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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회적 주체 다중, 그 두려움과 불안
[책동네] '포스트-포드주의' 속 '다중'의 잠재력 갈파한 비르노의 '다중'
 
벼리   기사입력  2005/03/10 [14:42]
▲A. 네그리     ©벼리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 이후 자율주의는 유령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자본은 유령이 됨으로써 더 강력해진 이 한 무리의 급진좌파 그룹들에게 ‘테러리즘’이라는 범죄적 시혜를 베품으로써 그들이 감옥 안에서 그리고 정치적 망명을 통해 이론을 벼루어낼 수 있도록 했다. 멍청하고 귀여운 부르주아들이라니. 그러나, 그 중에는 부르주아 의회정치로 투신하는 축(쎄르지오 볼로냐)도 있었고, 발전적(?) 해체를 통해 구좌파 그룹의 일원으로 회귀한 축도 있었다. 어쨌든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은 이들 자율주의 오빼라이스모 그룹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일정한 분화과정을 통해 상당한 인물들이 전세계적인 공명을 얻고 있는 것도 또한 명백하다.


우리는 얼마 전 열린 ‘세계사회포럼’의 기사 한 꼭지로부터 네그리의 강연에 모인 청중들이 어떤 다른 강연자의 청중들보다 많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유령이 그 권능을 발휘하는 것은 1848년의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명쾌한 감성으로 모여든 포스트-포드주의 <일반지성>의 <다중>들에게도 일관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책상머리에 앉아서 곧장 ‘혁명’을 외치지는 말자. 즐겁게 삶을 향유하는 것과 축제와 더불어 ‘혁명하기’가 산뜻한 의미에서 유령의 새옷과 새집이 되게하는 것은 그리 오랜 인내를 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차분한 낙관주의만을 ‘음험하게’ 간직해 보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그건 실천이면서 노동이고, 축제면서 혁명인 그런 시대의 <기분>이다. 더 이상, 국가이성으로 귀결되지 않는 다중의 지성이 펼쳐낼 이 전복의 상상력은 더 이상 ‘현실태’가 되기를 기다리는, 또는 ‘혁명의 만조기’를 기다리는 그 민중의 ‘가능성’이 아니다. ‘잠재성’이란 그런 기다림이 오기 전에 이미 현실화되어 있다. 혁명의 시제는 언제나 ‘전미래시제’이기 때문이다.

 

네그리와 더불어 포스트-포드주의 ‘다중’의 이러한 잠재력을 이론적으로 펼쳐내는 빠올로 비르노의 노고는 그래서, ‘글쓰기’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네그리가 『제국』의 한 부분에서 말했다시피 <경향성의 한가운데>에서 이 새로운 주체성의 도래를 ‘선포’함과 동시에, ‘독려’하는 작업의 일부이다. 마치, 당대에 막 발흥하던 맑스의 유령으로서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1848년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거친 구호를 받아 안고 비로소 ‘사회적 주체’가 되었듯이, 비르노에게 ‘다중’은 그 실천적 함의를 떠나서는 도대체 제기될 가치조차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일어나는 흔한 오해란, 다시 말해, ‘도래’만을 기다리는 한 무리의 ‘인터네셔널’ 그룹에게는 이상한 악몽과 같다. 아니, 그래서야 어찌 ‘다중’이 맑스주의적인 ‘과학성’을 담보하겠느냐는 것이다. 일거에, ‘헛소리’이며, ‘분열책동’이 되는 것으로서의 이유치고는 상당히 익살맞은 것이기도 한 ‘오해’란 따라서 일종의 ‘관성에 집착하는 불안’에서부터, 또는 좀 더 심하게 얘기하자면, 이론전 고답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혁명론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중의 권능     ©벼리
따라서, 비르노가 이 책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바는 뚜렷하다. ‘사회적 주체’로서의 ‘다
중’의 테제를 첨예화하는 것. 그러려면, 우선 오래된 유물들을 책상 위에서 치워버림으로써 쟁점의 날을 세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중> 개념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판 작업이 ‘다중’ 개념에 대한 융숭한 대접을 동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르노에게 <민중>은 해묵은 것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다중’이 ‘민중’보다 더 풍부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 ‘빈곤함’이 역설적으로 이제 막 ‘도래’하는 주체성에 대한 ‘독려’와 수행력이 되게하는 그 본질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것은 ‘민중’ 개념을 사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에 새로운 함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중’은 그 자신만을 증인으로 소환할 수 있는 미래완료의 주체성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르노에게 중요한 시금석이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잡담>과 <호기심> 등의 개념이 중요해 지는 것은 오직 이런 의미에서다. 모든 것은 ‘다중’의 잠재성에 의해 비판될 것이다. 아렌트의 <정치의 노동화>라는 테제는 <노동의 정치화>에 의해 전복된다. 하이데거에 의해 채택된 현존재분석은 비르노에게 ‘다중’의 한 속성으로 ‘긍정’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계를 그어 놓았던 <공통의 장소>와 <특별한 장소>의 이분법은 경계의 소멸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비르노의 ‘다중’은 바로 1968년의 낭떼르와 이탈리아 삐아트 노동자들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이지,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이나 이탈리아 공산당의 상집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천 속에서터져 나왔으므로, 당연히 지금까지의 노동정치적 담론들을 전복하는 힘을 가질 것이다.     

 

이를테면, 급진적 언사로 자신을 치장하는 의회사회주의자들의 립서비스란 이런 경우 경멸의 대상이다. 투쟁에 대한 심각한 크레틴병 증상에 시달리는 이 한꾸러미의 좌파 데모고그, 또는 지식논공상들이 68년 프랑스와 69년 가을의 역사적인 기점에서 반동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회적 주체성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무능력이 이들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분명하다. 이후 전세는 역전되었고, 이들 도둑고양이 무리들은 여전히 자본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거기서 뭔가 야릇한 음식물(예를들어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임무’ 따위)을 찾기를 고대하면서 여전히 의회찬가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다. 하여간 우리가 이 무리들에게그리 많은 노고를 투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지금 작렬하는 ‘다중’의 주체성과 그 전대미문의 역동성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대상에 대한 비르노의 시선은 상당히 엄격하다. 그것은 비르노 스스로가 부여한 이론적 금욕성이기도 하고, <열광적인 단순화나 피상적인 축약>(45)으로 인한 전략적인 실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르노에게 ‘다중’은 일의적으로 규정되거나 단순화될 수 없는 <양가성>이다. 즉, <다중은 존재양식이며, 그것도 오늘날 만연해 있는 존재양식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양식과 마찬가지로, 다중은 양가적이다. 다시 말해서 다중은 자신 내부에 상실과 구원, 묵인과 갈등, 예속과 자유 등을 모두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46) 그러나, 과거로의 퇴행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요점은 이러한 양자택일의 가능성들이 민중/일반의지/국가라는 성좌 안에서 나타났던 것과는 상이한, 특수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같은 쪽)

 

여지없이 화살은 ‘민중’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과녁은 ‘다중’의 본질적 실재를 밝혀 놓는 쪽으로 갈수록 더 나은 결과를 내게 될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열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테제는 부정적인 외양과는 달리 ‘다중’을 정의하는 가장 그럴듯한 속성 중에 하나가 된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붕괴했다는 것이야말로 이 ‘두려움과 불안’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현상이다.

 

통상 우리가 포스트-포드주의라고 부르는 자본주의 구성체에서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의 구분은 없다. 네그리가 아주 명민하게 꿰뚫어 본 바와 같이 ‘삶/여가’를 지배하는 자본의 시계는 공적인 노동의 시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지옥’과 사적인 향유의 시간을 구분해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노동과 여가는 완전히 겹쳐진다. 따라서, <안정적인 ‘내부’와 불확실하면서도 지상에 있는 ‘외부’를 현실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삶의 형태의 영속적인 가변성(verialité) … 그러므로 두려움과 불안은 완전히 포개진다.>(53) 이것을 우리는 비르노와 함께 <혼란스러움perturbant>의 양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세계사회포럼     © 벼리

다중이 처한 상황이 이렇게 될 때, 다중은 새로운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게 된다. <지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에 노출된 ‘지성’이며, 발산하는 <일반지성>과 같다. <내 관점에서는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 다중이 공연하는 악보는 지성이라고, 즉 유적 인간 능력으로서의 지성이라는 점을 나는 결코 주저하지 않고 말하겠다. 맑스의 용어를 따르면 근대적 거장의 악보는 일반지성, 즉 사회의 일반적 지성이며, 사회적 생산의 중심축이 된 추상적 사유이다.>(109) 다중의 악보인 일반지성은 이렇게 해서 맑스의 ‘기계’로부터 탈주하여 사회적 중심들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전사회적인 공통성의 장소가 된다. 그 장소는 그리스의 아고라와 같다. 온간 잡담과 수다스러움이 난무하는 곳. 따라서, 언어는 다중의 악보에 쓰여진 음표들이며, 이렇게 해서 <일반지성은 정신의 추상화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실질적 추상화이게 되는 바로 그런 단계>(111)로 진입한다.

 

그러나, 여기 중대한 문제가 있다. 이때, 일반지성은 다중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나자 마자 소외된 상태에 있다.  부당한 탈취. 자본주의하에서 이러한 ‘탈취’는 ‘소유권(저작권)’이라는 법리적 사기수단에 의해 정당화될 것이다. 이제, 인간의 노동역량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적본질 자체가 착취의 대상이 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닌 가장 유적인 소통과 인지 능력을 작동하게 하는 것(그리고 이득을 얻게 하는 것)은 역사적 지표, 역사적으로 결정된 형태를 갖는다. 오늘날 일반지성은 임금노동의 영속화로, 위계적인 체계로 잉여가치 생산의 정점으로 표방된다.>(115) 부르주아지의 기생본능은 매우 끈질긴 것이다.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들의 본질 자체(기생)가 취약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숙주가 영양공급을 거부하는 사태에서 기생충들은 모조리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불복종>과 <탈주(엑소더스)>가 진정한 의미에서 ‘파괴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르주아 사법체계에 보기 좋은 구멍을 뚫어버리는 힘이 이것이다. 네그리가 말했던 다중의 ‘야만성’, 스피노자적 역능(puissance)의 구현도 또한 이것을 의미한다. 삶-정치를 통해 파고드는 제국의 촉수를 일시에 태워버리는 힘이란 소통과 자율성에 의해 형성된 다중의 잉여를 기생충들에게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행위에 의해 가능하다. <탈퇴는 이러한 잉여를 자율적이고 긍정적이며 가장 고귀하게 표현하며, 이러한 잉여가 국가 행정 권력으로 ‘양도’되는 것을 훼방하거나 이러한 잉여가 자본주의적 기업의 생산적 원천으로 배치(configuration)되는 것을 방해한다.>(123) ‘양도’에 대한 거부, 또는 잉여가치의 전유에 대한 욕망. 

 

그리고, 비르노는 책의 말미에 다중의 속성들을 테제화함으로써 독자들의 인식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테제 1. 이탈리아에서 포스트-포드주의(와 더불어 다중)는 일반적으로 ‘1977년 운동’으로 지칭되는 사회적 투쟁과 함께 출현했다. 

테제 2. 포스트포드주의는 맑스의 「기계에 관한 단상」의 경험적인 실현이다. 

테제 3. 다중은 그 자체로 노동사회의 위기를 반영한다. 

테제 4. 포스트-포드주의적 다중에게서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모든 질적인 차이는 사라진다. 

테제 5. 포스트-포드주의에서는 ‘노동시간’과 훨씬 더 긴 ‘생산시간’ 사이의 항상적인 간극이 존재한다. 

테제 6. 포스트-포드주의는 한편으로는 극히 다양한 생산모델들의 공존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으로 동질적이라 할 수 있는 노동 외부의 사회화에 의해서 규정된다. 

테제 7. 포스트-포드주의에서 일반지성은 고정자본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하게는 산 노동의 언어적 상호작용으로 제시된다. 

테제 8.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역량 전체는 가장 숙련되지 않은 노동마저도 포함하는 지적인 노동-역량이며, ‘대중의 지성성’이다. 

테제 9. 다중은 ‘프롤레타리아화 이론’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테제 10. 포스트-포드주의는 ‘자본의 꼬뮤니즘’이다.>(168-191) 

 

이 테제들은 빠올로 비르노의 ‘다중’이 책의 원제목(A Grammar of the Multitude)이 암시하는 바로서의 그 문법(Grammar)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통찰력을 담고 있는 이 테제들의 가치는 이후 우리가 생생하게 감각하게 될 ‘다중’의 <탁월한 기예>와 정치와 투쟁에 의해 실증될 것이고, 실증되고 있으며, 아마 많은 것들은 이미 이루어졌다.<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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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3/10 [14: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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