막부터 검증해볼 일이다.

한국의 사회진화론자들은 부동산·균형발전·입시문제 등 사회적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국가 경쟁력’을 앞세워 사회적 약자들을 모독하는 발언을 즐겨 하는 경향이 있다. “억울하면 니가 출세해”라는 식이다. 이들이 진정한 애국자라면 그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설득력이 없진 않으련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그게 바로 문제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곧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소용돌이로 빠져들곤 하는데, 기득권을 누리는 강자들이 그런 작태에 ‘국익’이라는 현란한 분칠을 해대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애국 없는 애국주의 담론의 비극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망국(亡國)이라는 기억을 착취하는 역사의 오남용이라고나 할까?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10년 1월 호에 실렸습니다.


 [참고문헌]
F. L. 알렌(Frederick Lewis Allen), 박진빈 옮김, 『빅 체인지』, 앨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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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외 공역, 『미국인의 역사』(전3권), 비봉출판사, 1998.
루이스 A. 코저(Lowis A. Coser), 신용하․박명규 옮김, 『사회사상사』, 일지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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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2/29 [03: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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