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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럽도록 '안이한' 중앙일보 옴부즈맨칼럼
[칼럼비평] 언론전문가라는 몸으로 언론 자체를 비호하는 짓 그만 둬야
 
이득재   기사입력  2006/04/12 [13:20]
부르디외가 '사회적 관계의 자본'을 이야기할 때 이 말을 '외설스런 커넥션주의'라고 표현하면 지성인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이 되는 것일까? 부르디외의 예의 그 '사회적 관계'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끼리끼리주의, 패거리주의를 뜻한다. 특히 커넥션들이 외설스럽게 거미줄망보다 복잡하게 드리워진 우리시대는 '사회적 관계의 자본'이라는 말처럼 고상하고 우아한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말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 시대에 언론전문가라고 해야 할 언론학자들의 언론비평도 그러하다. 삼성X파일 사건, 황우석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신문보도내용을 비평하는 언론전문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가령 중앙일보 김정기 옴부즈맨 칼럼이나 이재경 등의 칼럼을 읽으면 중앙일보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는 제기하지 않은 채 두루뭉실 넘어가거나 하나마나한 얘기들만 한다는 인상이 짙다. 옴부즈맨이란 것이 뭔가? 행정의 위법사항이나 주민들의 고충을 덜기 위한 고발제도 아닌가? 중앙일보에 '용기있는 저널리즘'을 주문하는 김정기는 정작 '용기있는 칼럼'을 쓰지 않는다. 특히 성병욱 중앙일보 고문처럼 중앙일보 기자들에게 중앙일보를 너무 비판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소리를 듣는다고 자화자찬하는 듯한 글을 읽으면 자가당착에 빠져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하긴 중앙일보 고문에게서 중앙일보 신문내용에 대한 무슨 비판적 시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가령 이렇다.

이재경은 "중앙일보의 '반성문'에는 치열한 자기반성이 없다", "삼성관련 독자 오해없도록 좀 더 엄격하게 보도해야" 같은 옴부즈맨 칼럼에서 '명확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는 중앙일보의 작년 10월 7일자 "삼성 '똑 부러진' 해법 없어 고심"이라는 기사에 대해, 그 기사가 삼성 변명으로 읽히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얘기한다. 이 '부담스럽다'는 표현은 언론학자들이 즐겨 쓰는 보도의 객관성을 위한 것이거나, 삼성보도를 비판하는 듯한 뉘앙스를 주지만, 결과적으로는 삼성과 중앙일보의 커넥션을 '추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예의 중앙일보 기사제목마냥 삼성보도 내용을 '똑 부러지게'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담스럽다니'?, 참으로 기이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 중앙일보 2005년 8월 18일자 이재경의 옴부즈맨 칼럼과 3월 9일자 김정기 옴부즈맨 칼럼.     © 중앙일보 PDF
 
이 부분은 같은 칼럼 앞부분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재경은 중앙일보의 10월 6일 자 사설에 나오는 내용, "삼성은 대한민국 1등 기업이자 글로벌 선두기업으로서의 체모에 걸맞게 책임과 도덕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두고 "이러한 말들은 눈치보면서 하기는 어려운 주문이다"라고 중앙일보 기사를 띄워준다. 삼성을 '기업'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도 문제지만, 지극히 모호한 표현인 '책임과 도덕성' 운운한 것을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보면 전문가를 자처하는 언론학자들의 비판의식이 얼마나 안이한지 잘 알 수 있다. 해서 이재경의 옴부즈맨 칼럼은 안이함에서 애매모호함으로 이어져, 결국엔 다음과 같이 끝날 수 밖에 없다. "...한국 최고를 지향하는 중앙일보는 각자의 길을 더 성실하고 엄격하게 갈 수 있어야 한다."

왜 중앙일보나 중앙일보 기사를 비평하는 언론전문가는 똑 부러지게 명확한 비판을 수행하지 않는가? 중앙일보야 삼성과 밀접한, 거의 근친상간적인 커넥션을 맺고 있어서 그렇다지만 언론전문가의 비평은, 삼성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중앙일보에 주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삼성문제의 본질은 도청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중앙일보에 대한 모호한 비평이니 결국 중앙일보에 대한 '엄격한 길'이 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삼성, 중앙일보에 대해 긍정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전문가를, 자폐증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바로 그 자폐증환자라고 생각한다. 교육전문가라고 자처하는 교육학자들, 언론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언론학자들, 과학의 문제는 과학자집단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전문가들과 과학전문기자들 등 우리 시대의 숱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자폐증에 걸려 있다. 전문가라서 외국신문과 비교해가며 우리나라 신문 기사들의 문장 수가 적고, 그래서 보도의 깊이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보도의 객관성, 다양성 운운하는 것은 언론학자들이 스스로 그 전문성을 내세워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무능력, 혹은 그것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전문가의 치명적인 약점은 언론전문가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혹여 우리나라도 대통령이 법전문가라, 정권 초기 '이제 막 가자는 거지요'라고 하며 젊은 일선 검사들을 질타했던 그 멋진 과거를 훌쩍 넘어, 이제는 FTA타결과 양극화해소라는, 정신분열적인 슬로건을 집권후반기정책으로 제시하는 건 아닐까?

우리 시대에 전문가는 그 전문가라는 개구멍으로 명예욕, 외설스런 커넥션에 의한 이익, 추한 욕망, 권위주의, 권력, 지식독점에 따른 반사이익 등을 들여온다. 그리고 전문가를 자처할수록 우리 시대의 본질적인 문제에는 함구무언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지성인답고 학자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폐증환자의 증상과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일수록 권력에 집착하고 외설스런 커넥션을 더 즐기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 잠시 메타비평을 했지만, 전문가로 치자면 방송언론에 얼굴을 내밀며 전문가를 자처하는 언론학자들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들이다. 언론이 사회를 이끌고 언론전문가들이 언론을 비판하며 이끌어야 하지만 시덥지도 않은 보도의 공정성, 객관성, 다양성 운운하며 전문성의 영역을 거기에 한정시키고 사태를 비껴가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 언론전문가들이다. 대학에서 언론학이나 신문방송학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전문성을 저당잡힌 채 언론의 나팔수가 되는 전문가가 있는가 하면 K, L 씨 등처럼 아예 드러내놓고 극우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외설스런 커넥션의 중심부에 서있는 중앙일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언론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과 언론의 외설스러운 커넥션 관계이다. 이 커넥션이 삼성이라는 재벌-언론-검찰의 커넥션, 황금박쥐-황우석-YTN-대전지역주의 등의 대형커넥션보다 미미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언론전문가라는 몸으로 언론 자체를 비호하는 것은 언론이 담당해야 할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일이면서 다른 대형커넥션들이 우리 시대에 버젓하게 활보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을 제공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비평은커녕 전문가들의 언론커넥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에는 언론이 국가권력과 은밀한 커넥션을 구성했다면 이제는 언론이 재벌권력과 커넥션을 꾸리는 시대다. 언론의 신자유주의시대인 셈이다. 이 상황에서 전문가를 자처하는 언론학자들이 벌이는 활동의 범위는 스스로 한계 지워질 수밖에 없다. 언론비평, 언론감시기능을 전문가들로부터 기대할 수 없는 구조가 있다는 말이다.

LG가 1995년에 상남언론재단을 만들고 삼성이 1996년에 언론재단을 만든 것을 보면 언론학자라는 전문가-재벌-언론의 커넥션을 쉽게 상정해볼 수 있다. 최한수 참여연대 개혁팀장에 따르면 웬만한 방송언론사의 사장급 인물들이 삼성언론재단 이사진에 포진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성X파일' 사건이 터졌을 때 이 사건이 신문 1면에서 사라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국가권력과 재벌의 외설스러운 커넥션에 대한 언론비평은커녕 비평의 장 자체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한국사회는 삼성X파일, 황우석 사태 등 여러 가지 커넥션들의 파도를 넘어 지방선거, 독일월드컵 등 밀려오는 파도를 맞이할 것이다. 그 때마다 전문가들이 나타나 칼럼, 시평, 광장 등을 메우며 발언대에 설 것이다. 자기들에게 지면을 제공한 신문사에 대해서는 애써 함구무언 비껴가면서 말이다. 보도의 공정성 등이 전문성의 내용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런 것들이 언론전문가라는 '존재의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는 단어들 아닐까? 
 
* 글쓴이는  대구가톨릭대·노어노문학과 교수이며, 고려대에서 '바흐찐과 타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도시에 가다> 등의 저서가 있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교수신문>(www.kyosu.net)에서 제공한 것이며, 본문의 제목은 원제와 조금 다르게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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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4/12 [13:2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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