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이제는 '비판적지지' 망령에서 벗어나야
[주장] 우리당 과반의석 아닌 민노당 교섭단체 구성만이 정치개혁 촉진
 
홍기빈   기사입력  2004/04/12 [10:14]

87년 대통령 선거 이래 통일과 진보를 염원하는 민주 시민들의 투표 행태에 큰 영향을 끼친 화두가 소위 “비판적 지지”라는 것이다. 남한의 수구 기득권 세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비록 불철저하고 한계가 많더라도 기성의 보수 정당 중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세력을 밀자는 것을 그 골자로 한다. 이 “비판적 지지론”의 논리는 한국의 진보 정치 세력의 성장을 저해한 데에다, 이미 기성 정치 사회 체제에 기득권층으로 편입된 세력들에게 선거 때마다 “민주 개혁 세력”의 대표로 행세하는 것을 허락하여 민주 발전의 전선을 흐리게 하는 등 한국 정치의 정상적 발전에 막대한 폐해를 낳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비판적 지지”라는 원리로 실제 표를 던졌던 사람들의 마음 속도 가만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7,80년대 같은 시절 분단, 독재, 불평등한 사회 경제 구조 속에서 당장에 삶이 괴로운 사람으로서는, 정책의 내용을 따져서 자신에 맞는 정당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사치”처럼 느낄 수도 있었다. 아무 것이든 방패로 삼아 우선 눈 앞에 이빨을 드러낸 폭압적인 반민주 세력을 제어하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일종의 동물적인 “방어 본능”이 발동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였으니까.

요 며칠 간의 총선 상황이, 진실인지 허구인지의 여부를 떠나 한나라당의 급상승과 열린 우리당의 하락세가 추세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또 그에 따라서 “수구 한나라당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열린 우리당으로 결집해달라는 “눈물의 호소”도 함께 떠돌고 있다. 이 논리는 “사회의 개혁과 민주화를 위해서는 수구 세력을 제압하는 지상 과제이다”라는 전제를 내세워서, “모든 민주 세력은 힘을 합쳐 열린 우리당의 과반수를 이루어야 한다”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예전의 “비판적 지지론”과 동일한 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수구 세력의 제압이 현재의 지상 과제이다”라는 “비판적 지지론”의 전제와 정신을 인정한다 하자. 그 경우, 2004년의 현실에 있어서 주어지는 행동 과제는 “열린 우리당의 과반수 달성”이 아니고 “민주 노동당의 원내 교섭단체 구성”이다.

열린 우리당의 지지자들은 열린 우리당을 찍을 일이다. 민주 노동당의 지지자들도 민주 노동당을 찍을 일이다. 그런데 스스로가 딱이 어떤 정당의 지지자라기보다는 그저 수구 세력을 몰아내기 원하는 “범민주 세력”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민주 노동당의 원내 교섭 단체 실현을 당면 행동 전략으로 취해야 한다. “비판적 지지론”은 이제 “열린 우리당 과반수”에서 “민주 노동당 교섭단체 구성”으로 전화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수구 세력과의 싸움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이념도 정책도 불분명하여 끝없이 동요하는 보수 정당이 우글거려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숫자가 적더라도 강고하고 분명하게 사회 진보와 평화의 깃발을 지킬 수 있는 단단한 핵심을 의회 내에 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수구 세력과의 싸움의 현단계이다.

먼저, “눈물로 호소”하며 표를 애걸하고 있는 열린 우리당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보자. 54년 조병옥(조순형 부친. 제주도 학살 당시 경찰 총수)이 민주당은 이승만 이상의 극우 정당이었다. 이 집단의 집결 원리는 단 하나. “정책이고 이념이고 집권을 목표로 뭉친 잡색군”라는 것이었다. 이 “파당성”이 한국 보수 정당의 전통적 특징임은 숱하게 지적된 바이다. 그런데 열린 우리당은 그 “파당성”에 있어서 기존의 보수 정당들을 훨씬 능가하는 집단이다. 그 전의 보수 야당은 폭압적 군부 독재와의 대결이라는 긴장, 그리고 김대중과 같은 탁월한 정치인의 존재 덕분에 집단 전체에 도덕성, 통일성, 또 일정한 정책적 내용을 최소한의 수준에서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의 보수야당들이 “재야”나 운동권에 자신들에 “비판적 지지”를 해달라고 호소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그러한 최소한의 집단적 정책적 정체성에 있었다.

그런데 2003년에 급조된 정당인 열린 우리당은 그러한 최소한의 정체성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김대중을 호랑이로 친다면 노무현, 정동영, 유시민 등등은 정책적 내용의 제시의 면에서 토끼의 평가조차 받을 수 없다. 아예 유시민 같은 이는 “정책 면에서 보면 새천년 민주당을 답습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김대중 시절 이하이다. 김대중 정권의 정책적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뚜렷하고도 긍정적인 요소였던 대북 외교 정책마저 노무현 세력은 완전히 무시해버렸고, 아무런 새로운 원칙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되레, “한미 공조 즉 국익”에 기반한 “이라크 파병”이 명시적 정책의 전부이다.

인적 구성의 면에서 보면 더욱 더 모호하다. 노무현 자신을 필두로, 소위 “천정신”을 거쳐 유시민의원까지 그 주력 세력은 철저하게 김대중 정권 시절 민주당의 “호남 기득권”을 십분 누려 의회에 진출한 “작대기”들이다. 게다가 여기에 “전국 정당 건설”이라는 명분으로 영남의 한나라당 출신 인사들을 대거 결합시켰다. 알쏭달쏭한 글발과 방송 영화 경력을 배경으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은 “개혁 인사”들과 개혁 국민 정당을 내건 “개혁당 개미”들이 들어왔지만, 그 옛날 “민주당”과 “영남 세력”이 주축을 이룬 판에 소위 상향식 공천 등등 정당의 인적 구조적 혁신은 별로 실현된 바가 없다.

이렇게 가지가지의 사연을 가진 색색의 잡색군은 왜 같은 깃발에 모여 있을까. 이것이 열린 우리당의 성격에 대한 최대의 미스테리이다. 명계남 문성근 등 제씨가 총선도 벌어지기 전에 “분당”을 운운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간다. 아마 정답은, “뚜렷한 정책이나 이념은 없더라도 노무현 정권에 여당으로 참여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이 함께 모인 집단”이라는 것이 공정한 평가라 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이유로 열린 우리당을 마구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대통령의 공언대로, 애초에 열린 우리당은 “2급수” 정당을 표방하며 나온 보수 정당이므로, 그 평가의 잣대는 자민련 등 같은 반열의 보수 정당들로 삼는 것이 공정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우리의 촛점은 열린 우리당이 좋은 정당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열린 우리당의 근본적 성격이 “수구 세력과의 싸움”이라는 비판적 지지론의 지상 명령에 과연 어느 만큼 복무할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2003년 3월 이후 현재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분명한 점은, 이렇게 무정형의 아메바처럼 흐느적거리는 열린 우리당의 파당적 성격 덕분에 수구 집단을 고립시키는 국민적 공감대와 전선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 직후 거의 “궤멸이 임박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의 타격을 입었었고, 또 바로 며칠 전의 탄핵 정국에서도 “이제야말로 끝장이다”라는 말이 나온 바 있다. 그런데 최근의 소문을 들으니 여전히 건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과반수를 넘보고 있다고까지 한다. 도대체 무엇이 궤멸 직전의 한나라당을 이렇게 끝없이 회생하도록 만들고 있는가. 그 대답은 바로 이 아메바처럼 흐느적거리는 파당성의 집단 열린 우리당이다.

지난 과정을 가만히 짚어보자. 2003년의 벽두, 한나라당은 이제 국민적으로 “박물관으로 가야할 구닥다리” 정당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2002년의 대선은 사실상 수구 세력이 표방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국민적 차원에서 뚜렷한 부정을 표현한 사건이었다. 당장 그 당시의 언론 기사들을 검색해보라. 70대 전 통일원 장관에서 40대 여성 문학 평론가를 거쳐 20대 까부라진 신세대까지 모두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들로 뒤범벅이다. 즉 별 생각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수구 세력”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평화 개혁 진보란 무엇인지에 대한 국민적인 합의 그리고 전자에 대한 거부와 후자로의 지향은 87년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적 전선이 무너지고 다시 한나라당이 회생하여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다름아닌 노대통령이 통과시킨 “대북송금 특별검사제” 때였다. 이 사건은 2002년 대선에서 수구 세력과 국민 대중을 갈라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던 평화  "통일 - 아시아 지향의 노선과 냉전" 분단 - 대미 의존 노선의 쟁점을 완전히 흐려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후 “개혁”과 “수구”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 것인지를 선명히 보일 수 있는 구체적 기회였던 NEIS, 비정규직 문제, FTA, 언론 개혁, 2차에 걸친 이라크 파병 등등의 쟁점에서 노무현 세력은 아무런 정책적 대립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이 했었던 확실한 이벤트는, 그 어처구니 없는 “재신임” 이벤트 뿐이었다. 결국 정책의 면에서 대부분의 경우 한나라당의 당론이 곧 국가 노선의 주도권을 쥐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남한의 “수구 세력”은 냉전과 분단이라는 엄연한 남한의 역사적 현실을 업고 그에 따른 물질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다. 따라서 그 세력이 내걸고 또 노리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째서 우리 대다수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것인지를 국민들이 또렷또렷하게 각인하게 만들지 않는 한 또 그러한 집단적 인식에 근거하여 집단적 실천을 현실로 만들어 내지 않는 한 이들의 현실적 존재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수구 척결의 절호의 기회로 주어졌던 2003년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우리 사회 모든 면 모든 쟁점에 걸쳐 개혁과 진보의 뚜렷한 내용과 방향을 잡아내어 그를 통해 한 줌의 “수구 집단”을 명백히 밝히고 고립시키는 “전선의 확장”이었다.

그런데 열린 우리당은 앞에서 본 대로 그 극도의 “파당성”을 근본적 한계로 삼는 집단이다. 따라서 “자기 세력의 확장”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의도와 능력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없는 집단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말았다. 이 집단이 청와대를 필두로 갖은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니, 지난 1년간 “전선의 확장”은 커녕 일껀 일구어 놓은 전선조차 무력화되고 말았던 것은 아주 필연적인 결과였다.

탄핵 정국 이후의 최근의 사태 진행의 형국은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2003년의 한국 정치의 흐름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탄핵이라는 폭거는 누구의 선동도 없이, “수구” 세력에 대한 범국민적인 분노를 자생적으로 행동으로 폭발시켰다. 총선이 15일 후로 다가온 상황이었으니, 이 때야말로 2003년 아주 헝클어지고 말았지만 아직도 우리들 마음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반 수구 전선을 재생하여 궤멸시켜버릴 수 있는 일대 기회였다. 그런데 이 범국민적인 탄핵 규탄 싸움에 적극 결합하였던 것은 오히려 노정권과 일관되게 대립하던 민주노동당과 민중 운동 세력이었고, 열린 우리당은 오로지 총선에의 득표 연결에 대한 망상에 빠져 들고 말았다. 그리하여 실로 엽기적이라 할 “부자 몸조심”이라는 희한한 정치 공학적 논리로 입조심 표정 관리에 골몰하며 뒤로 빠져 버렸다. 이후 우리는 그 “열린 우리당 집권 = 개혁 완성”이라는 아전인수의 동어반복 이외에 수구와 개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이며 왜 개혁을 선택해야 하는 지에 대한 아무런 선전을 듣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체인지 페이스”로 맞서는 박근혜의 한나라당이 일정한 회복을 거두게 되어 있는데, 이 상황에서 기껏 나오는 논리가 기껏 “국민들에게 눈물로 호소하자”는, 추미애의 3보1배를 능가하는 역겨운 애걸이다.

이렇게 허약하게 흐느적거리는 “파당”인 열린 우리당을 과반수로 만들어 주어 본 댓자 무슨 결과가 나올 것인가. 오히려 수구 세력은 2003년과 같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더욱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이라크 파병, 재벌 개혁 등을 필두로 한 작년의 수 많은 쟁점들은 모두 한나라당이라는 수구와의 전선을 뚜렷이 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런데 그 때마다 열린 우리당은 “개혁 집단”이라는 허울을 쓰고서 한나라당과 동일한 정책 포지션을 취하여 모든 전선을 흐려버리는 첨병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열린 우리당이 국회에서 과반수가 아니라 3분의 2까지 얻는다 한들, 진정한 “반수구 전선”의 형성을 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수구와의 전선”을 최우선의 관심사로 삼는 “비판적 지지론”의 문제 의식이라면, 현재 어떤 방향을 도출해야 할 것인가. 지금 무너져 버린 수구 세력과의 전선을 회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가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 절실한 것은, 개혁과 진보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를 통해 수구와의 대립선을 확실하게 갈라낼 “등대”를 세우는 일이다. 그 “등대”는 아주 높지 않아도 좋고 그 불길이 아주 크지 않아도 좋다. 대신 비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풍랑이 아무리 거세도 항상 올곧고 일관된 불빛을 비추어서 개혁과 평화와 진보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 작년 한 해 우리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개혁과 진보를 바라는 다수의 사람들이 힘과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결집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 절실하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 국회에서의 민주노동당이 교섭 단체라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자.

예전의 “비판적 지지론”이 아주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두 번의 정권 교체 덕분에, 수구는 사회 전체의 지배적 주류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소위 “반 수구 범민주 전선”의 일정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곳곳에서 패퇴해야 했던 이 수구 세력의 권력은 조중동, 영남 지역주의 세력, 강남 기득권, 각종 관료 조직 등으로 후퇴하였고 그 거점들을 자신들의 최후의 보루로서 확실한 “진지”로 요새화하고 있다. 이런 조건 하에서는, 이번 탄핵 정국과 같이 단순한 “다수의 힘”으로 몰아쳐봐야 그 진지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한나라당의 부활에서 보듯, 그 바람이 지나고 나면 금새 힘을 회복하고 만다.

따라서 현재의 수구 세력과의 싸움은 그 “진지”들을 발본색원하여 해체하는 데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단단한 진지들을 깨어나가는 데에는, 크기만 하고 흐느적 거리는 도리깨 같은 도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작더라도 오롯이 손아귀에 들어와 돌이건 흙덩이건 암팡지게 깨어나갈 호미가 필요하다.

87년 이후 사회 전체에 걸친 수구 세력들과의 지리한 싸움이 계속되어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그 싸움과 전선은 점점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해왔다. 현재 우리가 닥친 바는, 그들의 깃들어 있는 진지 하나 하나와 악착같이 싸움을 붙어 파고 들어가는 전술을 채택해야 할 때이다.

이라크 파병 싸움 같은 예를 들어보자. “파병이 곧 국익”이라는 어거지를 마치 상식이나 되는 양 내밀었던 파병 세력은 외교부, 국방부, 청와대의 각종 관료 조직을 그 “진지”로 삼고 있었다. 몇 십을 헤아리는 당시 열린우리당(민주당도 마찬가지다)의 소위 “평화 세력”들은 무엇을 했던가. 성명서나 발표하고 별 진실성도 없던 단식 이벤트나 벌이다가 “당 방침 운운”을 구실로 흐지부지 흩어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어처구니 없는 내용의 “백지 파병안”이 국회에 올라온 상황에서 여물통 앞의 황소들마냥 줄줄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던가.

정말로 파병 저지에 진심을 가진 국회 의원이 20명만 있었어도, 그래서 그들이 교섭 단체 정도의 교두보만 확실하게 챙길 수 있었어도, 이렇게 일이 맥없이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정부의 편에 서서 전투병 파병을 부추기고 있는 세력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또 어디에 몰려 있으며 그들의 숨은 논리가 무엇인지를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을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사람들 앞에 낱낱이 알려서 평화 세력 전체가 향후의 싸움을 계속해 나갈 방향과 전략에 소중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 노동당의 모든 예비 의원들은 “최저 임금” 이상 액수의 국회의원 보수를 모두 당에 반납하기로 하였다. 이들에게는 또 대학 교수 등을 포함한 70명 이상의 전문 인력이 따라 붙는다. 이들 개인은 무슨 “이미지” 따위를 관리하지도 않는다. 왜냐면 1회라도 의원을 역임한 사람들은 지역구도 전국구도 모두 당의 추천 대상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 노동당이 20석을 확보하여 의회 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희망이 아니라고 보인다. 행간으로 읽는 최근의 여론 조사에서 이미 민주 노동당은 목표한 바의 전국 지지율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자. 열린 우리당 지지자들은 열린 우리당을 찍어야 한다. 민주 노동당 지지자들은 민주 노동당을 찍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를 특정 정당의 지지자라기보다 수구 세력의 제압을 원하는 “범민주 세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마땅히 민주 노동당을 찍어야 한다. 비판적 지지론”은 2004년, 분명하게 내용을 전화한다. 흐느적거리는 열린 우리당이 과반수를 얻는 것 대신, 작더라도 단단한 핵심을 일구어 낼 수 있도록 민주 노동당의 20석 이상을 쟁취하는 것이다.

흐느적거리는 해파리를 퉁퉁 살찌울 것인가. 흔들리는 당신 발 밑에 단단한 벽돌 한 장을 괴일 것인가 더 쌓을 것인가. 그 느끼한 “눈물의 호소”에 닥쳤을 때에 우리가 떠올릴 질문이다. / 논설위원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4/04/12 [10:14]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