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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인물과 풍경, 사진으로 도발하기
[책동네] 인간의 진실, 현실을 사진으로 잡은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
 
벼리   기사입력  2005/02/20 [20:03]
▲최민식 사진글, 현문서가, 2004     © 벼리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언어로 되살리며 독일 시인인 파울 첼란은 <진실로 말하는 자는/어둠을 본다>(『죽음의 푸가』 중)고 했다. 인간 카니발리즘의 정점에 선 시인의 감수성은 고통을 통해 지옥이 도래했음을 단박에 깨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옥의 집정관들이 현실을 냉혹하게 집행하고, 또 다른 방관자들이 피해자들로부터 등을 돌릴 때, 예술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모양으로 그 당사자들을 불러 세우는 법이다. 현실은, 따라서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이 고통과 가난과 죽음의 현실일 때는 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누구보다 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란한 자본의 거리에서, 또는 시시각각의 정보들 속에서, 바쁘게 뛰어가는 일상 속에서 말이다. 우리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데 너무 익숙하다.

 

최민식은 그런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주의에 직설적으로 말을 건다. 아니 다가와 단숨에  목을 잡아챈다. 이럴 경우 완곡하게 에둘러 충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안다. 사진이 곧 그렇기 때문이다. <사진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할 때, ‘거짓’은 하루에도 수 천 수 만 장이 소비되는 광고 전단지 속의 예쁜 배우들의 몸매와 얼굴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하긴, 사진 자체가 리얼리티는 아니다. 그러나, 사진은 리얼리티를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다.

 

▲가난한 자들의 시선     ©벼리
그렇다면, 인간의 리얼리티는 어디 있을까? 최민식은 그것이 주로 얼굴에 나타난다고 보
고 있다. 환하게 웃는 어린애들로부터 일에 찌든 노동자들의 피로한 얼굴과 세월의 강이 흐르는 노인들의 주름살에 이르기까지, 얼굴은 인간적 개별성이 첨예하게 표현되는 리얼리티의 장소다. 그리고, 최민식은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표정의 사건들 중에서 가장 환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포착한다. <빛과 인물과 풍경이 하나가 되는> 그 지점. 최민식이 사진을 통해 기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따라서, 한국전쟁 종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흔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그가 올곧게 추구한 것은 삶을 치장하는 기술이 절대 아닐 것이다. 삶의 본성은 ‘벌거벗은 것’이다. 완전한 ‘날것’으로서의 삶, 그 순간이 바로 삶의 절정이며 사진의 리얼리즘이 담아야할 최고의 순간이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난한 사람들, 불구인 자들, 고아와 노숙자들. 최민식의 사진이 놀라운 것은 이들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가? 철학자 레비나스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타자의 시선이며, 우리는 그 시선을 똑바로 대할 때 신성하고 초월적인 윤리적 경험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비참한 자들의 시선을 피해간다. 그들이 어떤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짐짓 경원시한다. 위선인 것이다. 사진은 위선을 참아낼 수 없다. 그들, 민중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의 시선은 최민식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사랑     © 벼리
여기에 최민식의 현실인식과 사진에 대한 역사적 책무라는 것이 놓인다. 이쁘고, 보기 좋은 것을 담아내는 사진은 사진의 본령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참 무던히도 흑백의 이미지만을 찍는다. 색깔이 아닌 명암이 삶과 죽음의 대척점에 서 있는 민중들의 의식을 표정으로 포착하는 데 긴요하다. 만약, 사진이 이 본래의 책무를 망각한다면 사진은 죽는다. 아무리 색감이 뛰어나고, 보기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은 이미지만의 잔치일 뿐이다. 역사의식과 민중에 대한 애정과 사려가 담기지 않은 것은 최민식에게 ‘상업사진’일 뿐이다. 그리고, 화려한 기교와 초현실적인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류에 따라 작가의식에 옷을 바꿔 입히는 짓을 마뜩찮아 하는 이 혈기왕성한 고령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기교도 색감도 아니고, 그 철학의 깊이일 뿐일 것이다.

 

▲사진작가 최민식     © 벼리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에 실린 80여장의 사진과 그의 글들은 이와 같은 철학으로 보여지고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난해하지 않고, 다만 ‘도발’하는 철학. 우리는 그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나 책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예술의 진정한 급진성(radicality)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파괴하지 않고 파괴하는 법을 최민식은 알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궁륭을 날아다니는 예술은 숭고하지만, 삶의 모순에 도발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창을 헤매는 예술은 어둠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도발’한다. 그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민식 사진의 고귀한 ‘권능’이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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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2/20 [20: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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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오 2005/02/22 [11:34] 수정 | 삭제
  • 사진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했나요? 최민식의 사진은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 밑바닥의 삶을 단지 찍엇다 해서 그의 사진을 진실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래 전의 가난과 지금의 가난은 사진 속에서 그 차이를 잡아내야 합니다. 다시 들여다 보니 올려진 사진들과 책의 겉표지 사진은 40년도 넘은 우리나라의 가난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의 사진은 당시 리얼리티로 간주돼 외국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한편 우리의 낙후한 모습만을 찍었다고 해서 또 다른 부정적 평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최근 사진들로 책이 만들어졌다면 그래서 그로서 평가했었어야 하는데 아니군요. 가난을 아무데나 대입하는 것, 외국인의 눈에 후진국의 비참한 꼴로 보여지는 그런 눈초리와 다라르 게 없다 이거지요. 벼리님, 이 점을 생각해서 다시 한번 이 책과 최민식의 사진을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 노오 2005/02/22 [11:24] 수정 | 삭제
  • 최민식 사진은 부산 자갈치 시장의 40년 전 사진들일 겁니다.
    요즘 살기 힘든다고 하니 그의 사진이 부각되고 동아일보의 미술관에서 기획사진전도 가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사진은 분명 빼어납니다. 그러나 리얼리티는 시대에, 시간에 맞춰져야 하지요. 그의 사진은 우리의 못사는 과거의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진은 외국 특히 독일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헤일로 폐허가 된 사진을 보고 잇는 우리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의 사진은 시대와 함께 묻혀져야 하는 데도 의도적으로 재탕이 되고 있군요. 지금의 리얼리티는 무얼까요? 적어도 최민식 식의 사진은 지금의 리얼리틱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한 사진가가 요즘 어렵다는 세태를 반영하는 듯이 보이지만 40년전 사진으론 아닙니다. 사진가가 기획자의 손에 놀아나고 잇는 게 아닌가 참으로 염려스럽군요. 리얼리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 되겠군요. 리얼리티를 아무 데나 대입을 하면 오히려 리얼리티의 참 의미의 오류가 생깁니다. 그런 것이지요. 인권위원회에서 낸 최근 사진집에도 최민식 사진이 들어있던데 과거 40년 전의 가난은 우리의 일상이지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가난을 인권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시장통의 가난이 아니라 소외겠지요. 그 소외에 카메라의 포커스가 맞춰질 때 리얼리티일 수 있는 거고요. 작금의 최민식 사진의 재탕은 이래서 여러가지로 염려가 됩니다. 이 점을 간과하고 보셨군요.
  • 석산 2005/02/21 [05:06] 수정 | 삭제
  • 그 따뜻한 마음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