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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힘, 고속무선인터넷
디지털 권력혁명으로 조중동은 바람앞의 촛불신세
 
민경진   기사입력  2003/02/04 [02:35]
믿을지 모르지만 나는 5년 전에 산 휴대전화를 아직도 쓰고 있다. 전화를 꺼내 들면 골동품 바라보듯 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기는 하지만 어쨌든 통화 잘만 되는 휴대폰을 아직 바꿀 생각은 없다.

사실은 다른 이유도 있다. 예전에 386 컴퓨터가 수백만원에 팔릴 때 조금만 기다리면 컬러 모니터에 펜티엄 CPU 달린 ‘첨단 PC’ 나온다고 끝까지 사지 않고 버티던 습성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아는 것도 병이다. 휴대폰 마케팅에 몇 년간 관련되었던 탓에 무선통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일찌감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5~6년 전부터 화상통신에 디지털 카메라, 인터넷, PC 기능이 하나로 통합된 복합무선통신단말기가 개발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기다린 보람이 있어 올 해 최첨단 휴대폰 왕국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필자가 몇 년 전 시제품으로만 보았던 무선 단말기들이 서서히 시장에 등장하고 있었다. 명색이 무선 컨텐츠 비즈니스 모델을 주제로 논문까지 쓴 사람이 구닥다리 단말기를 들고 다니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최신 단말기를 사려고 두루 알아보았는데 아직은 함량 미달이다. PDA 기능이 결합된 차세대 휴대전화의 벤치마크 테스트 결과를 보니 웹 페이지 하나 다운로드받는데 무려 2분 가까이나 걸린다는 것이다. PC에서 순식간에 수십 메가 짜리 동영상을 다운로드받는데 익숙해진 네티즌들이 지하철에서 웹 페이지 하나 받으려고 2분을 기다릴 수 있을까? 아직도 기대에 못 미친다. 5년이나 기다렸는데 1년을 더 못 기다리랴?

역시 문제의 핵심은 첨단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방식이다. 기술맹신주의에 빠져 소비자 연구를 게을리 한 끝에 지금 대재앙에 직면한 유럽의 통신 회사들을 생각해 보자. 일찌감치 3세대 무선통신사업에 뛰어 들어 주파수 구입에만 수백억 유로를 퍼부은 이들 통신회사들은 지금 엄청난 부채로 회사마다 골병이 들어 있다.

필자가 지난 반년 프랑스에 있는 동안 목격한 유럽의 통신시장은 한 마디로 비참했다. 프랑스 텔레콤은 무려 6백억 유로에 육박하는 부채로 휘청거리다 결국 프랑스 정부에 손을 벌렸고 그나마 사정이 좀 낫다는 보다폰은 3세대 서비스를 간신히 시작하기는 했으나 단말기 공급 부족으로 목표했던 가입자를 유치할 수 있을 지 불분명하고 일본에서의 J폰 사업으로 부진한 매출을 메우고 있다. 성급한 결론인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2.5세대나 3세대 휴대전화 사업이 과연 한국에서 무선인터넷의 미래가 될 수 있을지 심히 의문을 품고 있다. 과연 여러분은 휴대폰으로 대자보에 접속해 게시물 하나 다운로드받으려고 몇 분씩 기다릴 엄청난 인내심을 보여 줄 수 있는가?

무선통신서비스가 거대자본의 독무대가 된 것은 무엇보다 전파가 한정된 자원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통신업체들 역시 거액의 전파면허료와 사용료를 정부에 납부했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첨단무선통신기술이 등장하면서 전파가 한정된 자원이라는 그간의 가정은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무선사업자가 주파수대를 할당받고 안테나 출력 역시 규제를 받는 것은 어느 사업자가 특정 주파수를 차지하고 나면 다른 사람이 그 주파수대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집이 지어진 땅 위에 또 다시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그러나 최근의 디지털 암호화 기술은 이러한 개념을 일거에 무력화하고 있다. 마치 달리는 기차의 지붕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기존 주파수에 전혀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디지털 처리된 또 다른 신호를 편승시켜(Piggyback) 송신할 수 있는 기술이 이미 개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을 활용해 얼마든지 고속무선인터넷을 실현시킬 수 있음이 증명되었음에도 단지 전파법규의 제한으로 시도조차 못 하던 미국의 한 벤처업체는 연방법률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이 기술을 테스트하고 있는 중이다.

전파법의 규제가 풀려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전파는 유한한 자원이란 기존의 상식은 일거에 무너지고 마치 인터넷처럼 모든 사람들이 전파에 자유롭게 접근해 고속의 무선인터넷을 구현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거대 통신업체들의 등골이 서늘해질 이야기다. 사실 이미 그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802.11b 즉 Wi-Fi 기술이다. 국제적으로도 이 주파수대는 아무라도 접근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공영역으로 남겨 두었기에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뉴욕의 자원 봉사자들은 센트럴파크 전체를 Wi-Fi 포트로 뒤덮어 누구든지 무선단말기가 장착된 PDA나 노트북 컴퓨터만 있으면 공짜로 고속무선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영원히.

필자가 거대통신업체에게 테러 당할 각오를 하고 귀띔하는 것인데 만약 대자보 독자들이 신촌 같은 지역에서 뜻을 모아 집집마다 Wi-Fi 포트(이것 하나에 10만원 남짓이면 살 수 있고 갈수록 값이 더 떨어지고 있다. 심지어 집에서 자작하는 사람도 있다)를 촘촘하게 설치한다면 이 지역에 들어서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돈 한푼 내지 않고도 휴대폰 인터넷보다 훨씬 빠른 고속의 무선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법에도 하등 저촉될 것이 없고 평생 무료다. 인터넷 컨텐츠가 공공의 영역인 탓에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무선인터넷의 접근권(Access Right) 역시 마치 공기처럼 무제한의 공공재로 풀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지난 백여년간 국가와 거대기업의 독점자산으로 남아있던 통신주파수가 개미군단의 손아귀에 들어 올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라는 책으로 유명한 MIT 미디어 랩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교수가 최근 '와이어드(wired.com)'에 올린 칼럼에서 제시한 통신의 미래상이다.

선 마이크로 시스템의 창립자 빌 조이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완벽하게 분산된 고속 무선 인터넷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객체지향기술을 동원한 자바 통신 칩을 이 세상의 모든 전자제품에 장착하는 꿈을 꾸고 있는데 TV, 냉장고, 휴대전화를 비롯한 모든 전자제품, 여기에 길거리를 질주하는 수백만 대의 자동차까지 이 자바 칩을 장착한다면 극단적으로 민주화된 무선통신의 미래가 올 것이라는 거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자바 칩이 장착된 무선 단말기에서 이메일을 발신하면 이 데이터는 마치 연꽃잎을 뛰어다니는 청개구리처럼 근처에서 발견된 다른 휴대폰, 자동차, 간판, TV 등 데이터 호환 가능한 자바 칩이 장착된 모든 전기제품을 지그재그로 건너뛰어 원하는 목적지까지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TCP-IP처럼 데이터 패킷에는 최종 목적지의 주소가 정해져 있기에 전송 중에 오류가 생길 염려는 절대로 없다. 마치 그물처럼 늘어선 수백만의 사람들이 시멘트 포대를 전달, 전달, 전달… 해 결국 최종 주소지로 보내주는 형국에 비유할 수 다. 이것은 완전히 혁명적인 통신의 미래다. 거대 통신업체들이 거드름 피우며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것에 종말이 오는 것을 뜻한다.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과연 개미군단의 거대통신인프라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 질 수 있을까? 글쎄, 여러분 하기 나름이다.

무선컨텐츠 사업의 경우는 AOL의 경험을 돌이켜보자. AOL은 아직도 수천만의 사용자를 거느린 거대 ISP업체지만 그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하고 있는 중이다. AOL은 인터넷이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자 ‘닫힌 정원- Walled Garden’이라는 비즈니스 전략을 추진한 바 있다. AOL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며 당신이 원하는 모든 컨텐츠는 AOL이라는 정원 내에 있을 것이기에 굳이 정원 밖으로 나가 인터넷에 접속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이 생각이 철저한 오산이었음은 이제 세상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AOL을 그저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한 서비스 업체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게 되면서 이들은 더 빠른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속속 둥지를 옮기고 있다.

지금 국내의 이동통신업체들이 꿈꾸는 독점 컨텐츠 유통업자로서의 꿈도 한낮 신기루에 그칠 공산이 매우 크다. 이들의 자신감은 무선인터넷은 유선인터넷과 달라 AOL의 ‘닫힌 정원’처럼 통신업체가 모든 컨텐츠의 유통여부를 결정짓는 전제적 권한을 휘두를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은 정말 비싼 통신료 내가면서 대용량의 멀티미디어 파일을 다운로드받을 의향이 있으신가? 만약 무선단말기와 PC를 접속할 수 있는 케이블, 즉 PC링크가 있다면 어떨까? 이미 MP3 파일이며 동영상이며 하드디스크에 돈 한푼 내지 않고 다운로드받은 엄청난 양의 컨텐츠가 있는데 비싼 통신료를 물면서 이보다 훨씬 허접스러운 컨텐츠를 또 다시 무선으로 다운로드받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센스다.

무선단말기는 시간이 갈수록 대용량의 저장능력을 지닌 멀티미디어 기기로 진화할 것이 분명한데 반해 통신업체들이 구현할 수 있는 무선인터넷의 속도는 앞으로 한참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결코 수요자의 요구수준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또 하나의 복병 Wi-Fi가 있다. 주요 인구밀집지역마다 수십만 개의 자발적인 Wi-Fi 포트가 설치되고 삼성 같은 회사가 이에 편승해 Wi-Fi 카드가 내장된 휴대전화를 팔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시간을 도심지에서 보내는 가입자들은 이 지역에서는 Wi-Fi 모드를 이용해 고속의 무선인터넷을 공짜로 마음껏 즐기다가 인적이 드문 교외로 나가면 휴대폰 모드로 전환해 음성통화만 하게 될 것이다.

Wi-Fi가 한국 같은 곳에서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밖에 없는 것은 2천만 명에 이르는 인구가 수도권에 밀집해 있으며 부산, 대구, 광주 같은 지방도시까지 합하면 전체인구의 무려 80%에 가까운 사람들이 Wi-Fi 설치의 최적지인 대도시 지역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통신업체에 줄 수 있는 충고는 미국 컨텐츠 업체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독점적인 사업자가 다수의 사용자에게 중앙집권적인 유통구조로 컨텐츠를 팔려는 시도는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것이다. 통신업체는 수천만의 사용자들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에게 개인적인 메시지와 컨텐츠를 주고받는 중계기 역할을 하는 데서 그쳐야 할 것이다. 카메라폰을 휴대한 사람이 찍은 사진과 음성파일을 다른 사용자에게 무선송수신 해주는 역할만을 하라는 것이다. 즉 컨텐츠 공급업자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구현업자(Communication Enabler)의 역할에서 그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하긴 필자가 오지랖 넓게 이미 엄청난 돈을 쓸어모으고 있는 통신업체의 사정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자보가 고정필진뿐 아니라 여러 독자들의 자발적 컨텐츠 공여에 의해 운영되고 있듯이 이러한 리눅스형 사업모델이 무선통신 인프라 자체의 구축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도록 해주는 테크놀러지가 이미 우리 손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가? 날을 정해 독자여러분이 사는 동네를 고속무선인터넷의 해방구로 선포하는 것은? 공동구매로 사면 Wi-Fi 포트 역시 싸게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독점적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과 지적자산의 중계상 노릇을 하던 구시대 강자들이 강력한 디지털 기술이 대중에게 보급되면서 그 지위가 흔들리는 현상(Disintermediation)은 통신업 뿐만 아니라 산업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뮤지션들이 간단한 매킨토시 컴퓨터 한 대만으로 작곡과 프로듀싱까지 마친 디지털 음악을 인터넷을 통해 음악팬에게 직접 배급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길어야 10년 이내에 음반업계 전체가 붕괴될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으며 할리우드 역시 머지 않아 이런 운명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최소 수백만 불의 예산이 없으면 꿈도 꿀 수 없었던 영화의 제작이 성능은 무어의 법칙을 따라 올라가고 값은 거꾸로 떨어지는 디지털 영상기기의 보급으로 인해 아마추어 수준에서 가능해지고 영화의 배급 역시 고속인터넷 망을 통해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뉴스와 여론의 강력한 중계상 역할을 해 온 거대 보수언론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다. 대자보만 보아도 세 들어 사는 서버와 노트북 컴퓨터로 무장한 필진 몇 명과 여러 네티즌이 합심해 거대언론을 조롱하는 놀라운 사태가 지금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보수언론의 불운은 이런 흐름이 이제 겨우 시작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정작 본 편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지경이라면 인터넷 사회의 성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예측 불허다.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 권력 혁명이 하루하루 어떻게 펼쳐질지 정말 흥미롭지 아니한가?

jean

* 필자는 [테크노 폴리틱스](시와사회, 2002)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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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2/04 [02:3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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