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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삐라를 뿌릴 자유는 있다
[정문순 칼럼] 예외없는 표현의 자유,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정문순   기사입력  2015/03/11 [20:18]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퇴보하고 있는 이 나라 수준을 생각하면 다소 생뚱맞으면서도 반갑기도 한 논쟁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성격의 사건들이 동시대에 터지고 있다.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 탈북단체들이 툭 하면 뿌리는 대북전단, 그리고 나라 밖으로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피습 사건을 꼽아볼 수 있겠다. 이들 사건은 표현의 자유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말하자면 언급할 만한 일들이 이것 말고도 몇 개 더 있다. 정부가 우수문학 지원 기준을 자의적으로 정하거나 20년 역사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사퇴 압력을 받은 일 등도 거론할 수 있겠지만, 표현의 자유 논쟁에 끌어오기에는 소모적인 일이다. 당연히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 등에 드리워진 정부의 그림자에 대해서는 탄압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앞의 세 가지 문제에서는 판단을 유보하거나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은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원론은 맞지만 이를 모든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이런 주장을 개별 사건에 적용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위안부 피해 여성을 공격하고 모욕하는 책은 시중에 배포되어서는 안된다, 접경 지역 주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남북 대결을 격화하는 전단 살포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언론인에 대한 테러는 정당화할 수 없지만 “코란은 똥이야.”라고 외치는 정신 나간 신문도 잘한 것은 아니다, 남의 종교를 비하하고 매도할 자유까지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서구의 민주주의는 비서구에 대한 오만과 우월감을 합리화하는 허울이요 가식일 뿐이다…….
 
원칙을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내 귀에는 이 말이 아이스크림을 뜨겁게 해서 먹으라는 말처럼 자기모순적으로 들린다. 원칙과 유연은 본래 병존할 수 없는 개념이다. 원칙을 내려놓거나 포기할 수는 있어도, 원칙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원칙을 유연하게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적용할 때 그때 원칙은 이미 존재할 근거를 잃고 말 것이다. 유연한 태독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다르게 판단하면 되지 구태여 원칙이라는 걸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대북 삐라를 뿌린다고 제재한다면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의 유연한 적용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냥 언론 자유에 대한 탄압일 뿐이다. 전단 살포 행위에 위법 소지가 있다면 법에 따라 제재하면 될 것이다. 대북 전단에 달러를 붙여 날리는 행위는 외국환거래법이나 남북교류 관련 법 심지어 국가보안법에도 저축된다.
 
‘다행히도’ 이 나라 정부는 대북 전단 살포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물론 정부가 언론이나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것이 가소롭고 속상하기는 하지만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는 그걸 누리거나 언급할 만한 자격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을 풍자하는 창작물을 탄압한 자들이 자기들 편의대로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북 전단에 대한 유연한 원칙의 적용은 삐라 살포를 제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북한에 “저 사람들은 건드리면 더 날뛰는 사람들이니 대응하지 말아달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탈북 단체의 재정적 지원을 줄이거나 이들 단체에 삐라 살포에 대한 자제를 요청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탈북단체의 관심사는 북한 인권이나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분단 국가에서 모순된 처지로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데 있다. 자신들이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니 대우를 받고 싶다는 것이다. 무관심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시끄러운 일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의 경우는 어떤가. 샤를리 에브도 사태를 계기로, 불편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나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나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제쳐두고 서구 민주주의를 도마 위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말대로 서구 사회가 자랑하는 표현의 자유는 기만이거나 허울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울이요 껍데기일 뿐이거나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라도 표현의 자유는 금과옥조로 지켜져야 한다. 풍자나 비판을 모독이나 명예훼손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용인된다면 종교 빼고 만만한 것들만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를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책의 핵심적 논란 가운데 하나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군대에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한 것만이 아니라 일본군과 연애를 한 경우도 있었다는 저자의 주장인데 이것이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며 피해자들을 모독했다고 단정짓는 건 쉽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법원까지 가져가서 사법부의 판결을 구해야 하는 일이었을까. 위안부 여성들이 일본군들과 정서적 교류를 했다는 것은 이번이 처음 나온 주장이 아니다. 전쟁 중은 아니더라도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장교와 동거생활을 했다는 피해자의 증언도 나왔고, 다큐멘터리나 소설에서도 이미 비슷한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재미작가 이청래가 쓴 소설 <척하는 삶>에는 일본 군의관 장교와 위안부 여성이 연애 감정을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심지어 위안부를 둘러싸고 일본군 장교들끼리 연적이 되는 일까지 등장한다. <척하는 삶>은 정대협 관련자의 조언도 거쳤고 저자가 한국에서 축적한 위안부 관련 기록을 충분히 참고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유독 <제국의 위안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왜일까? 위안부 피해자와 일본군 사이의 감정적 교류나 연애를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침소봉대하고 확대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의 성격이나 반인도적 범죄성을 은폐하려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자와 책을 법적으로 단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특정 페이지를 삭제해야 출판할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은, 한국 사회가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한 주장은 유포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의 반영이 아닐까. 책의 주장이 아무리 무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저자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정말 훼손했는지는 의문이다. 작가가 진정 가혹한 역사의 피해자들을 어루만지기는커녕 되레 명예를 훼손하고 모욕할 의도가 있었는지는 그의 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책이 유통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자들이 외면하면 되는 것이다. 사법부가 개입하여 독자들의 접근을 처음부터 차단하여 판단할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만약 이런 책을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고 독서시장의 선택을 받는다면 그것도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질 낮은 주장을 논쟁과 대화, 설득으로써 이겨내지 못한 우리 사회 역량의 한계를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은 법적인 규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탁상 머리에서 논쟁으로 풀어야 한다. 풍자나 비판과, 악의적인 모욕을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로는 대통령을 치킨으로 묘사한 그림이 핍박을 받는 것도 문제가 없게 된다.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모욕이라고 받아들일 테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 예외 없는 표현의 자유라는 대원칙이 우리 사회에서 정립되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고 얼렁뚱땅 넘기다가는 계속 비슷한 일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 단순한 원칙이 자리잡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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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3/11 [20:1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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