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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정글만리>
[정문순 칼럼] 중국 장사 재미에 열 올리는 <정글만리>, 문학이 아니다.
 
정문순   기사입력  2014/02/03 [14:41]
<정글만리>는 소설인가, 르뽀인가

조정래의 <정글만리>는 특이한 소설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우선은, 강렬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의 이력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정글만리> 이전 가장 최근작에 해당하는 <허수아비 춤>만 해도 작가는 한국 경제를 손아귀에 움켜진 재벌가의 부도덕한 대물림을 경계하고 경제민주화를 향한 목소리를 높였다. 조정래의 소설에 서린 사회 모순에 대한 분노와 사회 정의의 열정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런 점이 사라진 <정글만리>는 다른 작가가 쓴 소설처럼 보일 것이다. 

▲ 중국을 무대로 쓰여진 이 소설은 중국이 세계의 시장으로 변모해 경제 대국으로 성공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 해냄출판사
<정글만리>는 밀림과도 같은 중국 시장에 뛰어들어 피 말리는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분투하는 각국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다. 12억 인구의 중국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각국 기업들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펼치는 머리싸움, 암투, 배신, 좌절, 재기, 허무 등이 주조를 이룬다. 중국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요령쯤으로 부제를 붙일 만한 이 소설에서, 조정래는 중국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고 중국이 지닌 갖가지 모순을 들추어내기는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한국 작가로서 조정래에게 중국 비판이나 풍자는 그의 소설이 향하는 궁극적인 종착역은 아니다. <정글만리>는 한국인의 눈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중국을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제대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오롯이 바쳐지고 있다.

이 대목에서 중국이라는 특정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소설을 쓰는 목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이란 것은 인간의 어떤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탐구하는 것이지 특정한 국가를 알기 위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을 띤 건 아니었다. 이 점에서 <정글만리>는 일반적인 소설의 성격상 특이한 소설에 속하게 된다. 조정래를 집필로 이끈 것은 다름아닌 중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이다.

“이제 머지않아 중국이 G1이 되리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중국이 강대해지는 것은 21세기의 전지구적인 문제인 동시에 수천 년 동안 국경을 맞대온 우리 한반도와 직결된 문제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 국가 중 하나. 40년이 걸릴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고 G2 강국 자리를 꿰찬 나라. 2016년쯤엔 기어이 미국을 제치고 G1이 될 나라. 이런 나라가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을 잘 아는 것은 필수적인 과제라고 조정래는 말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중국이 대단한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을 공부해야 한다면 이를 문학의 영역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학은 눈앞에 닥친 삶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중국의 경제적 위상 때문에 중국 공부가 필요한 사람들은 무역업자나 유학생 등 중국에 진출해 있거나 진출하고 싶은 사람들일 것이다. <정글만리>는 생계나 실용적 목적으로 중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의 구미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은 쉽지 않다. “뭐든 과시하기 좋아하는 중국사람들의 고질병”이라는 소설 속 중국인의 자기 진단이 있지만, 이는 졸부 아버지를 창피하게 생각하는 자식의 입에서 나온 평가이다. 중국인들은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이들이 자기 과시를 위해 거주하지도 않을 빈집을 요란하게 지어놓는 허세도 부리지만, 그 못지않게 실속을 챙기고 체면에 개의치 않고 실용을 추구하는 데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중국을 평가하려고 달려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중국은 “속이 열 겹, 스무 겹”이며 “뒤죽박죽 뭐가 뭔지 제대로 알기가 무척 힘든 나라”이며, “생각할수록 골치아픈 나라”, “황당무계하기가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이다. 시안의 포스코 지사장으로 나오는 인물인 김현곤이 젊은 나이에 미국 건설 회사 사장 자리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앤디 박에 대해 진단했던, “만나는 시간이 갈수록 어떤 형체가 잡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고 어지러워지고 있었다.”라는 인물평은 그대로 중국에 대한 평가로 바꿔놓아도 무방하다.

결국 중국에서 15년을 살았던 한국 주재원 지사장의 결론인, “중국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중국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할지도 모른다. 작가가 파악하는 중국은 알면 알수록 두려운 존재여서, 공무원들의 뿌리 깊은 부패, 환경오염, 배금주의, 빈부 격차 등 온갖 모순과 고질적인 사회 문제마저 삼켜버리는 거대한 블랙홀로 보인다. 그러니 중국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몸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로 중국을 가능한 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태도. 작가가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소설 초반부에서 산재 피해 농민공의 비극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던 소설은, 후반부에 가면 타이산(태산)의 수천 개 계단을 하루 종일 오르내리고도 맥주 한 병 값에도 못 미치는 일당을 감수하는 짐꾼을 통해 저임금 착취를 분노하기보다 중국인의 저력에 감탄하는 것으로 바뀐다. 물론 이런 태도들을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라는 문학적 탐구의 차원으로 볼 수는 없다. 한국인들이 중국 시장에서 살아남거나 성공해야 하는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중국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중국을 이해해야만, 일본 기업 주재원들처럼 중국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중국을 헐뜯기만 하다가 주재원 생활을 마감하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며, 14억의 중국 시장을 상대로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인류가 존속하는 한 기억될 천인공노할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도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대항하여 한국과 중국이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중국 이해는 필수라고 작가는 역설한다.

착한 한국인과 나쁜 일본인

작가는 중국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거듭 강조하지만, 인물 설정에서는 현저히 객관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감당해야 한다. 소설에서 한국인들은 상사 주재원, 기업가, 유학생, 성형외과 의사를 가리지 않고 죄다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종합상사 부장인 전대광, 포스코 지사장 김현곤, 칭다오의 액세서리 제조업체 사장 하경만 등의 기업가들은 중국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악착같은 인내와 끈기, 지독한 근성, 대담한 승부근성을 갖춘 모범적인 비즈니스맨들로 묘사된다. 이들은 작가가 중국에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배우고 닮아가기를 권하기 위해 공들여 설정한 인물들이다. 퇴직을 앞둔 전대광이 후배 강정규에게 중국 비즈니스 성공 요령을 자세히 조언해 주는 모습은, 한국인이 중국에서 기업가로 성공하기 위한 지침서로서 이 소설의 의도를 가장 충실히 드러낸 부분이기도 하다. 이들이 자신의 성공에 집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딱한 처지에 몰린 동료나 한국인을 배려하고 돕는 모습도 사뭇 감동적이다.

또 미국 교포 출신이면서 골드그룹 사장인 앤디 박은 자기 몫의 리베이트마저 회사에 내놓을 정도의 정직함으로 그룹 회장으로부터 유일한 신임을 받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제학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꾼 북경대 유학생 송재형은 중국에 대한 이해와 애정, 동북아시아 역사를 보는 균형 감각을 고루 갖춘 미래의 인재이다. 또 의료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혈혈단신 중국에 건너온 성형외과 의사 서하원은 중국 여성들의 성형 붐을 충족시켜주는 일을 하면서도 인간의 순수함과 양심을 원형 그대로 간직한 인물로 그려졌다. 작가의 이같은 한국인 편향은 중국에서 가짜 명품을 만들어 팔아 툭하면 공안을 들락거리는 사람마저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는 인물로 만들어 놓을 정도이다.

작가의 ‘애국적’ 편애는, 한국인에게는 열등감을 느끼고 중국인은 얕잡아 보면서 불법 성매매업소에 단골로 드나들며 고달픈 이국의 삶을 허비하는 사람들로 일본 상사 주재원들을 묘사한 것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룬다. 작가는 중국인마저도 한국인을 애인으로 둔 사람 정도나 긍정적으로 묘사할 뿐 한국인을 등쳐먹거나, 뇌물과 리베이트 관행이 만연한 중국 기준으로도 몰염치스럽게 부정한 돈을 밝히거나, 천박한 졸부 근성에 찌들어 있거나, 배경이 좋은 아내에 의지해 출세 줄을 잡는 등 부정적인 모습을 그리는 데 기울어져 있다. 작가가 미국이나 프랑스 출신 사업가들조차 결코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는 데 비하면 한국인에 대한 애정은 과도하게 균형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번역을 거치지 않는 한 <정글만리> 독자의 100%를 차지할 한국인들의 기분은 우쭐하게 할지언정 문학적으로는 낙제에 가까울 것이다. <정글만리>가 인물의 개성이 없다는 평가가 나왔던 이유도, 작가가 인물의 개성적인 형상화를 통해 문학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중국 안내서라는 실용서를 쓰기 위해 한국 비즈니스맨들을 중국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가 모델로 획일화시켰기 때문이다. <정글만리>가, 독자의 호기심을 충족해 주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베이징, 상하이, 타이산, 시안, 난찡 등 세계적인 관광지나 역사적인 도시에 대한 소개와 설명에도 지면을 넉넉히 할애할 때 이 소설은 경제 대국과 관광 대국인 중국을 안내하는 종합 가이드북 구실을 자임하고 있다.

인물을 대할 때 객관성을 잃은 조정래의 편향은 성적인 측면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골드그룹 회장인 중국계 미국인 왕링링이라는 여자가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가 되어 중국 건설업계를 한동안 주물렀던 비결은, 본인의 역량뿐 아니라 그녀가 능력 있는 미국인 양아버지를 만난 천운과, 공안 최고 수뇌부 10여 명의 ‘얼라이’(정부) 노릇을 한 것에 있다. 급기야 고의 부도를 내고 미국에 야반도주하는 왕링링의 존재는 여성의 사업가적 능력에 대한 조정래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부분이다. 작가가 중국 여성들의 성적인 자유분방함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한 태도에서도 성적 편견은 드러난다. <태백산맥>을 위시한 소설에서 여성을 남자한테 일방적으로 이끌리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존재로만 치부했던 조정래의 고질화된 편견이 여전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글만리>는 더러 감동적인 장면도 없지 않다. 유학생 송재형이 중국 대학생들에게 2차 세계대전 패전 당시 일왕의 항복 선언문을 읽어주며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 맞서 힘을 합치자고 열변하는 것은, 역사의식을 일깨우려는 작가적 사명감이 모처럼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역사 의식의 강조는 작가가 중국을 상품 시장으로만 치부한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구색을 맞추기 위해 뿌린 양념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주된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소비 시장으로 변모한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이다.

조정래는 중국을 함부로 해석하는 것을 거듭 경계하고 있지만, 작가 스스로 이를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과도하게 주관적인 해석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물리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가령 중국 대륙의 북방 출신 남자들이 체력이 장대한 것이 북방 이민족의 중국 지배로 이어졌다는 식의 주장을 설파하는 작가를 보면 유전자 결정론을 넘어 우생학이 연상될 정도이다.

<정글만리>에서는 특정 기업에 대한 작가의 애정도 느껴진다.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과 생전에 교분이 두터웠고 그의 전기까지 집필했던 작가로서, 소설에서 포스코를 실명으로 언급하며 이 회사 임직원들의 눈부신 활약을 부각하는 것도 모자라 조선족 여성의 입을 통해 포스코를 ‘민족 기업’으로 격상시키는 과도한 띄우기도 균형 잡힌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정글만리>에서 호들갑스러울 정도의 중국에 대한 평가를 빼고 나면 남는 게 무엇일까. 조정래라는 이름값 + 중국이라는 나라의 인기가 <정글만리>를 부동의 베스트셀러로 등극시킨 비결일 것이다. <정글만리>는 예상을 훨씬 앞지르는 시기에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한 중국에 대한 경계심과 당혹감에 기댄 작가의 장삿속이 빛을 발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이웃 나라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기심에 기대려는 작가의 심리가 글쓰기의 원동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소설은 중국에 대한 전망이 실체 이상으로 부풀려졌다는 혐의를 면하지 못한다.

작가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중국에 끼친 영향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말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다르게 보고 있다. 2008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실질GDP 성장률은 정점에서 하강 국면으로 역전되었으며 그럼에도 중국은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고정 투자액을 크게 늘리는 등 과잉투자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최근 미국 경제가 완만한 회복을 지속하고 있는 데 비해 중국 경제는 제조업 둔화와 내수 소비 부진을 겪고 있는 중이다.(김광수경제연구소)

문학성이 빠진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중국을 소재로 르뽀나 연구물이 필요했다면 굳이 소설을 쓸 이유는 없었다. 소설이라는 의장을 달고 실용 서적을 펴낸 조정래를 보며, 몇 년 전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고 남의 저작을 도용한 것을 짜깁기하여 ‘다큐소설' <강남몽>이라는 해괴한 이름의 ‘유사’ 소설을 펴냈던 황석영이 떠오른다.
 

문단의 거장들이 어쩌다 무늬만 소설인 책을 쓰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수 십 년 간의 창작 피로가 누적된 탓일까. 차라리 집필을 쉴망정 대작가들이 이런 식으로 서사 능력의 한계를 내보이는 것이 안타깝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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