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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예술적 무지만 탓할 것인가?
[정문순 칼럼] '그때 그사람들' 삭제결정은 독재체제 사고방식의 연장
 
정문순   기사입력  2005/02/14 [19:35]

나는 10.26사건 하면, 신문 머릿기사 제호로 큼직하게 박혀있던 '有故'라는 글자부터 떠오른다. 뜻도 모르던 낯선 한자말이 당시의 어린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때의 파동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가을 운동회를 기다리며 올려다보던 맑은 하늘은 잿빛으로 보였을까. 또래 아이들과 함께 목놓아 울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지만, 그런 반응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코흘리개들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 앞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펑펑 우는 것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밖에 놀란 가슴을 가라앉힐 수 없었던 것이 내 세대다.
 
10.26사건이 남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내게는 어린 세대에게까지 경악과 충격이라는 것을 접하게 해준 세상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것이 거사든 시해든 중요하지 않다. 하필이면 어린 감수성을 헤집어놓았던 험한 세상에서 자라야 했던 내 세대에 대한 연민이, 현대사 최대의 사건을 이해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다.
 
10.26을 기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텔레비전에 당시의 정황과 관련지어 소개되는 자료화면에서 꼭 빠지지 않는 것은, 일이 터진 뒤의 현장검증 대목이다. 사건의 주인공이 초췌한 표정으로 포승줄에 묶인 채 권력자의 심장에 총부리를 겨누는 화면은, 사건을 오로지 한 사람의 불장난이나 야욕으로 받아들이게끔 종용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식의 관점은 당시 권력의 공백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시각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두환 체제 때는 사건 수습을 한답시고 대중 앞에 처음 선을 보이던 그자의 얼굴이 자주 화면에 비췄다.
 
10.26과 관련하여 내 기억창고에 들어 있는 것이든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든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강변할 생각은 없다.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기억이나 재현은 사실 그대로를 옮겨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쓰지만, 이 말은 옳지 않다.
 
어떤 재현이든 창작자의 '왜곡'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다. 사실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실 그대로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기억이나 재현은 어디에도 없다. 
 
▲박정희의 암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한 장면     ©임상수 필름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개의 진실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창작자는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최대한 가깝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같은 창작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역사책이라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기록필름이라 하더라도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26의 실상을 낱낱이 알려주는 완벽한 원본이 아직 우리에게는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역사책이라 할지라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러한 상식이 유독 지금의 대한민국 사법부에는 먹혀들지 않는다. 영화에 가위질을 명령한 법원은 관객이 사실과 허구를 혼동할 우려가 있다고 걱정해주고 있지만 작품에서 사실이냐 허구냐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영화에서 사실처럼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감독이 주장하는 사건의 진실이며, 이는 전적으로 수용자의 평가에 맡겨져야 할 몫에 불과하다. 법원이 진정 관객의 심미안을 염려한다면 그들의 판단력을 존중해주는 것이 순리이다.
 
임상수 감독은 다큐멘터리도 허구의 산물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원의 태도가 안타깝다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사법당국의 문제는 다큐멘터리에 까막눈이거나 문화적 안목이 유치한 데 있다기보다 자신들이 믿는 사건의 진실이 '원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렵다는 데 있다. 희대의 사건에 관한 한 대한민국 법원이 판단하는 '원본'이 있을 수 있고, 임상수 감독이 생각하는 '원본'이 있을 수 있다. 박아무개를 나쁜 놈으로 낙인찍은 영화가 싫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법원이 자기 것이 옳으니 제 말을 들으라고 남에게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독재 체제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사법부만 '겨울공화국'에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여론조사를 찾아보니, 애매한 가능성을 내세워 개인의 창작물에다 감히 사법당국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데 찬성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국가기관이 제 마음에 안 드는 작품에 가위질을 명령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람들의 태도야말로 어쩌면 비민주적 체제가 낳은 가장 비극적인 유산일 것이다.
 
스스로의 판단 능력을 믿지 않고 법원에 결정을 미루어도 좋다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지긋지긋하게 살아있는 독재자의 망령을 읽는 건 무리가 아니다. 독재자를 다룬 작품에마저 독재 체제의 사고방식이 적용되는 현실이야말로 <그때그사람들> 같은 영화가 나와야 하는 이유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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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2/14 [19:3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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