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야인시대’를 찍은 모양이다. 국회의원이 포함된 150여명의 대통합신당 사람들이 심야에 만나 몸을 뒤섞다 경찰서 문턱까지 넘었다. 대통령의 명의를 도용한 인물을 뒤쫓고 있다 하니 애꿎은 경찰의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쯤해서 판 접는 게 민폐를 최소화하는 길이 아닐 수 없다.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과반의석을 갖게 된 여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린 셈이다. 2004년 총선은 선거혁명이었다. 해방 이전부터 이 나라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수구세력’이 소수파로 전락한 사건,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거꾸로 갔다. 그 결과 의석이 하나 둘 줄어들었고 다시 여소야대가 되었다. ‘원칙과 상식’을 강조하던 대통령은 그러나 민심에 귀 기울이고 정책을 수정하는 대신 여소야대라 못해먹겠다면서 도착적인 대연정 소동을 일으켰다. 그때 끝난 것이다.
누군가 묻는다. 국민은 이미 심판했는데 왜 계속 과거를 말하느냐고…. 그렇다. 국민은 심판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수습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 때 수습했다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통합이 시대정신”이며 “가장 아름다운 개혁”이고 “대세이자 대의”라고 했다. 그리고 돌고 돌아 도로 그 당을 만들고 난장판 경선을 치른다. 여전히 시대정신은 통합인가?
어제와 오늘이 없는 내일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대연정 소동 직후 문희상 지도부를 날린 2005년 10월 재보선에서 나타난 정치지형은 지방선거를 거쳐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대선을 넘어 총선까지 이어질 것이다. 물음에 대한 나의 답.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희망새’의 가벼움 오해부터 풀자. 기업인으로서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매우 ‘우호적’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자 애썼던 그의 노력은 존중되고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그가 말하는 ‘사람중심’이 ‘사람을 위한 자본주의’같은 휴머니즘 계보가 아니며, 따라서 그 ‘사람’은 ‘휴먼’이 아니라 평생학습을 통해 연마한 고도기술의 노동력을 생산에 투입하는 ‘유닛’에 불과하므로 그 또한 이윤을 위해 사람을 도구화하는 것은 매 한가지라는 비판은 물론 충분히 수용한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땅의 허다한 회장님과 사장님들이 정리해고와 변칙고용을 지렛대 삼아 기업 가치를 높이고 수십, 수백억 연봉과 배당금 잔치를 벌일 때, 어찌됐든 그는 고용과 기업복지 향상에 기여했다. 운동가의 기준으로 기업가인 그의 성과를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의 나무 심기가 영업 전략의 일환이며 그가 해온 기부행위와 사회운동이 ‘늙은 여우’들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선한 기업인으로서 그의 실존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회장님 중에 그만한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나는 킴벌리 시절 그의 행적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싶지 않다. 그의 과거를 좋게 평가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과거가 이 시점에서 어떤 절박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지금 ‘사장님 공모’가 아니라 ‘대통령 선거’를 하고 있으므로….
지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그의 직업은 이미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정치인’으로서 그의 말과 행동을 평가하고 지지와 반대 여부를 결정하면 그만이다. 나는 정치에 관한 문제들을 지적할 뿐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대안”이라며 후보단일화를 말해왔던 그는 오늘 자신으로 “단일화는 이미 이뤄졌다”고 기염을 토하며 “의원 50~60명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래서 묻는다. 이제 뉴패러다임의 새로운 정치세력은 탄생하는 것인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썩은 생선에 파리가 꼬이는 법이다. 기회주의적 포퓰리즘이 ‘희망새’의 발목을 잡는다고 진작부터 말해왔음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변형과 몰락, 그 우울한 뒤 끝 ‘참여정부가 가장 성공한 정부’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 사람들이 그 정치적 근거지라는 곳에서 패배했다. 성공했으면 그 당을 지켜야지 왜 당을 없앴는가? 일사불란하게 어제의 말과 오늘의 행동이 거꾸로 가는 것이 그 종족의 특성이다.
올해는 민주항쟁 2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20년 만에 대면하게 된 오늘 우리 사회의 일상은 ‘빈곤과 양극화가 초래한 삶의 위기’로 집약된다. 왜 이런 결과가 온 것일까?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훼방 때문인가? 5년 단임제라? 중대선거구제가 아니라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탄생 동력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 하던 ‘개혁 열망’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배반’은 신뢰의 붕괴와 열망의 소진을 낳았고 그 대신 만연하고 있는 것은 극도의 정치 불신과 정치적 허무주의다.
민주정부가 수립됐고 과반의석을 가졌으며 정치개혁이 이뤄졌는데 그 결론이 ‘빈곤과 삶의 위기’라면 ‘대체 정치를 왜 하고 선거를 왜 하는가?’ ‘대체 누구를 위한 민주화였나?’ ‘수십 년 동안 무엇 때문에 싸운 것인가?’라는 사회적 의문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남 탓, 제도 탓 할 때가 아니다. 유신과 5공을 극복하자고 목숨을 바쳐 얻어낸 민주화시대는 왜 ‘재벌ㆍ수출ㆍ건설’ 중심의 박정희 체제와 ‘금융화ㆍ노동배제’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퇴행적으로 결합하는 ‘배제적 양극화 사회’를 낳았는지 진지하게 내부의 문제들을 들여봐야 할 시점이다. 분단체제와 세계화의 제약조건,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훼방을 논하기 이전에 ‘주체의 문제’를 되짚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제도 오늘도 ‘반한나라당’을 외치며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성공했으면 왜 당을 없앴느냔 말이다.
정치적 허무주의를 넘어서자 부인할 이유가 없다. 여전히 사회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분들이나 진보정당에 몸담고 있는 분들에게는 거북한 결론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최장집의 견해를 수용한다. 민주화 이행기, 우리는 진보적 전망과 실현 가능한 전략을 갖는 좋은 정당 만들기에 실패했다. 그것이 근원이다.
대의제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치의 매개주체로서 정당이었지만 우리는 그 중요성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권력에 눈이 먼 욕심쟁이들 소굴 정도로 취급하며 욕심쟁이들의 천박한 도덕성을 지탄했을 뿐이다.
열린우리당은 ‘당원이 주인 되는 정당’을 표방했지만 그 최후는 ‘당원이 없는 정당’이었다. 둔갑술을 통해 다시 만든 도로 그 당 역시 당원 없기는 매 한가지다. 그래서 없는 당원 대신 외부에서 선거인단을 모으느라 저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하자는 당원뿐만 아니라 ‘정신’도 함께 없었던 데 있다. 국민이 정부와 의회를 왜 맡겼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던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기득헤게모니와 타협하고 관료집단에 의존하며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고 말하는 그 개혁에 신심을 다했고 끝내 개혁에 ‘성공’한 것이다.
비정규직 850만, 월소득 100만원 미만의 자영업자 비중 40%, 온 가족이 다이어트 해가며 10년을 꼬박 모아도 살 수 없는 아파트, 엄마아빠의 소득이 아이의 학력을 결정하는 교육시스템, 대학 졸업생 태반이 백수 아니면 신불, 외롭게 농촌을 지키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말 "염치도 없다!" 지금도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이며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민주화 시대로부터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극복할 것인지도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저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통합을 찾고, 반독재를 찾고, 혼탁선거를 벌이며 야인시대를 찍는 것이다.
한미FTA를 통해 더 큰 세계로 나가게 된 대한민국의 미래는 이제 장미빛인가? 민주세력의 변형과 몰락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듯 민주화 시대의 비극적인 종말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전면적으로 위협하는 근원적인 사회위기를 불러들였다.
근원적인 위기에는 근원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래서 후보단일화와 흡수합병으로 때워 넘기자는 것은 위장약으로 암 덩어리를 씻어내자는 말로 들린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통합의 죽음 이후를 준비하자.
/ 정치 칼럼니스트 * 새로운민주정당추진회의 홈페이지
'새민추'(www.demokratia.kr)에도 함께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