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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전용선거구제, 여성 정치의 빛인가
[칼럼] 진짜 '여성'없는 여성선거구제와 여성의 정치세력화
 
정문순   기사입력  2004/02/20 [09:06]

당장 눈앞의 성과를 얻는 데는 도움이 되는 듯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역사의 대의를 거스르는 것이 있다. 지금처럼 지역 주민들의 민원 해결사로 전락해버렸거나, 특정 지역에서는 입후보도 할 수 없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이라면 국민을 진정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지역주의라는 독버섯도 지역구 선거구제라는 토양 위에서 번성한다. 궁극적으로 지역구 선거구제를 철폐하거나 대폭 축소하고 비례대표제 중심으로 뜯어고치는 것, 그것이 역사의 순리요 정의라면, 또 다른 지역구가 될 여성전용선거구제는 이 대의에 부합되지 못한다. 여성계는 입에 들어온 떡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으나, 지역주의의 청산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직결되고 정치의 민주화가 여성의 정치적 성장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여성전용선거구제가 없다 하여 여성이 반드시 손해를 본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례대표 의석수를 깎음으로써 궁지에 몰린 정개특위가 며칠 새 급조하여 내세운 여성전용선거구제를 여성계가 덥석 환영하는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다. 의석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기득권 정당들로서는 지역구의 재탕에 불과한 여성전용선거구제가 털끝만큼도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다. 여성들만 입후보한다 하여 지역 패권 구도 아래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호남 지역에서, 열린우리당이 대구 경북 지역에서 당선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지역 구도의 틈새에서 약자의 승산은 없다. 기득권 정당에는 횡재요 소수 정당에겐 독이니, 여성을 내세워 비례대표제에서 진보 정당에게 빼앗길 의석 수를 채우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국민 전체의 지지는 못 받으면서 지역에선 왕 노릇하는 지역 정당들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일을 찬성해야 하는가. 

그러나 여성전용선거구제에 매달리는 여성계의 모습은 기득권 질서와의 영합이라는 비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한 명의 여성 의원이라도 더 배출하자는 열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정당의 여성 정치인이라도 여성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16대 국회는 여성 정치인이 여성의 우군임을 증명해준 바가 없다. 여성계가 금쪽 같이 귀하게 보는 여성 국회의원들 중 노동법 개정에서 생리 유급 휴가가 없어질 때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일하는 여성의 문제야 엘리트 여성 정치인들에게는 남의 일에 불과했으며, 생리 휴가 문제는 여성계가 아닌 노동계가 풀어야 할 문제처럼 인식되었다. 

장·차관을 비롯하여 각계 요직에 여성이 얼마나 포진하고 있는가는 정치적 진출을 열망하는 엘리트 여성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여성계가 여성의 노동 조건은 크게 후퇴시키면서 여성 장관 4명으로 생색을 내는 노무현 정부에 반색을 표하고, 노 대통령이 "진일보한 여성관"<여성신문>을 가졌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이 정부에서 자신들의 정치세력화 전망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계가 여성의 정치적 성장을 정치권 진출로만 이해하여 여기에 역량을 집중한다면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여성, 곧 인맥과 학벌, 재력이 있는 이들에게 혜택이 몰릴 수밖에 없다. <총선여성연대>가 각 정당에 공천 후보로 추천한 여성들의 면면을 보면 각 분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이 빠짐없이 올라와 있다. 하루는 <여성신문>이 벌이고 있는 '여성리더 1만명 찾기 캠페인'에 올려진 이름을 훑어보다 <자유총연맹> 간부들의 명단을 발견하고는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힘없는 여성은 정치세력화 논의에서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물론 엘리트 지식인 중심의 여성계가 자신들의 정치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까지 나무랄 생각은 없다. 자신이 처한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것은 정당한 일임은 분명하다. 다만 여성계 스스로 모든 여성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정한 계층의 여성들의 이익을 전체의 것으로 호도하는 움직임만큼은 우려스럽다. 그렇다고 여성전용선거구제를 둘러싸고 위헌이니 역차별이니 하는 악담이 들리는 것은 참기 힘들다. 여성의 성장을 바라지 않는 기득권자들이 언제나 하는 말은 들어줄 가치가 없는 것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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