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진보정당의 출현, 역사는 한뼘식 진보해
[데스크칼럼] 더디 가더라도 세상은 바뀌어, 세로운 세상 맞이할 준비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4/04/17 [10:18]

선거 기간 중 집으로 여당 입후보자 홍보물이 왔다. 지면 가득 붉은 띠를 맨 노동자 대열을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문구 하나가 눈에 띈다. “우리 창원이 노동 운동 거점 지역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말이 전부다. 거점 지역이 되면 뭐가 나쁜지, 노동자의 집단행동이 보기 싫으면 어떤 정책을 만들겠다든지 하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다. 이 지역에서 당선이 유력하던 민주노동당 후보를 염두에 두고, 노동운동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하는 유권자들의 숨은 심리를 건드려보겠다는 것이다.

아무런 논리도 이치도 없는 감정적 편견을 부추겨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기득권 정당들이 그동안 떡 먹듯 해온 버릇일 뿐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정책 대결이 실종되었다는 말은 많지만 처음부터 보수 정당들에겐 실종되고 말고 할 정책이 없다고 해야 옳다.

길 내고 다리 놓는게 공약

검은 돈을 끌어 쓰고 남의 약점을 내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밑지지 않는 장사를 해온 이들이 골치 아픈 정책 개발에 머리를 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역구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이라야 기껏 도로 닦고 다리 놓고 무슨 근사한 건물이나 시설을 세워주겠다는 것이 전부다.

시장이나 군수가 할 일을, 법을 만들고 행정부를 감시해야 할 국민의 대표가 하겠다는 것이지만 이런 변질도 지역 발전에 혹해 있는 주민들의 환상을 등에 업고 아무렇지도 않게 합리화된다. 한쪽에서는 여당을 밀어줘야 다른 지역을 살찌울 예산을 따올 수 있다는 말이 통하면, 영남에서는 여당을 견제할 힘을 한나라당에 실어줘야 그 지역이 손해 보지 않는다는 선동이 먹힌다.

▲추미애의원이 삼보일배중 주변사람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시스
변변한 정책도 비전도 없는 보수 정당들은 필요하다면 유권자에게 근거 없는 증오와 편견을 부채질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갖은 비방, 흑색선전은 말할 것도 없고 ‘감성 정치’의 결정판인 지역 정서를 건드리는 범죄적 행각도 제 철을 만난 듯 어김없이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 난파 지경에 이른 민주당이 호남에서라도 몇 표 건지겠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은 수구 언론들이 써먹기에 매우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추미애 의원의 애처로운 눈물을 부지런히 클로즈업한 미디어들은 마음 약한 그 지역 유권자들의 동정을 부추겼을지 몰라도 다른 지역에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불렀다. 뒤숭숭하던 대구 경북 지역의 민심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퍼뜨리고 다닌 지역 차별의 원흉 박정희의 주술이 먹혀드는 데 다시없는 호재가 된 걸 보면 밥맛을 잃는다.

그러나 당면한 사회적 현안을 물고 늘어지는 제대로 된 정책 정당이 기성 정치판에 없음에도 선거 기간 중 여당에 부쩍 기울어졌던 시민단체들의 행보는 이해하기 힘들다. <총선시민연대>가 발표한 낙선 기준에는 야당의 대통령 탄핵은 들어 있어도 정부·여당이 몰아붙인 이라크 파병은 제외되었다. 헌법 정신을 유린한 죄를 적용하자면 남의 나라에 침
략 군대를 보내는 것이 탄핵보다 덜하지 않다는 생각은 망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가 이미 전쟁터로 변했어도 파병 문제 재론하지 말라는 여당의 뻣뻣한 태도가 선거에 임한 정당답기나 한가.

진보정당에 거는 기대 크다

▲민주노동당 권영길대표의 모습     ©브레이크뉴스

보수를 내걸었고 개혁을 팔았을 뿐 진정 보수와 개혁과는 담을 쌓은 정당이 국회 좌석을 많이 차지하는 한, 나 같은 서민이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세상은 그만큼 멀어진다. 제도 안의 개혁과 제도권 밖의 진보의 대결 구도가 펼쳐지는 정치 판도는 언제쯤 이상에서 현실로 내려앉을 수 있을까. 그래도 비관은 그만 하자. 진보정당의 원내 입성이라는 끊어진 전통을 천신만고 끝에 회생시킨 대단한 동네에 살고 있는 나는, 역사는 조금씩 한 뼘씩이라도 나아간다는 단순한 진리를 이번 총선의 교훈으로 삼고 싶다. 여성 의석도 늘고 돈 살포도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더디 가더라도 세상은 바뀌며, 정책으로 다투는 정상적인 정치도 언제까지 희망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서 누군가는 만세 부르고 환호하고 있지만 그러나 마냥 좋아하지 마시라. 참여정부가 맨 먼저 손댈 일은 이라크 파병 군인 환송식이 될 터이니 새로운 싸움이 눈앞에 오고 있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 본문은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http://www.dominilbo.co.kr/ 4월 16일자에 실렸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4/04/17 [10:18]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