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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재일조선인의 우울한 독서 편력
[두부독감 27] 일제와 한국 독재정권에 할킨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
 
두부   기사입력  2004/09/22 [18:59]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 - 에리히 케스트너
 
독서에 파묻힌 소년
 
1970년대 말, 영어의 몸인 서준식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저자에게 보냈을 때, 저자는 자신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다음과 같이 독서 행위를 정의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自己硏鑽)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저자 서경식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새겨진 그 무엇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의 모습과 한국 독재정권의 가혹함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 돌베개, 2004
‘재일조선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만 했던 저자의 독서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일하게 혼자만 재일조선인 학생으로 다닌 중학교 영어 시간에 “I am a Japanese”라는 문장을 배웠을 때 저자가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머뭇거려야만 했던 것은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신과 문화를 홀로 등에 짊어진 채” 살아간다는 것은 어린 소년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저자의 책 읽기는 일본 내에서 소수자라는 아픔과 슬픔을 상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저자는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라는 관념이 싹트게 된 것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과 ‘사춘기 교양 콤플렉스’에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독서 행위는 여느 어린 아이와는 사뭇 달랐다. ‘캠핑 따위보다는 집에서 책 읽기를 더 좋아했’고,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때에는 꾀병을 부려 집에서 네댓 권의 책을 읽기도 했다. 더군다나 야구 시합에서 정규멤버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이제 집에 돌아가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기까지 했다. 어린 그에게 안중근의 저 유명한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힌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라는 말은 평생의 화두가 되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호명한 작가와 작품을 한 번 일별해 보자. 저자의 독서 인생 최초의 책다운 책인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 쥘 베른의 『십오 소년 표류기』, 엘리자베스 루이스의 『양쯔강 소년』,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 다자이 오사무의 「추억」, 『현대시인선집』, 토마스 만의 『만의 산』, 루쉰의 「고향」ㆍ「아Q정전」「광인일기」,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등 어린 나이에 읽기에는 버거운 책들로 장식되어 있다.
 
저자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교실』의 주인공 마르틴 타라가 내뱉은 “절대로 울지 말자”는 말을 되뇌이며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추억」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능숙하게” 그려내 오랫 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것은 소설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끝없는 논쟁 뒤 /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숟갈을 홀짝인다 / 혀끝을 만지는 그 쌉싸름한 맛 / 나는 알겠네, 테러리스트의 / 슬프고도 애처로운 그 마음을.” 이것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코코아 한 숟갈」이라는 시인데, 여기에서 ‘테러리스트’는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또한 언젠가 꼭 정복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읽지 못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그래서 저자는 “나에게 『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지목한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문제만이 아닌 일본 사회에도 날카로운 눈을 벼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모국어로서의 조선어
 
▲서승은 ‘재담가’로, 서준식은 ‘탁월한 운동능력의 소유자’로 저자는 두 형을 기억한다(앞쪽에서부터 저자인 서경식, 셋째 형 서준식, 둘째 형 서승)     © 돌베개, 2004
1971년 박정희 정권은 4ㆍ27 대선을 열흘 앞두고 서승ㆍ서준식 형제를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그들이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했다고 하지만, 날조된 거짓말이었다. 이 사건으로 서승은 무기형을,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서승은 고통스러운 고문을 참지 못해 기름을 붓고 분신을 기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둘째 형인 서승은 대학에 갓 입학한 후 민단계 재일한국인 학생단체에 가입하여 한일협정 체결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동생에게 이야기보따리이자 재담가였다. 저자는 그의 셋째 형인 서준식을 “애초부터 탁월한 운동능력의 소유자”이자 “전도유망한 기계체조 선수”로 기억한다. 그런데 서준식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운동을 그만두고 ‘조선문화연구회’라는 동아리에 가입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들의 영향으로 저자는 자기 자신이 지리수업 시간에 일본의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논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일본인 아이가 일본은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하자, 그 아이를 루쉰의 「광인일기」에 나오는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일본과 서양의 책들만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독서에는 허남기 시인의 『조선의 겨울 이야기』와 김소운이 편역한 『조선시집』도 들어 있었다. 허나 ‘모국어 상실자’인 저자가 조선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조선인이었지만 조선어를 전혀 몰랐던 저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민족학급’ 시간에 조선어를 배웠고,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한국 이름을 썼다.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선포(?)한 셈이다.

▲‘모국어 상실자’인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 민족학급 시간에 조선어를 배울 수 있었다(왼쪽에서 두 번째 줄 세 번째 아이가 저자 서경식이다).     © 돌베개, 2004
 
당시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만사가 공정하지 못한 것, 조잡한 것, 어딘지 뒤끝이 씁쓸한 것, 볼썽사나운 그 무엇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그만큼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저자는 대한민국보다 ‘조선’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국가명일 뿐, 재일교포를 아우르면서 민족 전체를 총칭할 경우에는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해야만 하는 저자의 비애와 고통은 누구도 추량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서경식, 이목 옮김, 『소년의 눈물』, 돌베개, 2004년)은 단순한 독서 에세이가 아니다. 전경에는 어린 시절 자신을 지배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와 후경에는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암울한 어린 시절의 풍경화를 그려 놓고 있다. 이 그림 속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의 모습과 한국의 독재정권의 모습이 핍진하게 그려져 있고, 독재정권의 공작으로 두 형을 모진 고문과 고통 속에 남겨둘 수밖에는 없었던 동생의 애틋한 사랑도 배태되어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 겪은 경험들은 이후 그의 삶을 온이로 바뀌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부여한다.
 
“좋건 싫건 어린 시절 각인되어버린 그 무엇을 짊어진 채, 사람들은 수많은 괴로움과 얼마 되지 않는 잗다란 기쁨으로 수놓은, 인생이라는 긴긴 시간을 인내하며 살아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인생을 인내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깊숙이 아로새겨진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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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9/22 [18:5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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