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서현의 낯설게 하기] 그 형제들
형제의 이름은 서승, 서준식, 서경식
 
서현   기사입력  2002/10/04 [22:00]
- 서승, 서준식, 서경식 -


형제의 이름은 서승, 서준식, 서경식이다. 위로 맏형, 아래로 막내 누이가 있어, 형제는 모두 다섯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거치는 동안, 이 다섯의 삶은 고단했다. 형제들 중 서승과 서준식이 '독재의 감옥'에서 옥살이를 한 것이다. 옥살이는 언제 끝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남아있는 이들의 옥바라지 역시 끝없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 와중에, 모친과 부친이 차례차례 숨을 거뒀다. 서승과 서준식은 임종하지 못했다. 삶은 잔인했다. 말하자면 이들은 '시대의 밭에 묶인 농노'(서준식,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야간비행, 387쪽)였다.

[관련기사] 서준식의 '나의 주장'을 권함, 61호 / 임정일
[관련기사] 서준식, 나의 주장 (1), 62호
[관련기사] 서준식, 나의 주장 (2), 64호

1983년. 동생 서경식은 막내 누이와 함께 유럽으로 떠났다. 두 형의 옥살이가 12년째를 맞이하고, 모친에 이어 부친마저 세상을 떠난 해였다. 그와 그의 누이는 삶에 대해 반쯤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때문에 보통사람들에겐 '여행'이었을 그것이 그들에겐 '순례'였다. 서경식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렇게 시작됐다(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작과비평사, 8~18쪽).

그 순례 도중, 서경식은 빠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미켈란젤로의 '반항하는 노예'를 만났다. '반항하는 노예'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서경식은 옥중의 형에게 보낼 엽서에 무엇을 쓸지 생각했다. 지상의 숙명에 묶인 인간의 고뇌, 육체의 어두운 뇌옥에서 벗어나 영원을 움켜잡으려는 혼……. 쓰자면 쓸 것은 많았다. 그러나 서경식은 쓰지 않았다. 문득 그 '반항하는 노예'가 바로 옥중의 형들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서경식은 자신의 형들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서양미술 순례', 58~60쪽).

그 무렵, 옥중의 형 서준식은 '노예'의 결박을 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이었다.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이란, 쉽게 얘기해, 자신이 '노예'가 아닌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다. 서준식의 요구는 절실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거절당하고, 거절당하고, 거절당해, 모두 세 차례 거절당했다. 그 사이 서준식은 18일간의 단식, 51일간의 단식을 각각 한 차례 치러냈고, 시간이 흘렀다. 서준식은 24세이던 1971년 옥에 들어가, 41세 되는 1988년 옥을 나왔다. 그리고 2002년, 나는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읽는다. 읽고, 읽고, 또 읽다가, 결국 묻는다. 죄인은 서준식인가, 국가보안법인가. 아니면, 우리인가.

 
1985년. 동생 서경식은 그의 두 번째 '순례'를 떠났다. 워싱턴과 뉴욕을 거쳐 영국으로 간 그는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이라는 곳에 다다랐다. 의도한 방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서경식은 매우 예사롭지 않은 것과 마주쳤다. 그것은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였다. 등신대(等身大)보다 약간 작은 그리스도가 두 손의 손가락들을 오른편 옆구리의 상처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확 열어 보이는 상이었다. 마치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 와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이 말은 어쩌면 네가 나에게 한 일을 와서 직접 확인해보라는 것인 듯했다. 그러니까 서경식은 자기가 찌른 사람으로부터 "이리 와 네가 찌른 곳에 네 손을 넣어 보라"라고 듣고 있었던 것이다('서양미술 순례', 130~144쪽).

서준식의 '옥중서한'이 예사롭지 않게 읽히는 이유 역시 바로 이것이다. 비유하자면, 서준식의 '옥중서한'은 우리가 못박았던 시대가 손가락을 넣어 열어 보이는 오른편 옆구리의 상처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그 상처는 과연 누구의 작품인가. 로마 군병의 짓이라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에게 "저(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쳤던 것이 누구였던가. 가슴 아프지만, 예수를 못박은 것은 바로 유대 민중이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민중은 자신의 시대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갖는 법이다. 물론 서승과 서준식은 결코 이 뼈아픈 자각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과 존재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처럼 저절로 말한다. 이리 와 네가 찌른 곳에 네 손을 넣어 보라.

아무래도 내게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읽는 일은 그 시대의 상처에 내 손을 넣어보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많이 아팠다. 그 형제들, 서승과 서준식과 서경식의 삶의 기록 속에 파묻혔던 지난 9월은 스산했다. 그 스산함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는 있었다. 시대는 여전히 못박혀 있다. '독재의 감옥'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이제 '자본의 감옥'에 갇혀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삶은 변함없이 잔인하다.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 시대를 못박는 어리석은 민중이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10/04 [22:0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