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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의 경제도서] 국민소득 2만달러
노동은 필요악?, 녹색경제학자 슈마허의 '내가 믿는 세상'
 
홍성관   기사입력  2004/01/08 [08:48]

슈마허를 처음 접한 건 학내 서점 앞에서 오래 묵은 책들을 싸게 처분하느라 진열해둔 곳에서였다. 독일 태생으로 2차 대전 후 영국의 관료로 지내다, 미얀마로 파견 나가있는 동안 경험한 생각들을 정리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이었다. 특히 그 중 ‘불교 경제학’이라는 장(章)은 주류 경제학에 찌들어 있던 기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 지나 도서관 서고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잔치는 끝났다

▲내가 믿는 세상     ©문예출판사
‘나라의 상태를 놓고 여론이 들끓는 것으로 볼 때 우리는 지금 고약한 경제위기 후반 국면에 있다.’

경제신문의 최근 뉴스기사가 아니다. 녹색경제학자 E.F.슈마허가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 영국의 환경잡지 <리서전스>에 기고한 글들을 엮은 [내가 믿는 세상(This I Believe And Other Essays), 문예출판사]의 첫 문장이다. 그러나 30년이 넘은 이 한 문장은 바로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가. 올 3,4분기면 가시적인 경기회복이 있을 거라는 한쪽의 전망과 강경노조, FTA결렬 등으로 우리의 선진국 진입은 물건너 갔다는 다른 한쪽의 전망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고약한 이 상황 말이다.

슈마허는 날카로운 비수를 하나 더 던진다. ‘경제 성장으로 다시 행복한 길 위에 들어서는 그 때 우리는 어디에 서 있게 될까?’라고. 그러면서 제발 다음과 같은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주문을 건다.

첫째, 값싼 연료와 원자재는 무한정 공급될 수 있다.

둘째, 아주 험한 보수를 받으며 지겹고 반복적이고 정신을 파괴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노동자들 또한 거의 무한정으로 공급될 수 있다.

셋째, 과학과 기술은 곧, 정말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모든 사람을 매우 부유하게 만들어 우리에게는 남아도는 여가와 부를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외에는 아무 문제도 없게 된다.

왜 우리는 위와 같은 꿈에서 깨어나야 할까, 꿈은 꿈이지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여, 잠시 이 글을 읽기를 멈추고 위의 세 가지가 정말 가능한 일인지 돌아보자. 머잖아 ‘아니올씨다’라는 대답이 선명해질 것이다.

노동은 필요악(必要惡)인가?

오늘날 여러 경제학 이론들은 부의 원천이 인간 노동이라는 데에 이견을 달지 않는다. 하지만 고용주의 눈에 노동은 비용의 한 항목에 불과하며, 기계도입으로 전부 없앨 수는 없어도 죽어라 줄여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노동자의 눈에 노동은 비효용이다. 일한다는 것은 자신의 여가와 안식을 희생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용주는 노동자 없이 생산하기를 노동자는 노동 없이 소득 얻기를 이상으로 삼는다. 말 그래도 노동이 ‘필요악’으로 취급받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기자의 부친께서 ‘주 5일 근무제’와 관련해 “요즘 일하는 사람들은 일할 생각은 않고 놀면서 돈만 받으려고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에 기자는 “먹고 사는 형편이 나아지는 만큼 일은 적게 하고 여가를 늘리고 돈은 그대로 받을수록 좋은 사회 아닌가요”라 답했다. 슈마허가 말하는 불교적 관점에서는 우리 부자가 모두 틀렸다. 즉 일에 대한 대안으로 여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기본적 진리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오해한 결과고, 일과 여가가 동일한 생활과정의 보완적인 부분들이며 일의 기쁨과 여가의 은총이 서로 나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경제’가 모든 사회 이슈의 단연 선두에 있는 시절이다. 특히 97년말 경제위기를 겪은 후로 온 국민의 관심은 타고난 ‘높은 교육열’까지 가세해 상당히 지대해졌다. IMF가 뭐의 약자인지를 알고 있는 국민의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을 것이라는 혹자의 농담을 이를 반영한다. 그렇게 중요해진 경제학은 정작 현실에서는 오히려 점점 무력해지고 있다. ‘정책무력성의 명제’와 같이 알려진 이론을 제하더라도, 똑똑한 경제 관료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경제 정책이 번번이 예상을 빗나가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목도할 수 있다.

슈마허는 경제학의 지혜가 발전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일침을 가한다. 슈마허는 이것이 인간들의 ‘클수록 좋다(특히 큰 숫자일수록 좋아하는)’는 광신 때문이라고 보고,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하지만 사실 얼마나 작아야 하는지, 그래서 적당한 크기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다 해도 ‘적당한 규모’를 추구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이 슈마허의 지론이다.

맑스주의자는 흔히 세상의 문제들을 ‘체제’의 탓으로 본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이윤추구의 동기를 소멸시키고, 다국적 기업을 해체하는 것 등을 주장한다. 슈마허는 이에 대해 우리가 가진 체제는 ‘기술의 불가피한 산물’이라면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답한다. 그 새로운 기술이란 ‘약소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생산적이게 하고 비교적, 독립적으로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신용복 선생이 일전에 말한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개방을 강요하기보다는 각 나라가 자립적인 경제체제를 가지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비슷하다.

건강한 발전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국민생산 2만달러’는 새해에도 끝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저마다 처한 상황에서 ‘2만달러’를 달리 해석하기 때문이다. 기자는 얼마나 빨리 2만달러를 달성하는지 보다는 어떻게 2만달러를 달성하는지가 더 중요한 고민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무작정 ‘선성장, 후분배’를 주창한다면 파시즘의 피냄새가 나고, ‘선분배, 후성장’도 멈춘 시계를 연상케 한다. 문제는 어떤 것이 먼저냐고 구분 짓기에만 연연하는 이분법적 사고다. 우리는 성장과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건강한 발전’이 성장과 분배의 조화라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과 환경 사이의 ‘건강한 발전’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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