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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2002년의 꿈과 2006년의 현실
[인물과 사상] 盧의 실패는 '호남 없는 개혁'에서 '영남 보수'로 끝난 것
 
김욱   기사입력  2006/12/22 [16:40]
지금도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은 노무현을 혐오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2002년은 매우 특별한 과거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런 ‘순수의 시대’는 우리들 인간적 삶의 의미에서나 정치사적 진화의 의미에서나 앞으로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몇 걸음 물러나 생각해보면 2002년 그 ‘순수의 시대’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한번쯤은’ 통과해야 할 필연적 진화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시 2002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궁색한 변명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사건’은 결코 반복될 수도 없고 또 반복해서도 안 되는 사건이 되었다.
 
2002년, 우리는 무엇을 바랐는가
 
왜 노무현이었을까? 그가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어서? 천만의 말씀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에서 노무현보다 더 개혁적인 ‘주장’을 하는 인물은 아주 흔하다. 가장 개혁적인 인물을 원했으면 가장 개혁적인 이력을 가진 사람을 후보로 밀고 또 그 후보에 투표했으면 됐다. 같은 당의 김근태도 있었고, 민노당의 권영길도 있었다. 권영길로도 부족했으면 그 결과가 무엇이든 대한민국을 뒤집어놓을 더 혁명적인 사람을 찾으면 됐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덜 개혁적인 노무현을 원했다. 그가 전혀 개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무현의 개혁성향은 2002년에 노무현을 선택한 사람들의 주된 선택의 이유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뭐였을까? ‘지역 문제 해결’이라는 화두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의 정치역정 자체가 지역 문제와의 투쟁으로 점철된 것으로 보였고 그의 당선은 곧 우리나라 지역 문제 진화의 결정적 계기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회상해보라. 부산의 ‘공터’에서 연설하는 ‘바보 노무현’의 자료화면을 보면서, 기타를 치면서 눈물짓는 노무현의 영상 캠페인을 보면서, 민주당의 우당으로 출범한 개혁당의 창당발기인대회에서 문성근의 감동적인 연설을 보면서, 강준만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떤 감상에 빠졌었는지. 대한민국에 개혁적인 사람은 많았어도 지역문제 해결을 위해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온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지금 반추해보면 정말 어이없는 ‘순수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순수한 착각’이었다.
 
노무현도 이런 기대를 잘 알고 있었을까? 물론이다. 그는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문제인 사람이다. 그는 아주 직설적으로 “이번 국민들의 선택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결국 지역주의에 가담하지 않고 지역주의에 맞서왔던 정치인에 대한 신뢰나 지지의 표현으로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그것 말고 제가 특별히 다른 후보들보다 더 잘난 데가 없지 않나”라고 고백한 바 있다.
 
맞다. 노무현은 바로 ‘반지역주의의 화신’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한민국에서 그보다 더한 대통령 자격이 어디 있겠는가? 지역주의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곧 패권적 지역지배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고, 패권적 지역지배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곧 가장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과 맞서 싸운다는 의미고, 이는 곧 피지배 지역과 피지배 계층이 연대하여 정치적 진화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노무현이 바로 이런 토대를 마련해줄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2006년, 노무현은 어떤 모습인가
 
그런데 2006년의 ‘대통령 노무현’은 어떤 모습인가? 그는 횡설수설하는 술자리의 사석도 아닌 대한민국의 국정을 논하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협박성 발언이나 하고 있는 신세가 됐다. 어쩌다 이런 처지로 전락했을까? 노무현의 실정과정을 여기서 일일이 다 복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실정의 근원이 되었던 그의 이념적 편린을 반추해볼 수는 있다.
 
노무현은 자신의 임기를 자신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준 모당(母黨)인 민주당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정치적 에너지가 가장 충만한 취임 초기 근 6개월간을 민주당을 ‘지역주의 부패정당’이라며 공격하는 데 낭비해버렸다. 노무현은 이렇게 ‘김대중의 민주당’과 절연하면 영남에서 신당의 지지자들이 합세해 대한민국의 숙원인 지역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은 것이다. 결과는 어떤가? 참담할 뿐이다. 노무현의 가당찮은 신념 때문에 지지자들은 사분오열되었고 한나라당은 공룡이 되었다.
 
노동문제는 어떤가? 노무현은 취임 첫해 분신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주검을 앞에 두고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고 관계 장관들의 정부 담화내용을 질타한 바 있다. 나는 지금 노무현의 ‘비인간적 말’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노무현 정부가 노동자의 주검 앞에서도 ‘불법적인 노동운동’을 문제 삼는 것만큼이나 ‘공평하게’ 자본가들의 ‘불법적인 경영’을 문제 삼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2006년 현재 노무현 정부의 실정은 주택부동산 시장의 이상폭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그런데 노무현은 2004년에 있었던 분양원가 공개 논란 와중에 “부동산 가격은 급격한 변화를 주지 않는 게 좋다. 투기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자신의 자산이 깎이는 것도 싫어한다. 또 금융 부분과 많이 맞물려 있다”고 자신의 부동산 가격에 대한 소신을 밝힌 바 있다. 부동산 가격의 급격한 폭락이 문제라면 최소한 급격한 폭등은 막아줬어야 할 일 아닌가? 여러 말이 필요 없다. 결과가 노무현의 무능을 추궁하고 있다.
 
그런데 노무현은 자신의 이런 실정을 인정하고 있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노무현은 김병준 부총리 파문과 문재인 전 민정수석의 법무장관 기용 문제를 둘러싼 당내 비판 여론과 관련, “내가 20% 지지 받는 대통령이라고 무시하는 것이냐”며 “나도 (언젠가) 뜹니다”라고 사람들을 웃겼다. 그러다 며칠 후에는 언론사 간부들과의 오찬회동에서 아예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꼽아봐라”고 말한 뒤 “내 집권기에 발생한 사안은 성인오락실 상품권 문제인데, 청와대가 직접 다룰 성격은 아닌 것 같다”는 발언까지 했다. 이것이 2006년 노무현의 현실이다.
 
문제의 원인, ‘호남 없는 개혁’
 
노무현 개혁의 실패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노빠’들은 노무현이 개혁드라이브를 걸지 않아서 지지층이 떨어져 나갔다고 주장한다. 얼핏 원인과 결과가 제대로 된 설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노무현은 권력에너지가 넘치는 취임 초의 그 황금 같은 시기에 외연을 확장해 개혁에 매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집권당인 민주당을 분열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결과는 뻔한 것이다. 지지자들은 사분오열되었고 개혁에너지는 하릴없이 낭비됐다.
 
그런데 ‘노빠’들은 왜 현실의 진행 경과조차 부정하는 거꾸로 된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이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 정치적 모순의 층위가 오직 ‘진보/보수’의 차원에서만 존재한다는 은연중의 암시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오직 개혁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지지자들의 선택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함으로써 ‘지역/지역’의 층위가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애초에 민주당을 ‘지역주의 부패정당’으로 규정하고 분당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은 죽어도 잘못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정치적 모순의 층위가 현재 ‘진보/보수’의 차원에서만 존재한다고 보는지 아니면 ‘진보/보수’의 층위와 함께 ‘지역/지역’의 층위가 중층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만약 전자의 입장이라면 현실의 진보를 위해 ‘호남’이라는 지역관념은 전혀 불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후자의 입장이라면 ‘진보’라는 계층적 관점과 함께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준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여기서 전자의 입장에 서 있는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은 ‘호남 없는 개혁’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것이다.
 
그러나 비정한 현실은 아둔한 관념을 냉혹하게 검증한다. 노무현이 ‘호남 없는 개혁’을 입증하기 위해 현실 속에서 취한 행동들을 보라. 그의 생각대로라면 이제 노무현은 지역관념 없이 오직 개혁에만 일로매진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기득권과 함께 보수화된 영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노무현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부산정권’이라는 당근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호남 없는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한 일은 결국 ‘영남 있는 보수’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무현은 왜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길로 나아간 것일까? 현실을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식자층들에 따르면 지역문제는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실체 없는 감정상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지역감정’을 없애고 계층적 정책을 보자며 ‘반지역감정’에 호소한다. 그런데 왜 안 되는 걸까? 유권자들이 바보여서가 아니라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인 영남(출신)인들이 ‘계층적 전국정책’보다는 ‘패권적 지역정책’으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감상적 캠페인에 설득당하겠는가?
 
이런 사태에 직면한 노무현은 그래서 겉으로는 ‘지역 없는 정책’을 강조하면서 속으로는 끊임없이 ‘영남이라는 지역관념’을 가지고 접근했다. 이는 겉으로는 ‘호남 없는 개혁’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영남 있는 보수’일 수밖에 없다는 말과 같다. 이제 이 참담한 실패를 마주하고 있는 노무현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아 있다. 자신이 틀리지 않다고 우기는 일이다. 이는 노무현에게, 그리고 그 지지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결과, ‘영남 있는 보수’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에게 열린우리당은 ‘호남 없는 개혁’의 상징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신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실제로 호남이라는 지역관념 없이 오직 ‘진보/보수’의 층위만으로 우리 정치를 논하는 것이 가능해짐으로써 생겨난 현실 속의 정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차원의 ‘상상된 관념’에 토대한 ‘상상된 정체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이 ‘상상된 관념’으로 현실을 재단하려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무현은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지역당 시대를 마감하겠다는 의도를 가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영남이 노무현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운데 호남의 실망이 가속화됨으로써 열린우리당의 토대가 급작스럽게 붕괴되는 것으로 끝났다. 당연히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열린우리당 정치인들은 ‘신당 창당’을 모색하며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그들을 향해 노무현은 “지역당 시대를 청산하기 위해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지지했다. 다시 지역당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노빠’들의 총궐기를 요구한다.
 
노무현의 어법은 현실과 관념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잘 읽어야 한다. “다시 지역당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말은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지역당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의미다. 괜한 말꼬투리 잡기가 아니다. 현실 속에서 아직 지역당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과 이미 끝났다고 보는 것은 큰 차이를 가져온다. 전자라면 예컨대 ‘호남+개혁’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후자라면 ‘호남+개혁’은 불순한 퇴행이며 오직 ‘계층적 정책’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노무현의 발언은 자신이 후자의 입장이라는 선언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지역당 시대는 마감했으며 오직 ‘계층적 정책’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한나라당 역시 이제 영남 패권주의 정당이 아닌 계층적 정책정당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남 패권주의 정당은 헌법이 예정하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당 그 자체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정당은 상대적으로 수구적이라고 해도 당 그 자체의 정당성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노무현의 ‘지역당 시대’ 마감이라는 어법 속에는 한나라당의 역사적 정통성ㆍ정당성의 문제점을 사면해주는 의미까지 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노무현의 ‘상상된 관념’이 일으킨 착시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빚는다. 노무현은 자신의 ‘상상된 관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당은 과거 ‘지역당 시대’의 상징이며 사라져야 할 정당으로 규정한다. 통합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다. 반면 이제 지역당 시대가 끝났으므로 한나라당은 현실 속에서 정권교체의 파트너로 인정돼야 한다. “정치가 제대로 된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대 산맥이 계속 유지돼가야 한다”8)는 노무현의 발언은 이렇게 나왔다. 이는 우연이 아닌 ‘노무현 이데올로기’의 필연적 귀착이다. 관념 속에서 ‘호남 없는 개혁’으로 출발한 노무현은 현실 속에서 ‘영남 있는 보수’로 끝난 것이다.
 
‘위선 없는 정치’를 위하여
 
2002년, 우리는 노무현을 ‘반지역주의의 화신’으로 알고 열광했다. 반지역주의란 지역패권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지 지역패권주의든 저항적 지역주의든 모두가 잘못됐다는 이데올로기적 양비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노무현은 모두가 잘못됐다는 그런 식의 양비론적 차원까지도 넘어섰다. 민주당은 과거 지역주의 시대의 낡은 유물이며 한나라당은 ‘양대 산맥’으로서 정권교체의 파트너가 돼야 한다는 데까지 퇴행 중이다. 2006년, 나는 지금 알량한 양비론까지도 내팽개친 ‘영패 투항주의의 화신’ 노무현을 반대하고 있다.
 
왜 우리나라 정치에 노무현 같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아니 왜 노무현 같은 기이한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수십 년 동안 한나라당에 참여하지 않을 정도의 양심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김대중 당’과는 함께하기 싫었던 ‘영남 개혁세력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즉 ‘꼬마민주당 이데올로기’인 ‘양비론’ 때문이다. 그나마도 이 이데올로기는 이제 민주당을 부정하고 한나라당을 인정하는 것으로 ‘영패 파시즘’의 역사를 마무리 짓자는 ‘영패 투항주의’로 퇴행해가는 중이다.
 
노무현은 이 영패 투항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앞으로도 열린우리당과 함께 그 영향력을 최대화하고 싶어한다. 중부권의 많은 이들과 진보언론도 이 영패 투항주의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에겐 “외환위기 이후 영남권은 1인당 소득증가율이 크게 늘어난 반면, 호남권 및 제주도, 강원도는 전국 평균을 밑돌았”으며 “경제의 양극화 현상이 지역경제의 격차 확대로 옮겨가고 있다”는 한국은행의 발표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이런 지역적 문제는 결국 모두 계층적으로 환원되는 일이며 지역 기준으로 말하지 않는 것만이 ‘지성인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권력은 주로 호남의 지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열린우리당의 이데올로기는 ‘호남 없는 개혁’을 내건 영남 개혁세력이 장악하고 있다. 권력의 원천은 호남의 현실적 피눈물에 기대고 있으면서 이데올로기는 겉멋 들린 ‘호남 없는 개혁’인 것이다. 위선이다. 그 위선은 급기야 ‘김대중의 민주당’을 부정하고 ‘전두환의 한나라당’을 인정하자는 데까지 퇴행 중이다.

노무현이 상징하는 이런 식의 ‘반문명국가적 역사 이데올로기’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영남 개혁세력이 ‘호남 없는 개혁’이라는 위선을 벗고 ‘호남+개혁’의 기치하에 진보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 필자는 서남대 교수ㆍ헌법학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7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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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2/22 [16: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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